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고촐리가 그린 그림 [아베로에스에 대한 아퀴나스의 승리]는 스콜라 철학의 왕으로 칭송되는 아퀴나스와 그의 발 밑에 납작 꿇어 엎드린 루슈드를 대조시키고 있다. 과연 루슈드와 아퀴나스는 그런 사이인가? 그들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각각 대표해서 서로 싸운 사이인가? 아니다. 이건 집단 광기가 빚어낸 창작이다. 루슈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박해를 받은 일종의 반체제 인사이며, 아퀴나스는 그 당시 수상쩍게 생각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철학자를 소개한 주석자 루슈드를 적극 받아들여 방대한 신학체계로 녹여낸 인물이다.
유럽 출신인 과학사가 조지 사튼은 유럽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이슬람 학자들을 만나 역사의 조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이 역사의 제 자리를 찾는 첫 걸음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분명하게 밝혀 두자면, 나는 여기에서 이슬람 철학이 기독교 철학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소통이 막힐 때 벌어지는 대결구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루슈드는 소통의 길을 연 철학자지만, 닫힌 소통 구조에서 큰 피해를 본 철학자였다. 나는 루슈드를 통해 소통 공간이 막힐 때 나타나는 집단 광기를 읽는다. 루슈드가 아닌 아베로에스는 기독교 유럽을 위협하는 인물의 이름이었고, 아베로에스가 아닌 루슈드는 이슬람을 흔드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결코 환영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의 철학은 이슬람 세계가 아닌 기독교 세계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과연 그는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할까? 이슬람의 이븐 루슈드일까, 아니면 유럽의 아베로에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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