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황혼 펠로폰네소스 전쟁 -1-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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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황혼 펠로폰네소스 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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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 전사자 추도연설에서 “우리 아테네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주장하는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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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요

전쟁주체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쟁시기
기원전 431~기원전 403
전쟁터
그리스, 에게해 일대, 소아시아, 시칠리아
주요전투
델리움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만티네아 전투, 시라쿠사 전투,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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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그리스, 사상 최악의 전쟁에 뛰어들다
“페르시아 전쟁은 얼마 전까지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래도 두 차례의 해전과 두 차례의 육상전으로 승부가 정해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기간도 무척 길 뿐 아니라,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헬라스 전체에 가져왔다. 일찍이 그 어떤 야만족의 침입도, 또는 헬라스인끼리의 다툼도, 폴리스들을 이토록 황폐하게 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다분히 아테네 쪽 시각이 반영된 이름이다. ‘펠로폰네소스인들과의 전쟁’이라는 말인데, 스파르타 쪽 시각에서는 ”아테네 전쟁“ 또는 ”델로스 전쟁“이라 불렀을 것이다)”에 참전하여 병력을 지휘했고, 전쟁이 시작될 무렵부터 그 심각성을 알아보고는 아군 뿐 아니라 적군의 자료까지도 두루 수집하고 냉정히 분석해서 길이 남을 전쟁의 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던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두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후 아테네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승자인 스파르타의 피해도 그에 못지않았다. 메가라, 코린토스, 아르고스, 만티네아 등도 국력의 20내지 50퍼센트가 감소한데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멜로스, 스키오네, 토로네, 플라타이아이 등의 폴리스들은 아예 멸망했다. 전쟁 직전까지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고는 발칸 반도와 흑해, 동지중해 일대를 장악했으며, 고전 그리스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던 그리스는 이 자멸적 전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된다. 1차 대전에서도 승승장구하던 유럽 제국들이 동맹의 역학관계에 얽힌 나머지 대전을 벌여 자멸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1차 대전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우선 폴리스들의 성격상 분쟁은 그칠 날이 없었으며, ‘전쟁’ 이전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이어져왔다(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어디로 잡느냐 하는 부분도 논란이 있다). 동맹이라는 것도 근대의 것처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아서,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동맹국의 적대세력과 손을 잡거나, 중립을 공언한 전장에 병력을 보내거나 하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본래 폴리스라는 것이 여러 종족이 뒤섞이며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폴리스의 식민도시로 출발한 곳도 많았기에 한 번은 지배 종족간의 유대관계 때문에 한편이 되었다가, 다음에는 식민도시와의 인연 때문에 적이 되었다가 하는 등 복잡하고 불규칙한 국제관계가 일상이었다. 기원전 5세기쯤부터는 여기에 민주주의 정부냐, 과두제 정부냐 하는 점을 두고도 편이 갈렸다. 그래서 가령 전쟁 직전 아테네가 포티다이아에 출병했을 때, 코린토스는 “우리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인 포티다이아에 왜 간섭하느냐”고 항의했고, 아테네는 “포티다이아는 우리의 동맹국인데 코린토스가 압박하고 있으니 개입이 당연하다”고 맞받으며 서로가 정의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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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 제국.
말하자면 페르시아 전쟁 당시 놀랄 만한 단결(그나마 아르고스 같은 나라는 시종일관 스파르타와 맞서며 페르시아에 호응하는 등, 완전한 단결은 없었다)을 보여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본모습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전국시대와 같았다. 그런데 왜 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사상 최악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아테네의 세력이 전에 없이 떨치게 된 점, 그리고 역시 그 전쟁에서 그리스 최강의 육군국임을 과시한 스파르타에게 아테네에 대항하는 맹주로서의 기대가 모아지게 된 점이 원인이었다.
기원전 477년에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향후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수립된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맹 회원국들이 납부하는 기금은 아테네가 유사시에 사실상 사금고처럼 쓸 수 있었고, 아테네 자체의 해군력에다 동맹국들의 해군력을 “대행”해준다며 돈을 받고 구축한 해군력을 이용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멀리 이탈리아나 이집트, 크림반도까지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특히 해상로가 차단되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작은 섬나라들은 아테네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이런 무력과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고전문명을 꽃피우는 한편, 페르시아 전쟁 직전 기틀을 잡았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출”했다. 그리스 전역에서 상당수의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후원을 받고 과두제에서 민주제로 돌아섰다. 스파르타의 오랜 숙적, 아르고스까지.
이처럼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유례없는 패권국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해군력을 위주로 하며,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후원한다는 점은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헤일로타이라 불리는 노예들과 페리오이코이라는 예속민의 착취를 바탕으로 최정예 육군을 운영하던 스파르타는 특히 아테네 ‘민주해양제국’ 체제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테네를 견제할 나라는 스파르타뿐이다”라는 내외의 충동질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페르시아 전쟁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던 기원전 475년에 이미 아테네를 공격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내부에서 격론을 벌였으며, 465년의 타소스, 459년의 메가라 분쟁에서 은근히 아테네와 맞서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도 두 나라의 대결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년에 평화조약을 맺고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에 간섭하지 않으며,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도 두 나라 사이에 소규모의 무력충돌은 계속 빚어졌다. 평화조약은 다만 “확전을 자제하는 것”으로 지켜진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마치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처럼, 두 나라는 “언젠가는 저들과 정면승부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외교와 국방정책을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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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상상도.
분쟁의 에스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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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테네의 패권에 대한 스파르타의 위협 인식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투키디데스의 분석은 대체로 옳다고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비교적 사소한, 제3자들끼리의 분쟁이었다. 기원전 436년, 아드리아해에 떠 있던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민주파가 과두파를 내쫓고 정권을 잡았는데, 과두파들이 이민족과 함께 돌아와서 에피담노스를 공략했던 것이다. 다급해진 민주파는 모도시인 케르키라에 도움을 청했는데, 과두체제였던 케르키라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케르키라의 모도시인 코린토스로 찾아갔다. 코린토스는 본래 식민도시였으나 이제는 라이벌이 되어 있던 케르키라를 견제할 목적에서 원조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케르키라가 반발하면서 에피담노스 내전은 어느새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바뀐다. 서전에서 케르키라에게 일격을 당한 코린토스는 분개하여 해군력 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러자 두려워진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한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주요 일원인 코린토스를 적대시하는 일이 꺼려졌지만, “해군국끼리 힘을 합쳐야 하며, 케르키라는 지정학적으로 펠로폰네소스를 견제하기에 좋은 위치”라는 설득에 “평화조약을 깨트리지 않는 한에서 원조”하기로 결정한다. 케르키라에 원군을 파견하되, 코린토스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으며 케르키라 상륙만 방해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코린토스의 반발을 가져왔고, 아테네는 코린토스를 압박하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면서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이자 아테네의 동맹국이었던 포티다이아에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포티다이아는 이를 거부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끊는 한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한다. 코린토스를 후원한 앙갚음으로 아테네의 해상봉쇄를 당하고 있던 메가라도 스파르타를 애타게 찾았다.
이렇게 해서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의 내전이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확대되고, 다시 아테네-코린토스 분쟁으로, 그리고 아테네-스파르타 대결로 확대되고 말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신중론자이자 아테네의 실질적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와 친했던 아르키다모스 왕(Archidamus II)이 전쟁에 부정적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 동맹 맹주국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더 이상 아테네의 횡포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누르지 못해 결국 평화조약이 깨지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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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페리클레스도 전쟁은 되도록 피해보려는 입장이었으나, 일단 전쟁을 한다면 아테네는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까닭은 첫째, 아테네에게는 사상 최강의 해군력이 있다. 둘째, 델로스 동맹 기금에 암피폴리스의 은광이 있는데다,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힘이 있는 아테네에 비해 적의 자금력은 얼마 못 버틸 것이다. 셋째, 스파르타와의 주변 섬나라들은 아테네의 해상봉쇄와 민주화 선동의 결과 아테네 쪽으로 돌아설 것이며, 그러면 스파르타를 포위하여 압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튼 최강의 육군력을 가진 스파르타와 육지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는 일은 피해야 하며, 아티카의 농민들을 모두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잇는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농성하면서 해군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대체로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들어맞지 않게 된다. 먼저 아테네가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점은 틀림없었지만, 그 해군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오늘날이라면 전함과 항공모함만으로 적국을 초토화할 수도 있고,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화력이라고는 활이나 돌팔매가 고작이었던 당시의 배는 주로 충돌하거나 수상 백병전을 펼치거나 하며 적의 배를 공격하는 일만 할 수 있었으며, 병력 수송력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해군력은 적의 해상로를 차단하여 경제적 고통을 줄 수는 있었으나, 적의 도시를 직접 공격하고 적군을 소탕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리고 해군은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1백 척의 삼단노선을 한 달 동안 운용하는 비용은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는 비용의 네 배에 맞먹었다고 한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지만, 풍력을 별로 이용하지 못하고 다수의 노잡이들의 어깨 힘에 의존하던 당시의 배는 그 노잡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급료 때문에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육전에서는 패배해도 대체로 투입된 병력의 10퍼센트 정도만 희생되었던 데 비해, 해전에서는 70, 80퍼센트를 웃도는 희생이 나왔다. 배 한 척이 침몰하면 배에 타고 있던 인원은 거의 몰살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스파르타에 결정타를 가할 수 없는 이상 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아테네의 자금력이 풍부했어도 장기 전쟁에는 대책이 없었다. 게다가 인력 손실도 심각해져서 전쟁 말기에는 출신 성분별로 엄격히 구분되던 병종이 마구 뒤섞여, 귀족 출신이 노잡이를 하는가 하면 노예가 전투병으로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기대했던 대로 스파르타 주변의 나라들이 손쉽게 민주화되면서 반 스파르타로 돌아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재난도 찾아왔다. 기원전 430년과 426년에 아테네를 덮친 역병이었다. 종래 페스트로 알려진 이 역병은 최근의 연구에서는 장티푸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무튼 페리클레스의 주장에 따라 아테네 성벽 안에 주민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컸다. 기원전 429년에는 페리클레스 자신조차 역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역병은 아테네 인구의 삼분의 일을 쓸어갔으며, 그렇게 전쟁이 격렬하지 않았던 초기 10년 동안에는 역병에 따른 인명피해가 아테네가 입은 인명피해의 대부분이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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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중장보병의 복원도.
아르키다모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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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31년 3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테베가 델로스 동맹의 플라타이아이를 공격하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국면은 기원전 421년까지 이어졌으며, 스파르타 왕의 이름을 따서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 부른다. 이 때에 스파르타는 계속해서 아티카를 침입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 스파르타 편을 드는 도시들, 가령 메가라, 포티다이아, 미틸레네 등을 해군력을 앞세워 공략해 나갔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영토인 아티카를 손쉽게 점령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고, 아테네인들의 과수원과 농장을 망친 다음 3주 정도만에 철수하고는 했다. 본국의 농경지를 버려둘 수 없는 데다, 군대가 오래 외지에 머물러 있으면 본국에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병이 아니었다면 아테네인들은 성벽 안에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전통 군대가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점도 스파르타가 성벽 안의 아테네인을 건드리지 못했던 까닭 중의 하나인데, 기원전 429년에는 아테네 아닌 플라타이아이를 상대로 처절한 공성전을 펼치게 된다. 아르키다모스는 성 주위를 봉쇄해 농성군을 굶주리게 하고, 흙으로 망루를 쌓아올려 성벽 안으로 불화살을 쏘고, 땅굴을 뚫고, 플라타이아이의 내분을 획책하는 등 별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의 원군 없이 자력으로 2년을 견뎌냈다. 비슷한 시기에 아테네는 에게 해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미틸레네는 본래 델로스 동맹 소속이었으나 반기를 들었으며, 충격을 받은 아테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미틸레네를 꺾어 버리려 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 미틸레네와 플라타이아이는 한 달을 사이에 두고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게 항복했다. 그 처리를 두고 아테네는 “미틸레네의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가 하루 만에 너무 가혹하다며 취소하였으며(취소 결정은 간발의 차이로 미틸레네에 도착했다. 살육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주도자만을 심판하겠다는 약속을 깨고는 플라타이아이의 성인 남성들을 도륙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런 차이는 민주국가와 군사국가의 성격 차이에서 나온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잔인한 보복과 포로 학살은 점점 더 일반적이 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가리지 않게 되어갔다.
미틸레네에 잔인한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람 중에는 “선동정치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될 클레온(Kleon)도 있었다. 그는 늘 호전적인 주장으로 아테네인들의 주의를 환기했는데, 페리클레스 집권기에도 “겁쟁이처럼 성벽 안에 틀어박힌 채 적들이 우리 땅을 멋대로 유린하는 꼴을 지켜보게만 만드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 한때 탄핵에 이르게도 했다. 그런 그가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마침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육상에서도 격돌하게 되었다. 역병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테네의 인구는 스파르타를 훨씬 웃돌았으나, 스파르타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예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에는 스파르타 지휘관 브라시다스(Brasidas)의 부상과 헤일로타이의 반란 조짐을 잘 이용하여 스파크테리아에서 스파르타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클레온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는 424년에 아티카 북부의 델리움에서 아테네군에게 앙갚음했다. 과두파가 집권하던 보이오티아를 민주화하고, 아티카를 적의 손에서 빼앗으려던 아테네는 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델리움으로 진군했다. 이 때 비로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보병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대끼리의 대결은 비교적 약한 전력을 진형의 좌측에, 강한 전력을 우측에 배치하고는 서로 상대의 좌군을 먼저 깨트리고 중군, 우군을 격파하려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두 마리의 뱀이 서로를 휘감으며 머리를 물려고 하는 식으로 벌어졌다. 아테네의 우군은 먼저 펠로폰네소스의 좌군을 깨트렸으나, 병력 운용을 잘 못한 탓에 엉뚱하게 자신들의 중군을 공격해 버렸다. 사태가 수습된 다음에는 별안간 나타난 소수의 보이오티아 기병대를 대규모 원군으로 착각하고는 도주했다(소크라테스도 그 속에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 사이에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아테네의 남은 군대를 여유 있게 쓸어버렸다. 육지에서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증명한 전투였다.
이어서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아테네의 주요 자금원인 은광으로 접어드는 요충지, 암피폴리스를 공략했다. 암피폴리스는 스파르타의 손에 들어갔고(이 때 구원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투키디데스가 추방된다), 클레온은 전력을 기울여 기원전 422년에 암피폴리스 탈환전을 펼쳤으나, 적진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후퇴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브라시다스도 전사함으로써, 양 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422년 겨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졌고, 아테네 측 대표의 이름을 딴 “니키아스의 평화”가 약 7년 동안 이어진다.
참고문헌: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범우사, 2011);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2006); 빅터 핸슨,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인비엘, 2009); 장준호,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재구성: 외교논쟁과 그 현대적 함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8집 제2호. 2007); 정재욱,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내재된 투키디데스의 모순과 그 함의”, (동아시아연구. 제4호. 2002); 양준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론에 대한 재해석: 티모스적 시각과 (신)현실주의”, (국제정치논총. 제38집. 3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