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행위의 목적 - 아리스토텔레스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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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위의 목적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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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3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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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저작은 실로 방대하다. 그는 학문을 이론적 학문, 실천적 학문, 제작에 관한 학문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이론적 학문이란 지식 자체를 위해서 탐구되는 학문이고, 실천적 학문은 개인의 행위나 바람직한 사회 체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제작에 관한 학문은 실용적으로 무엇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의 학문에 모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저술 중에서 [형이상학], 자연학이라고 불리는 [피지카], 그리고 많은 생물학에 관한 저술들과 인간의 영혼에 관한 심리학에 대한 저술들이 이론적 학문에 속하는 그의 저술들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을 비롯한 도덕철학에 관한 저서와 [정치학]은 실천적 학문에 속하는 저술들이다. 그의 저술 중 [시학]과 [수사학]은 흔히 제작에 관한 학문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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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가 분류한 세 가지 학문 어디에도 논리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논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그가 논리학을 학문으로 보지 않은 것일까? 그가 남긴 논리학 저술은 그가 죽은 후에 [오르가논]이라는 이름으로 집대성되었는데, ‘오르가논’이란 ‘기관’, ‘도구’라는 뜻이다. 그 책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가 논리학을 모든 학문을 위한 도구, 즉 예비학으로 보았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그는 논리학을 올바른 추론의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학은 학문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학적 지식만으로 학문을 할 수는 없지만, 논리학의 지식 없이는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논리학은 흔히 형식과학(formal science)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 말을 논리학이 외부 세계와 완전히 구별되는, 오직 인간 사유의 형식과만 관련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증명의 형식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형식과학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논리학이 과학적 증명의 결론을 통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학은 그 자체로 사유형식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사유는 현실에 대한 사유이고 그 사유의 결과는 현실에 대한 지식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논리학을 과학적 탐구에서 필요한 증명 형식에 대해서 분석하는 학문으로, 모든 학문의 도구로, 세 가지 종류의 학문과는 위상이 다른,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논리적인 추론을 훌륭하게 수행한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고, 분명히 그들도 올바른 추론의 기준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이야말로 올바른 추론에 관한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킨 최초의 저술임에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리학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새로운 논리학이 등장하기까지는 200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 동안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전부였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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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올바른 추론의 원리를 다루고 있으며 모든 학문의 토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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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의 필수적인 토대로 논리학이라고 본 이외에, 그에게 학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토대가 있다. 목적론이 그것이다. 앞에서 이미 목적론에 대해서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그의 학문에 담긴 ‘목적론적 사유’를 추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그의 방대한 저술 중 20%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생물학에 대한 탐구이다. 그의 생물학적 탐구의 중요한 내용은 분류인데, 그가 그렇게 분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체의 존재 목적을 밝히고자 함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생물을 분류하면서 그 생물들의 기관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설명은 곧 기계론적 설명이고, 목적론적 설명은 과학적 설명에서 제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생물학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목적론적 설명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컷 새의 깃털이 화려한 것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의 진화 생물학적 설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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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가 본성상 있어야 할 자리로 가는 것이 자연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탐구에서도 목적론적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현실계에 존재하는 물체의 운동을 자연운동과 강제운동으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물체든 그 물체의 본성상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을 자연운동이다. 예를 들어서 돌멩이는 지구의 중심에 가까운 곳이 돌멩이의 본성상 있어야 할 자리이고, 공기는 본성상 지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그 자리이다. 그래서 돌멩이는 외부의 방해가 없는 한, 지구의 중심을 향해 운동하고, 공기는 지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운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대체 왜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돌멩이의 본성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셈인데, 이러한 대답은 사실 하나마나 한 것이다.
 
원래의 질문은, ‘돌멩이는 왜 아래로 떨어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계의 운동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설명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설명력이 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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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윤리학이나 정치철학과 같은 실천적 학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연은 목적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목적론적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장도 [정치학]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그의 실천철학 중에서 도덕철학에서 목적론적인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그의 대표적인 윤리학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모든 기술과 탐구,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된다.”는 말로 시작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이라는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목적으로 삼는 선이란 무엇일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한다고 하자. 그러면 지식은 무엇 때문에 얻고자 하는가? 이렇게 어떤 행위의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의 목적, 그 목적의 목적의 목적, 또 목적의 목적의 목적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적에 대한 탐구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의 목적, 즉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어떤 목적에도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체 때문에 추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이다. 요컨대 인간의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또 무엇일까? 행복은 그리스어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인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잘 존재함(well-being)’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잘 존재함’이라는 말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잘 존재하는 것, 행복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목적론을 끌어들인다. 그의 목적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는 존재의 목적을 갖는다. 예컨대 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를 자르는 것이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능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그 기능을 잘 발휘하여 존재 목적을 잘 수행해 내는 칼이 잘 존재하는 칼, 좋은 칼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잘 존재함’(행복)도 인간의 존재 목적을 발휘하기 위해서 주어진 기능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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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행복은 진리를 향해 사유하는 삶 속에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에게만 주어진 기능은 바로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잘 존재한다는 것은 이성적 사유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 원리를 따르는 정신의 활동이고, 인간의 행복은 그러한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서 그는 주어진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을 ‘덕(virtue)’이라고 한다. ‘덕’이란 단어의 그리스어는 ‘아레테(arete)’인데, 그 말은 ‘탁월함(excellenc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덕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성품이고, 인간의 행복이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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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복이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면, 그 때의 덕이란 최고의 덕이어야 할 것이다. 이 최고의 덕은 인간의 최고의 기능인 이성적 사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성품일 것이다. 어찌 먹고 배설함으로써 육체가 자라나는 것을 인간의 고유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기능은 식물이나 동물에게도 주어진 것 아닌가? 또 먹이를 쫓아다니고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2세를 낳는 행위를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기능은 동물에게도 주어진 기능이다.

인간에 주어진 기능 중에서 본질적인 것은 이성적인 사유 기능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서 진리를 파악하려는 기능을 잘 발휘하는 성품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이고, 그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야말로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절에서 행복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면서, 최고의 행복은 명상적인 삶(contemplative life)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성적 사유를 하지 않고, 진리를 향한 명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누구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암암리에 철학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철학자만이 진정한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철학적인 명상, 진리를 향한 이성적 사유 활동을 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 명상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그의 권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