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 후백제 건국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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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 후백제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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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386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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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867~936)은 백제 땅에서 배출한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의 일생담에 어울리는 가지가지 에피소드로 장식된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대적하였으므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기록과 평가는 편파에 가까워서, 균형감을 가지고 한 영웅의 일생에 인간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용맹 하나로 혼란스러운 세태를 헤쳐 간 그의 개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줄까.
 
 
견훤의 생애는 극과 극을 달린, 비극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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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을 기리는 영산제가 오늘날에도 열린다. 그의 무덤이 있는 충남 논산시가 주관하는 행사이다. [삼국사기] 견훤전에서는, “황산 절간에서 세상을 떠나니 9월 8일이었다.”라고 적었는데,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즈음하여 행해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산 절간’이 연산면의 개태사이고, 완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견훤의 유언에 따라 연무읍에 무덤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견훤은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살아 있는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다. 그런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니 먼저 두 가지 에피소드가 앞을 막는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고, 어머니는 밥을 나르러 갔었다. 아기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과연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해지고 특이했으며, 기개가 호방하고 범상치 않았다.” - [삼국사기]에서
한마디로 견훤은 호랑이가 젖을 먹여 키운 아이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 상주 가은현 사람인데, 농사를 지며 생활하다가 뒤에 출세하여 상주를 다스리는 장군이 되었다. 성을 이씨로 바꾸었던지 견훤 또한 이씨였다가 나중에 ‘견’으로 성을 삼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하여 준다. 호랑이가 키운 아이답게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릴 정도로, 기백이 항상 다른 군인들을 앞섰다. 그런데 이 아이의 최후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정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왕께서 연로하셔서 군국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섭정하게 되었다고, 여러 장수가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때 노래 하나가 유행했다.
가엾은 완산 아이가/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 [삼국유사]에서
아들 신검과 갈등 끝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호랑이가 키운 아이는 어느덧 가엾은 완산 아이가 되어 눈물짓는다. 그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이는 만큼 견훤의 생애는 극과 극을 달려온 비극의 파노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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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탄생을 설명한 [삼국유사]의 한 부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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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세운 견훤,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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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항하여 후백제를 세웠지만, 뜻밖에 그의 평생 라이벌은 신라가 아닌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었다. 왕건 또한 고구려를 이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나선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에게 모두 이미 지는 나라와의 대결은 의미가 없었다. 견훤의 평생은 왕건과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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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포석정이다.
<출처 : Kokiri at ko.wikipedia.com>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견훤이었다. 892년, 신라 진성여왕 6년 되는 해, 견훤은 몰래 무리를 불러 모았다. 그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호응해, 한 달 사이에 군사가 5천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광주에서 스스로 왕으로 나섰다. 그를 가장 반긴 곳은 완산이었다. 완산은 지금의 전주이다. 이에 고무받아 도읍을 세워 묵은 분을 씻겠노라며, 드디어 후백제의 왕이라 불렀다. 900년, 신라 효공왕 4년의 일이었다. 이때까지 그의 상대는 궁예였다.
왕건이 후발 주자로 나섰다. 918년, 철원에서 궁예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견훤은 920년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924년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견훤의 신라 공격이 정점에 이른 것은 927년이었다. 바로 경주 공격이었다. 신라의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놀고 있다가 크게 당한 바로 그 전투이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왕의 집안 동생 김부(金傅)를 세워 왕위를 잇게 했다. 이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이다. 돌아가는 길에 견훤은 팔공산 아래에서 왕건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견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왕건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했고, 왕건도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견훤의 기세는 다하였고, 결국 금산산 불당에 유폐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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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929년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왕건이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견훤의 기세는 여기가 끝이었다. 점차 힘을 키운 왕건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932년,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이 왕건에게 항복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견훤이 그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다 불로 지져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지만, 물이 새는 조직을 강화하려는 이 극단적인 조치는 도리어 부하들에게 공포심만 조장하였을 뿐이었다. 그 이후 견훤 밑을 떠나는 부하 장수는 줄줄이 나왔다.
견훤의 결정적인 패착은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물려주려 한 데 있었다. 금강보다 위인 신검∙양검∙용검이 이를 알고 이찬 능환(能奐)과 함께 모의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圍離安置-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둠)되었다. 가엾은 완산 아이라는 노래가 불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라이벌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고,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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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금산사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었다. 6월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절에서 도망친 견훤은 왕건을 찾았다. 지난날의 라이벌에게 생애의 마지막을 의탁하러 간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라 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견훤은 왕건에게 반역한 자식을 죽인다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노라 말하였다. 지난날의 적에게 의탁하여 이윽고 제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된 견훤. 그것으로 권력의 비정함을 설명하자면 좋은 소재가 되겠으나, 한 사람의 생애로 보자면 지극히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왕건은 신검이 남에게 협박을 받아 분수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면서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울화병으로 등창이 생겼다. 견훤의 사망 원인은 그것이었다. 비참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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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위리안치 되었던, 김제의 금산사.
<출처 :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편지로 싸운 왕건과의 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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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견훤의 생애가 포악과 비참으로 그려진 데는 고려시대에 와서 정리된 역사의 기록이 다분히 왕건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차피 패자는 역사의 역적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견훤은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시대의 영웅으로 왕건과 패권을 다툰 그의 생애는 꿋꿋하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왕건과 편지로 일합을 겨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족하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한갓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계략으로 넘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략하고 있소. 그러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했소. 초겨울에는 도두 색상(索湘)이 성산 싸움에서 손이 묶였고, 이달에는 좌장군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햇볕에 쬐었소. 죽이고 얻은 것이 많으며 쫓아가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음을 보아, 강약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승패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삼국사기]에서
한마디로 기고만장한 글이다. 자신의 쇠털 하나 뽑아가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를 넘보느냐고 깔본다. ‘해골을 햇볕에 쬐였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그 살기에 흠칫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결론은 분명하다. 이제 곧 북쪽을 평정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그 말끝에,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비유가 재미있다. 장수다운 기개가 넘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왕건 또한 이에 질 수 없었다. 비록 싸움에서 밀리고 있지만, 여기서마저 물러설 수 없었고, 여러모로 분위기는 자기 쪽으로 유리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던 터였다. 왕건의 답장 가운데 한 구절을 보자.

“그대가 처음에는 상대를 가볍게 여기고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버티려는 것 같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깨닫고 물러서는데,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 같았소. 두 손을 모으며 사과하고 하늘을 가리켜, ‘오늘부터 영원토록 화친하겠소. 만약 맹세를 어기면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라고 맹세했소. (중략) 그런데 맹세한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흉포한 군사가 다시 일어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했겠소. (중략) 나의 원한은 신라의 왕이 돌아가시자 극에 달했소. 나는 해를 돌이킨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달려갔으며, 개와 말 같은 충성을 펼쳐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되었소. 육지에서 싸울 때엔 우레같이 내닫고 번개같이 빨랐으며, 바다에서 싸울 때엔 범같이 치고 용같이 뛰어올랐기에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했고 일어서면 헛됨이 없었소. (중략)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삼국사기]에서
왕건이 보낸 답장은 훨씬 부드러우면서 자신의 의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리에 맞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신라 왕이 지지해 준 것처럼, 명분은 이미 결정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사실 견훤이나 왕건이나 진중의 문장가의 손을 빌려 썼지만, 그들의 성정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글이다. 항우 같은 패기의 견훤이라면, 유방 같은 온유돈후함의 왕건이다. 끝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겼지만, 두 사람은 10세기 경 우리 역사를 풍요롭게 한 개성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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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나오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삼국사기]옥산서원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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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적인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는 견훤의 다른 면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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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것처럼 왕건과 비교하면, 견훤에 대한 고려시대의 평가는 일방적이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견훤전의 마지막에 붙인 평가의 글은 대표적이다. 김부식은 견훤이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신라의 국록을 먹으면서, 발칙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함을 다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하들을 마치 새나 짐승 죽이듯 했으니, 참으로 천하에서도 가장 악한 자”라며 한 마디로 내친다. 그러기에 자기 자식에게서 재앙을 입었지 않았느냐고 비꼰다. 그러면서 “태조에게 백성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라고 맺는다. 태조는 물론 왕건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견훤에게 붙여 색다른 그의 모습을 부각시켜 놓고 있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후백제와 견훤’ 조를 만들어 견훤의 생애를 썼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삼국사기]를 인용했으나, 완산 아이 노래와 함께 그의 탄생담을 따로 덧붙였다. 두 에피소드가 모두 견훤이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적실하다. 전형적인 야래자(夜來者) 설화의 형태를 띤 이 탄생담은 영웅의 기구한 일생을 알리는 서막과 같다. 유학자의 시각으로 본 패역한 반역의 무리와 다른 견훤의 생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