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 [대동여지도]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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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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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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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환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편리하다. 그 착상이 선인들에 비하여 분명히 우수하고, 그 정밀함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 그의 지도와 지지는 꼭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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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어느 두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뜰에 서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저 산줄기가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 가서 그쳤는지, 그림 그린 것이라도 있었으면, 앉아서 알 도리도 있으련만, 우리들 배우는 책에는 도무지 그런 것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이 소년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정호다. … 그 후 몇 해가 지나서 친한 친구에게 읍지도 한 장을 얻었는데, 펴본즉 산도 있고 시내도 있고 마을의 모양이 손금 보듯 자세했다. 김정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지도를 가지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일일이 맞추어보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지도는 실제 지형과 아주 딴판이었다. 너무나도 실망한 그는 그 후 서울에 정확한 지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경하여 궁중 규장각에 있는 조선팔도지도 한 벌을 얻었다. 그러나 그 지도 역시 실지로 조사한 결과 그 부정확함은 역시 전의 읍지도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 김정호는 그동안 팔도를 세 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올랐다. … 그는 하나둘씩 나무판을 사 모으고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를 새겼다. … 얼마 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어느 대장에게 건네주었다. 그 대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것을 대원군에게 바쳤다. 외국을 배척하던 대원군은 지도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대원군은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부녀는 그 뒤 옥중에서 고난을 겪다가 죽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1934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근래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거의 그대로 실리며 김정호에 대한 상식으로 굳어져 왔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들은 이 사실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일제가 흥선대원군을 매도하고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대목을 날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팔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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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김정호가 기존의 지도들에 크게 실망하고 직접 지도를 만들기 위해 팔도를 세 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올랐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이 내용은 당시까지 존재하던 조선의 지리학을 완전히 부정하고 김정호 개인이 온갖 노력 끝에 혼자만의 힘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조선어독본]보다 먼저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최남선이었다. 최남선은 1925년 [동아일보]에 김정호를 소개하며, 김정호가 백두산에 일곱 번 올랐으며 옥에 갇혀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28년 잡지 [별건곤]에 다시 [대동여지도]를 소개할 때에는 백두산을 세 번인지 네 번인지 올라갔었다고 하더라며 발언의 수위를 조절했다. 당시에도 백두산을 일곱 번 올랐다는 사실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어독본]은 그 수를 늘려 기록하고 있다.
사실 팔도를 세 번이나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김정호의 신분에 대해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족보가 전하지 않는 점, 그리고 전기가 전하지 않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이향견문록]에 실려 있던 점 등으로 미루어보면 중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중인 신분으로 백두산을 여러 번 등정한다는 것은 당시의 교통상황, 그의 신분과 재력 등을 감안할 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수한 조선 지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완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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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의존했던 방법은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두루 모아 집대성하는 것이었다. 김정호의 벗이며 지원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철학자 최한기는 [청구도] 머리말에서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에 연구 토론하여”라는 글을 통해 김정호의 작업 방법에 대한 힌트를 남겼다. 그 외의 기록들에서도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고, 여러 지도를 대조하고 지리지들을 참고했다는 내용뿐이다.
[조선어독본]에서는 김정호 이전의 지도들은 그 내용이 부정확하고 형편없었다고 하나 사실 조선은 지도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최남선도 [별건곤]에서 조선을 유사 이래 지도학이 특별히 발달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나라에 고구려 지도를 보낸 일이 있고, 고려 성종이 고려 지도를 요나라에 보낸 일들이 전한다. 최남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도학은 더욱 발전했다. 세종 대의 천문기술이 조선의 지도학 발달에 도움을 주었으며, 세조 때에는 규형, 인지의 등의 기구를 발명하여 지형을 측량했다. 또한, 1931년 정인보가 [대동여지도]에 대한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이때 정인보는 조선 지도학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나흥유, 양성지, 윤영, 정상기, 홍대용, 신경준 등의 인물을 거론하며, 그 발달선 상에 [대동여지도]를 두었다. 김정호는 이들의 성과를 집대성해 우수한 완성품을 만들어낸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았던 김정호가 지리학의 고급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최한기와 신헌 등 그의 지도 제작에 도움을 준 후원자의 덕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최한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정호의 벗을 자처했던 인물로, 지도와 지리에 관심이 많아 [지구전요]라는 세계 지리책을 쓰고 김정호와 함께 [지구전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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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목판본(1861년). 보물 제 850호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전체 지도 중 1책의 순서가 편집되었음)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또한,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당시 훈련대장 등을 역임했던 신헌은 자신의 문집에서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古家)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작업을 김백원(김정호의 자)에게 위촉하여 완성했다.”는 글을 남겼다. 지도에 관심이 많고 많은 자료를 갖고 있었던 신헌이 김정호의 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듯하다.
한편, 김정호 자신이 이러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교서관(조선시대 책의 인쇄와 교정 등을 맡아보던 관청) 소속의 목각기술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청구도]를 완성하던 해 김정호가 최한기의 부탁으로 [지구전후도]를 나무판에 새겼다는 기록과, “원래부터 공교(工巧)한 재주가 있었다.”는 [이향견문록]의 기록은 김정호의 목각 기술이 뛰어났음을 짐작게 한다. 또한, 김정호가 자리 잡았던 약현이라는 곳은 당시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과 역시 훈련도감에 소속된 활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어려서부터 지도에 관심이 많고 손재주가 좋았던 김정호가 이곳에 살며 목각 기술을 배워 교서관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가 제작한 지도와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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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든 김정호는 지도와 지리학 자료를 풍부하게 참고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와 같은 지도들, 그리고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같은 지리서를 탄생시켰다.
[청구도]는 조선 팔도를 세로 22개, 가로 29개의 눈금으로 나눈 다음 지형을 정확하게 그려 넣은 것으로 정확도가 매우 높다. 또한, 상세한 지지를 덧붙여 자연지리, 역사지리, 경제지리를 총괄하는 성격을 띠었다.
30여 년 공을 들여 완성했다는 [대동여지도]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으로 만들었는데, 이 첩을 접으면 하나의 책이 되고 전부 펼쳐놓으면 약 가로 3.8미터, 세로 6.7미터 크기의 한반도 지도가 된다. 서로 맞붙여놓은 이 지도들은 도로와 산과 들과 강이 연결되고 각 지역의 위치가 드러난다. 또한, 동해안의 포항 일대 지형과 제주도에서 육지까지의 거리 등 몇몇 군데를 제외하면 오늘날의 지도와 거의 일치할 만큼 정확하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대동지지]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지도가 완전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상세한 지지(地誌, 어떤 지역의 지리적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그 특색을 적은 책)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완성한 32권의 [대동지지]는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지지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풍부하게 기술해 지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대원군이 [대동여지도]를 압수하고 김정호를 옥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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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삶에서 가장 많이 왜곡된 부분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어독본]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대원군에게 바치자 대원군이 지도판을 압수해 불태워버리고 김정호 부녀를 옥사시켰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대원군을 매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날조라고 비판받고 있다. 우선 불태워졌다는 [대동여지도]가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에 새긴 지도로, 총 60여 매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12매가 불에 탄 흔적 없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또한 [고종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기록 어디에도 그런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불과 15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김정호에 대해서는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