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정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으며, 이듬해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2차 원정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나 같은 해에 스파르타도 구원병을 보내자 전세는 완전히 아테네에게 불리해졌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군은 에피폴라이 등에서 대패하고 퇴각을 시도했으나 그나마 실패하고는 처참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7천에 달하는 포로는 채석장 노예로 팔려갔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앞길에 암운을 드리웠다. 인적, 물적, 심리적 피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아테네에게 계속 충격이 닥쳤다. 기원전 412년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으며, 에게해의 델로스 동맹국들이 대거 반 아테네로 돌아섰다. 이 모두가 알키비아데스가 꾀를 써서 조국을 팔아먹은 결과라고들 했다. 델로스 동맹 기금이 끊기고 은광까지 적에게 빼앗긴 아테네에 비해, 본래 자금력이 아테네만 못했던 스파르타는 새로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게 되어 훨씬 여유가 생겼다. 더 나아가 스파르타는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모험’을 시도했는데, 바로 해군 건설이었다. 아테네는 신생 스파르타 해군과 맞서 키노세마(BC 411), 키지쿠스(BC 410)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해군은 아무나 하나”는 교훈을 주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명장 리산드로스(Lysandros)가 해군을 이끌며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를 물리치기 시작했고, 당황한 아테네는 한때 알키비아데스를 복귀시키면서까지 대응했으나 대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기원전 406년, 소아시아 연안의 아르기누사이에서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 해군을 크게 격파하여 오랜만에 국위를 떨쳤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승리한 장군들을 처형했는데, 바다에 떨어진 아군 생존자들의 구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듬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은 아테네의 참패로 끝났다. 아테네의 삼단노선 180척 중 170척이 격침 또는 나포되었고, 수천의 포로들은 전원 학살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