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경험과 계시가 불편하게 동거하고 있지만, 생략되어 있는 부분을 채우니 이제 중세 철학자의 주장이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한 중세 철학자는 바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다. 오컴 자신이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 경험과 계시 사이의 불편한 동거는 결국 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기존 중세 철학자들의 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며, 이후 홉스와 흄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그 영향은 20세기 논리 실증주의에게도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윌리엄 오컴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더불어 후기 중세 철학 Big3에 포함된다. 1280년대 말 영국 런던 근처 오컴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347년 즈음 독일 뮌헨에서 (아마도) 흑사병으로 죽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그가 참여한 수도사의 청빈에 대한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었으며, 당시 교황인 요한 22세와 독일 황제였던 바바리아의 루이스(Louis the Bavarian)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때 오컴은 독일 황제 편에서 그 투쟁을 이끌었던 중요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다.
물론 이런 철학 외적 활동 때문에 그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혹시 당신이 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면도날과 유명론. 과거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오컴의 철학을 ‘면도날과 유명론’으로 요약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면도날로 비유되는 철학적 원칙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엄격하게 말하자면 유명론자도 아니었다. 이제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