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망에 갇힌 로마군은 학살을 당했고 이날 전투에 참여한 8만의 로마군 중 6만이 죽었다. 고위 귀족 80명도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죽은 로마군의 손에서 빼낸 반지만 하여도 큰 바구니 세 개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패닉상태에 빠졌다. 죽은 로마인들이 워낙 많아 로마시민이라면 누구이건 칸나에에서 죽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였다. 로마의 사가 리비우스(Titus Livius)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평상시 그 어떤 때도 이때처럼 로마의 성벽안이 공황(恐惶)과 혼란으로 가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적더라도 그 현장의 광경보다는 덜할 것이기에, 이를 적지 않고자 한다.”
로마가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한니발은 로마인에게 공포의 대명사였고 우리나라 부모들이 ‘못되게 굴면 호랑이가 물어간다’라고 하였듯이 로마의 부모들도 못되게 구는 아이에게 ‘Hannibal Ad Portas!(한니발이 성문밖에 왔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공황과 혼란은 로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리비우스는 동맹들에 대해서도 적는다.
“그날까지 우리 곁에 굳건히 서 있던 동맹들이 우리나라(로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이번의 참사(慘事)가 그 이전에 벌어진 어떠한 일보다도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나에 전투 이후: 전세의 역전
칸나에 전투 이후 BC 212년에 벌어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공방전은 포에니 전쟁에서 ‘곁가지’ 전투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시라쿠사는 지도부가 로마파와 카르타고파로 갈린 상태였는데, 카르타고파가 일시적으로 득세하였으나 친카르타고파인 시라쿠사 왕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암살되고 친로마파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로마는 시라쿠사가 언제 정쟁에 휘말려 다시 돌아설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대선단과 상륙군을 보내어 공격하였다. 시라쿠사는 로마군을 맞아 싸울 수밖에 없었고 바다를 따라 지어진 성벽 위에서 배를 타고 오는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이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시라쿠스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였다.
아르키메데스의 과학적 발견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치도록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시라쿠사 공방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로마군은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키기보다 아예 배에 사다리 가교를 장착해서 배에서 바로 성벽을 올라가 공격할 수 있게끔 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발리스타(일종의 大弩)와 오나게르(투석기)를 사정거리가 짧게, 중간 정도, 그리고 길게 개조하였고 이를 알맞게 성벽에 배치해 로마군에게 쉬지 않고 돌과 납덩이를 날렸다. 로마군 선원들은 성벽에 다가가기도 전에 돌덩이와 납탄들을 피하느라 바빴다. 밝은 낮에 다가갈 수가 없자 로마군 지휘관 마르켈루스(Marcellus)는 야습을 시도하였는데 시라쿠사는 역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하르파게’로 대응하였다. 하르파게는 갈고리가 달린 도르래 기중기로서 로마 함선이 다가오면 줄에 달린 갈고리를 내려서 배에 걸리게 한 다음 들어 올렸다. 배를 완전히 들어 올려 거꾸로 떨어뜨려 물에 잠기게 하거나 약간 들어 올린 다음에 떨어뜨려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아르키메데스의 도움을 받은 시라쿠사인들의 호수비에 막혀 거의 2년을 허비하였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이를 틈타 시라쿠사를 도우려 하였으나 패하고 물러섰다.
시라쿠사의 선전은 오히려 자만심을 키우게 되었고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를 성대히 열었다. 이를 틈타 수십 명의 로마군이 시라쿠사의 외벽을 넘어 성안으로 잠입하여 성문 보초들을 죽이고 성문을 열었다. 술에 취하여 자고 있던 시라쿠사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학살당했다. 로마 지휘관 마르켈루스는 혹시라도 아르키메데스를 찾으면 죽이지 말라고 하였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자기 집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로마병사가 들이닥치자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가 누구인지 몰랐던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이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있었다. 인근의 카푸아와 타란토 만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들은 완전히 한니발 쪽으로 돌아섰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를 온전히 기지로 얻은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포기하는 기미가 없었으며 오히려 한니발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히스파니아를 공격하였다. BC 209년에 스키피오(Scipio)의 로마군이 히스파니아 최대의 항구인 노바 카르타고(현 카르타헤나)를 점령하고 한니발군의 자금줄이라 할 수 있는 은광을 장악하면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은 기가 크게 꺾인다.
이후 BC207년에 3만의 병력과 많은 공성무기들을 가지고 한니발과 합류하려던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이 메타우루스 강가(현 이탈리아 레 마르케)에서 마르쿠스 리비우스(Marcus Livius)와 클라우디우스 네로(Claudius Nero)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하면서 한니발이 증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영영 사라졌다. 한니발이 로마를 직접 공격을 못하였던 이유가 ①병력이 부족했고 ② 공성(攻城)무기가 없었기 때문임을 감안한다면 메타우루스 강에서의 패전은 매우 뼈아픈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전쟁사가들이 2차 포에니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로 메타우로스강 전투를 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