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출생과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 근처의 어느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정년(鄭年)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청해진으로 온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청해진이 그의 연고지였던 점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장보고는 한반도 남쪽 끝자락의 어느 섬에서 “아주 미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또 다른 사료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대적할 자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몇 살 어린 정년과 성장기를 함께 보냈는데,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고 수영에도 능했다. 특히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고 한다.
무예가 출중하고 명민하기까지 했던 이 두 청년은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혀 있던 신라 대신, 개방적이었던 당나라를 택했다. 젊은 시절 어느 무렵인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당나라가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었다고는 하나, 낯선 타국에서 군대의 중간 지휘자가 되었음은 용맹과 무예가 그곳에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당나라에 머무는 신라인들의 신임을 쌓아 이후 재당신라인 조직을 건설하는 기반을 닦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처음 생긴 것이 805년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805년 무령군 소장에 올라 821년 무령군의 군대감축이 시행될 무렵 군대를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엔닌의 [임당구법순례기]에 824년 일본에 도착한 장보고가 엔닌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 활동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