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무엇인가? - 돈의 존재론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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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무엇인가? - 돈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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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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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한숨부터 쉰다. 돈 때문에 울고 미워하고 살해하고 자살한다. 돈 때문에 높이 추앙받으며 돈 때문에 비굴해진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말한다. “돈은 아버지가 나를 지배하는 힘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솔 벨로의 대표작 [오늘을 잡아라](1956)에 나오는 구절이다. 돈은 없지만 자기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난 이 아들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아버지가 가난하다면, 나는 그를 돌보면서 내 방식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배하는 이 아버지를 사회 전체로 확장시키면, 아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돈을 통해 지배하는 사회에게 한 젊은이는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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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돈의 질서는 무서운 아버지 같다. 돈은 위대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한껏 초라해진다. 소설가 이상은 돈의 위력이 미적(美的) 아우라 까지 띠는 모습을 소설 [지주회시](1936)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오십 전짜리가 딸랑 하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질 때 듣는 그 음향은 이 세상 아무것에도 비길 수 없는 가장 숭엄한 감각에 틀림없었다.” 이상은 ‘숭고미(崇高美)’와 돈을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숭고한 대상이 될 정도로 위압적인 이 돈의 비밀을 어찌 다 알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글은 돈에 대해 인류가 수행해 온 명상 모두를 담을 수는 없다. 투자의 노하우를 귀띔하지도 않고, 세계 경제를 예측하지도 않으며, 급히 돈 쓰실 분을 위해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알선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돈 놓고 돈 먹기를 가르치지도 않고 사람 위에 돈 없다며 울분을 토로하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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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이를 존재의 일반 경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럼 뭘 하는가? 그저 모든 철학이 그래왔듯 ‘존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존재는 유지되지 않으면 ‘무(無)’가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자는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을 하고 대가로, 먹을 것을 구입할 수 있는 봉급을 받는다. 그러니까 ‘존재함’이란 불가결하게 봉급에, 바로 돈에 의존한다. 그래서 존재론은 돈에 대한 성찰을 빠뜨릴 수 없으며, 같은 이유에서 어떤 철학자들은 존재론이란 말 대신 ‘존재의 일반 경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경제’라는 말의 어원 역시 이러한 점에 대해 잘 알려준다. 존재함이란 노동과 봉급을 통해 영위될 수 있는 거주함이며, 거주(oikos)를 관리하는 일이 바로 경제(oikonomia)인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존재론이란, 존재함을 꾸려나가는 일에 대한 학문, 즉 노동과 봉급과 거주에 관한 학문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경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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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객관성은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의 폐지이며,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고 오로지 소유한 사람만이 아는 재산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네 살짜리 주인공은 위그든 씨가 운영하는 사탕가게에서 버찌씨를 돈으로 지불하고 사탕을 산다. 물론 이 사탕은 위그든 씨의 이해에서 비롯된, 동심에 주어진 선물이며, 여기서 버찌씨는 오로지 이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세계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돈, 그 무엇과도 등가적이지 않은 양도할 수 없는 돈, 소통되지 않는 돈이다. 어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인 버찌씨를 폐지하고, 타인들 사이에 약속된 추상물인 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돈의 객관성은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는 말의 의미다.
 
 

루소는 이러한 돈의 성격에 대해 [에밀](1762)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들 사이의 계약에 입각한 평등은 돈을 발명하게 했다. 왜냐하면 돈이란 여러 가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비교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돈을 기준으로 삼아 가치의 ‘양’을 가질 수 있게끔 되었다는 것, 즉 객관적 기준에 따라 양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의 탄생이다. 개개인에게 아주 사사롭게 양도불능의 가치를 지니던 사물들은 화폐의 익명성 속에서 거래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또는 어린 시절의 버찌씨를 잃어버리듯 나만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가치로부터 쫓겨나 돈이라는 추상적인 약속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소통의 맥락을 놓친 자는 당연히 돈이라는 약속도 모르는데, 바로 이상의 소설 [날개](1936)의 주인공이 그렇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 사회를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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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타인들과 약속된 추상물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어른의 세계'이다.

그래서 돈은 객관적으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이가 믿고 따르는, 보편적인 종교처럼 되어 버린다. 돈에 대한 만인의 신뢰 덕에 사람들은 일회적인 접촉을 넘어서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요컨대 돈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믿음의 형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돈의 세계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한 최적의 요람인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하지가 않다.” 경제적 질서에 따라 약속받은 대로 노동을 하고 봉급을 타는 이 세계 안에서의 삶은 천편일률적인 것이다. 노동을 하고 돈을 받아 자기를 먹이는 일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 다음엔? 역시 노동을 하고 돈을 받아 자기를 먹인다. 그 다음엔?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 다음도 계속 똑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 돈이 자기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쓰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사업에 투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미래를 열어나가는 일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은 죽을 때 모든 돈이 나의 존재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관심을 쏟기보다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열렬히 관심을 가진다. 가령 죽어가는 이는 돈을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음에도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에 빠지는 노역을 감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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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우리는 내가 못 누리는 미래, 타자의 존재가 누릴 미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죽어간다. 그런데 타자를 위해 쓰는 이런 돈은 아무런 곤란도 겪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돈의 가장 중요한 국면 가운데 하나와 마주치게 된 것 같다. 아주 크게 요약해서 돈은 두 가지 방향으로 쓰인다. 앞서 살펴본 자기 존재를 부양하는 일과 타자의 존재를 부양하는 일. 타자의 존재를 부양한다는 돈의 이 두 번째 의미는 경제란 말의 동양적 어원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이란 표현의 뒷부분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인민을 구제한다”는 뜻 말이다. 이것은 머나먼 옛적부터 돈의 참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웃을 위한 돈, 자녀를 위해 쓰는 돈, 교회에 내는 헌금, 각종 기부금뿐 아니라, 백 년 뒤 지구인의 삶을 위해 사용하는 돈도 타자의 존재를 부양하기 위한 돈이다. 당연하게도 백년 뒤에 혜택을 입을 존재는 내가 아니라 타자이니까 말이다. 타자를 위해 쓰는 돈은 이렇게 우리 삶의 중요한 국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타자에게 돈을 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 윤동주는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에서, 가난한 이에게 돈을 주는 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이 인색했던 적이 없는 시인은 왜 가난한 타인에게 무턱대고 돈을 내주기 어려웠을까? 아마도 돈을 내주는 일이 상거래와 같은 교환으로 급히 변질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에는 일종의 ‘부자의 철학’이라고 할 만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는 오늘 날로 치면 재벌의 사회 환원 같은 부자의 자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자의 정신은 부의 나눔을 통하여 본연의 자기를 깨우치게 되고 자기희생이라는 사명을 다하게 되면서, 자기 혼자 향유를 누린다는 입장이 파기되어, 부는 널리 인정받는 공동의 부로 변하는 것이다.” 부자의 정신이 지닌 핵심은 부를 사회 전체의 공동의 부로 만들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다음과 같다. “부자가 교만한 생각을 안고 한 끼니의 식사를 베풀 때마다 이를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자아 그 자체를 휘어잡고 그의 마음속까지도 임의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나머지 부자는 상대방의 내면에 일고 있는 분노를 간과하고 만다.” 그리하여 수혜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엔 축복과 감사보다 적대적 대립이 생긴다. 결국 “부자의 정신은 세상의 표면을 훑고 다니는 망상과 같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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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상거래상의 상품으로 변질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경계해야한다.
왜 타자를 위해 쓰는 돈에서 오히려 타자의 증오를 만들어 내는 비극이 생겨나는 것일까? 답은 매우 간단하다. 철학자 데리다에 따르면, 타자를 위한 돈은 일종의 ‘선물’인데, 선물은 그것이 선물이라는 사실이 주는 자나 받는 자에게 알려지는 즉시 선물의 지위를 잃고 상거래상의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즉 타자에게 선물로 돈을 준 행위가 나에게 자기만족이 되면, 그것은 돈을 주고 만족을 구입한 거래 행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기만족을 헤겔은 앞서 자기 시대의 용어로 부자의 교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렇기에 타자의 존재를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어렵고 세심한 손길을 요구한다. 그것이 심리적이건 물리적이건 나에게 보상으로 되돌아온다면, 나는 결국 나를 위해 돈을 쓴 것이고, 나의 존재에 필요한 ‘계산’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의 관심은 계산할 수 있는 확실한 오늘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패를 무릅쓴 채 수시로 우리 자신의 존재함을 너머 모험을 감행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