기구하게 태어난 영웅은 제가 받은 힘으로 난관을 헤치기 마련이다. 궁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일개 승려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적이 자부심을 품고만 살았다. 그에게는 일찍이 이렇게 왕의 꿈이 심어졌다.
다행히(?) 시대는 어지러웠다. 특히 그가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은 진성여왕 5년(891)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오만무례하였다. 이듬해 양길(梁吉)을 찾아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아직 경험과 힘이 모자란 궁예로서는 ‘선배 반란군’에게 한 수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문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천5백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그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해 준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가 미륵보살을 자처하는 시기가 이즈음일 것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세달사의 분위기나, 신라 말 강릉에 미륵사상을 전하는 진표(眞表) 같은 승려의 끼친 영향이 궁예의 통치술 구축에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이때의 미륵보살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의 백성에게 그야말로 미륵 같은 존재였다.
세력이 커지자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게다가 거기서 천군만마와도 같이 왕건이라는 뛰어난 부하를 얻었다. 본디 개성 출신인 왕건은 철원으로 와 896년부터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왕건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을까, 궁예는 개성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궁예의 거침없는 기세 앞에 불편해진 이가 양길이었다. 제 밑에서 싸움질을 배운 피라미가 이제는 자신을 향해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양길은 궁예의 힘을 꺾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도리어 궁예였다. 양길에게 이기고 궁예는 가슴 가득 느꺼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키워준 어머니의 타박을 받고 절로 떠나던 초라한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왕이었다. 드디어 901년, 왕을 자칭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 [삼국사기]
궁예의 일생 최전성기에 후고구려는 이렇게 세워졌다. 견훤이 남쪽에서 후백제를 세운 1년 뒤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