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 해상왕국의 건설자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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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 해상왕국의 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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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321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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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의 적산서원은 일본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이곳에 활을 든 장보고(張保皐, ?~846)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의 적산법화원에서도 장보고의 영정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서남해안의 해적을 평정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는 우리 역사서보다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 더 상세히 소개된 국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와 일본에서 더 높이 평가 받는 국제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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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어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었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 때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하며,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圓仁)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듯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 일본의 [일본후기]∙[속일본기]∙[속일본후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전한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기록이 가장 간략한 편이다. 우리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국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은 궁복(弓福), 궁파(弓巴)이다. 신라에 있을 때는 신분이 낮아 성이 없는 궁복이라 불렸을 것이다. 활을 잘 쏜다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다. 그러다 중국에 가서 ‘궁’자와 한자가 비슷한 장씨라는 성이 붙고, ‘복’이라는 이름과 소리가 비슷한 ‘보고’로 바뀌었던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기록에는 장보고(張寶高), 그러니까 재물을 많이 획득했다는 의미로 한자의 표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신분이 올라가면서 이름도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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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한 흠모와 존경을 드러낸 일본 승려 엔닌의
동상
<출처 : Jnn at ko.wikipedia.com>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당으로 건너가 당나라 군대의 중간 관리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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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출생과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 근처의 어느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정년(鄭年)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청해진으로 온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청해진이 그의 연고지였던 점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장보고는 한반도 남쪽 끝자락의 어느 섬에서 “아주 미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또 다른 사료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대적할 자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몇 살 어린 정년과 성장기를 함께 보냈는데,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고 수영에도 능했다. 특히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고 한다.
무예가 출중하고 명민하기까지 했던 이 두 청년은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혀 있던 신라 대신, 개방적이었던 당나라를 택했다. 젊은 시절 어느 무렵인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당나라가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었다고는 하나, 낯선 타국에서 군대의 중간 지휘자가 되었음은 용맹과 무예가 그곳에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당나라에 머무는 신라인들의 신임을 쌓아 이후 재당신라인 조직을 건설하는 기반을 닦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처음 생긴 것이 805년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805년 무령군 소장에 올라 821년 무령군의 군대감축이 시행될 무렵 군대를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엔닌의 [임당구법순례기]에 824년 일본에 도착한 장보고가 엔닌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 활동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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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꿈이 살아 숨쉬던 청해진. 왼쪽부터 보이는 건물은 외성문, 내성문, 그리고 사당이다.
<출처 : Rheo1905 at ko.wikipedia.com>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상을 장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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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이 해적에게 붙잡혀 와 노예로 팔리는 현실을 수없이 목격했다. 당의 조정은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금지한 바 있으나, 중국 연안지대 곳곳에서 자행되는 신라노예 매매는 뿌리 뽑히지 않고 있었다. 828년 장보고는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간청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 명을 주었다. 신라의 정식 관직에는 대사라는 명칭이 없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 출신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어렵자 장보고에게만 준 예외적인 관직이거나,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별칭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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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에 설치된 청해진 모형.
<출처 : Rheo1905 at ko.wikipedia.com>

한편, 김헌창의 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고 난 신라 조정에서 과연 해안지대의 군사기지에 1만 명이라는 군사를 보낼 수 있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이는 현지 주민 1만 명을 장보고가 규합한다는 것에 대한 양해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그에 인접한 장좌리·대야리·죽청리 일대에는,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던 부두시설·토성·우물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9세기 당대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 있던 흔적들이다. 완도에 성을 쌓고 항만시설을 갖춘 장보고는 선박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했을 것이다. 장보고의 군사들은 황해로 출동해 해적을 소탕했다. 해상을 안정시키고 나서 당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에 뛰어들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당시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행해지던 조공무역의 시대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당나라와 신라, 일본 삼국에서 모두 국가 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 무역선단이었다. 장보고는 단순히 삼국의 특산물을 사고파는 중계 무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상인들이 당나라까지 가져온 서역의 물품들을 신라와 일본에 전했고, 당시 인기 있었던 자기를 직접 청해진에서 생산해내기도 했다.
신라 말기, 왕위 교체의 혼란함에 휩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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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게 청해진을 허락했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흥덕왕의 사촌 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시중으로 있었던 인물로, 그때의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권력 다툼을 피해 몸을 맡길 만큼 장보고의 청해진은 독립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안 되어 김명과 김이홍 등의 반란으로 희강왕이 자결하고 김명이 민애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청했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장보고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838년 청해진의 군사가 왕경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근거지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5천 명의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정년이었다. 왕경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중앙군은 청해진 군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청해진군은 도망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였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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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외성문 앞의 대형 우물, 청해진은 당시에 해상
기지로서, 그리고 무역의 거점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창한 곳이었다.
<출처 : Rheo1905 at ko.wikipedia.com>
 
 
 
장보고는 감의군사가 되었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감의군사는 상징적인 군사 최고 지휘권자인 듯하나 새로 만들어진 자리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식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러한 특별대우는 김유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로운 왕을 세웠으나, 반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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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가, 왕위에 오른 김우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도 전하다.
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군사행동을 일으킨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 바 없다. 실제 반란을 일으켰든 그렇지 않든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 [삼국사기]는 장보고가 846년에 죽었다고 전하지만,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841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 뒤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염장이 진압했고,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다.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계속되는 완도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851년 청해진은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