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객관성은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의 폐지이며,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고 오로지 소유한 사람만이 아는 재산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네 살짜리 주인공은 위그든 씨가 운영하는 사탕가게에서 버찌씨를 돈으로 지불하고 사탕을 산다. 물론 이 사탕은 위그든 씨의 이해에서 비롯된, 동심에 주어진 선물이며, 여기서 버찌씨는 오로지 이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세계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돈, 그 무엇과도 등가적이지 않은 양도할 수 없는 돈, 소통되지 않는 돈이다. 어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인 버찌씨를 폐지하고, 타인들 사이에 약속된 추상물인 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돈의 객관성은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는 말의 의미다.
루소는 이러한 돈의 성격에 대해 [에밀](1762)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들 사이의 계약에 입각한 평등은 돈을 발명하게 했다. 왜냐하면 돈이란 여러 가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비교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돈을 기준으로 삼아 가치의 ‘양’을 가질 수 있게끔 되었다는 것, 즉 객관적 기준에 따라 양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의 탄생이다. 개개인에게 아주 사사롭게 양도불능의 가치를 지니던 사물들은 화폐의 익명성 속에서 거래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또는 어린 시절의 버찌씨를 잃어버리듯 나만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가치로부터 쫓겨나 돈이라는 추상적인 약속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소통의 맥락을 놓친 자는 당연히 돈이라는 약속도 모르는데, 바로 이상의 소설 [날개](1936)의 주인공이 그렇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 사회를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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