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 백열전구 특허권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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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 - 백열전구 특허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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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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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27 미국 특허청에서 백열전구 특허권을 취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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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뉴저지 주 소재 먼로파크에 사는 나, 토머스 알바 에디슨은 전기 램프를 개선하고 그것을 생산하는 방법에서 발명을 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이 발명의 목적은 백열광을 내는 전기 램프 생산이며, 이 램프는 고저항의 특성을 지님으로써 전광(電光)을 실용적으로 분할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나 이전의 마지막 사람이 멈추고 남겨 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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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11월 4일 미국 특허청에 토머스 에디슨이 제출한 특허신청서의 첫 부분이다. 이 신청은 이듬해 1880년 1월 27일에 승인되어 에디슨은 백열전구에 관한 특허권을 취득했다. 특허번호는 223,898. 필라멘트 재료를 무수히 바꿔가며 4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1,200회 넘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괄목할 만한 결과를 얻은 것은 1879년 10월 말이었다. 에디슨은 또한 특허신청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탄화시키는 데 열중했다. 면사(棉絲), 아마사(亞麻絲), 나무 조각, 종이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꼬아보았지만 램프는 깜깜했으며, 흑연 그리고 탄소재료를 다양한 모양으로 타르와 섞어 다양한 길이와 직경의 선으로 꼬아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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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재생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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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두 달 여 만에 특허권을 취득한 것은 당시로서도 매우 빠른 것이었다. 특허청은 이미 에디슨의 실험실이 보내는 빨간색 끈으로 묶은 상자에 익숙해져 있었다.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된 미국 특허권 숫자는 1,093건, 다른 나라 특허권까지 합하면 1,500건이 넘는다. 그 수많은 발명 가운데 상당수는 다른 사람이 취득한 특허 아이템을 개선한 것들이다. “나는 나 이전의 마지막 사람이 멈추고 남겨 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에디슨이 고용한 연구원들이 발명한 것들도 많았지만, 에디슨은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권을 취득했다. “에디슨은 사실상 집합 명사로서, 많은 사람의 이름을 대표한다.” 에디슨의 조수 프랜시스 젤의 말이다.
에디슨이 취득한 첫 특허권은 전기투표기록기(1869년 6월 1일, 특허번호 90,646)에 관한 것이었다. 투표자가 찬반 두 개의 스위치 가운데 하나를 조작하고 투표 결과를 빠르게 집계해주는 장치였으나 정치인들은 관심이 없었고, 결국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정치인들이 빠른 집계를 원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으며, 에디슨은 이 경험을 통해 사업적으로 유망하지 못한 발명은 불필요하다는 신념을 굳혔다. “팔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발명하지 않는다. 팔린다는 건 유용하다는 증거고, 유용하다는 게 곧 성공이다.”
발명가의 가능성보다는 사업가의 가능성이 더 높았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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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이야기를 접하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내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지. 에디슨의 초년의 삶은 전 세계 많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전설이자 신화다. 발명왕을 꿈꾸는 어린이들의 희망이요 등불이 바로 그가 아니던가. 직접 달걀을 품어 부화를 시도해봤다는 지극한 호기심 이야기(거위 알이었다는 설도 있다.), 기차에서 신문을 팔면서도 그 안에 실험실을 꾸며 열중하다가 불을 내 쫓겨난 극진한 실험 정신 이야기, 선생님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학교 부적응 어린이로 석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학교 가기 싫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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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의 청년 에디슨

에디슨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만드셨다. 어머니께서는 진실하셨고 나를 믿어주셨다. 덕분에 나는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가졌고,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차에서 쫓겨나면서 차장에게 따귀를 맞아 부상당해 에디슨의 청력이 나빠졌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 에디슨 자신이 그런 주장을 했지만, 사실은 아주 어린 시절 성홍열을 앓았고 이후에도 감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나빠졌다는 게 정설. 에디슨은 만년에 기차 이야기를 고쳐 회고했다. 차장이 자신을 움직이는 기차로 끌어 올려줄 때 귀를 잡고 끌어 올려 부상당했다는 것. 적어도 따귀 맞은 게 부상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 셈이다.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서 발명가의 가능성보다는 사업가의 가능성을 찾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10대 초부터 에디슨은 집이 있는 포트휴런과 디트로이트를 오가는 기차에서 간식, 신문, 잡지는 물론 채소까지 팔았다. 특히 에디슨은 1862년 기차 안에서 직접 ‘그랜드트렁크헤럴드’라는 신문을 제작 판매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남북 전쟁으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뉴스에 목말라 있는 승객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던 것. 제너럴 일렉트릭을 포함한 여러 기업을 세운 기업가로서, 벤처기업의 원조로 평가 받게 된 자질을 어린 시절에 이미 보여준 셈.
1862년 달리는 기차에 치일 뻔 한 세 살 난 지미 매켄지를 구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역장인 지미의 아버지가 에디슨을 철도 전신수로 훈련 받고 일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유명한 일화다. 1866년 19살 때 켄터키의 루이스빌로 간 에디슨은 웨스턴유니언 직원으로 일하면서 야간 근무를 자청해 밤에도 직장에서 독서와 실험에 몰두했지만, 이듬해 어느 날 밤 배터리 실험을 하다가 황산을 바닥에 흘렸고, 흘린 황산이 직장 상사의 책상 아래로까지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에디슨은 해고당했다.
전례 없던 것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것을 개선하고 보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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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에디슨은 보스턴으로 옮겨 웨스턴유니언에서 일하다가 1869년 사직하고 전업 발명가의 길을 걷고자 결심했다. 그의 첫 특허권 취득 발명품인 전기투표기록기가 바로 이 해에 만들어졌다. 발명가로 나선 초기의 발명품들은 에디슨이 익숙해져 있던 전신(電信)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에디슨의 그 많은 발명품들을 다 열거하기는 힘들겠지만, 한 번 열거해보기로 하자.
개량형 금시세 표시기, 주식상장표시기, 인자(印字)전신기, 이중전신기, 탄소전화기, 축음기, 에디슨 축전기, 영화 촬영기, 영사기, 자기선광법,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알카라인 축전지, 믹서, 건조기, 전기 철로, 유리 제조기, 평판유리 제조법, 동력 트랜스미션, 정지장치, 철로신호시스템, 광석 분리 방법 및 기기, 전력배분시스템, 열자기 발생기, 전기철로용 트롤리, 확장가능 활차, 전기적 신호전달 방법, 전선 접합기, 전기자동차를 위한 프로펠링 기기 등등.
에디슨의 발명에 대해 하기 쉬운 오해는, 그의 발명 하나하나가 획기적이고 전례 없던 것이라는 오해다. 에디슨의 특허권 목록을 살펴보면, 하나의 중요한 발명 아이템을 놓고 그것을 좀 더 보완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장치들이 일종의 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백열광 전구라면 그것을 개선하고 용도를 확장시키기 위한 많은 특허 사항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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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자동차를 선보이고 있는 에디슨(1883년)
에디슨은 1879년 10월 22일, 백열광을 40시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 12월 31일에는 먼로파크에서 처음으로 백열전구를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특허권을 취득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에디슨이 탄화 대나무 필라멘트로 1200시간 이상 빛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은 특허권 취득 이후 6개월 이상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1883년 10월 8일 특허국은 에디슨의 특허가 윌리엄 소여의 발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고, 에디슨의 특허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소송은 1889년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1889년 10월 6일, 법원은 ‘고저항 탄소 필라멘트’를 주장하는 에디슨의 발명을 최종 인정했다.
발명에서 나아가 관련 산업까지 창출하는 기업가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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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만 놓고 볼 때 에디슨이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을 유일무이하게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영국 물리학자 조지프 스완도 비슷한 시기에 전구 개발에 성공했고, 에디슨이 스완의 특허권을 사들여 활용할 정도로 스완 전구는 뛰어났다. 에디슨은 전기로 빛을 내는 전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결코 아니며, 최초로 상업성과 실용성을 갖춘 백열광을 개발한 사람이다. 에디슨 이전 및 그와 비슷한 시기에 헨리 우드워드, 메튜 에반스, 모제스 파머, 조지프 스완, 윌리엄 소여, 험프리 데이비, 하인리히 괴벨 등 많은 사람들이 전구를 고안해냈다. 물론 그 대부분은 빛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생산비가 높아 상업성이 떨어져 대규모로 공급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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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기관차를 시범 운행 중인 에디슨(1895년)

에디슨의 발상에서 새로운 점은 ‘고도의 진공 상태에 있는 고저항 램프’라는 점이었다. 에디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기를 대량 생산하고 공급하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빛이 오래 지속되는 전구를 대량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는 기업가 정신>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유리 덮개, 진공, 봉합, 그리고 빨갛게 타는 견고한 물질, 즉 필라멘트에 대해 기술적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전력산업 전반에 걸쳐 시스템을 결정해 두었던 것이다. 그가 발명한 전구는 자신도 일부 자금을 조달한 바로 그 전력회사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자신의 전구를 사용할 고객에게 전력을 공급하도록 전선을 가설할 권리도 확보했으며, 배전 시스템도 완료해 두었다. 요컨대 과학자 스완은 제품을 발명하는 데 그쳤지만, 에디슨은 산업을 창출했던 것이다.’
드러커는 위와 같이 에디슨을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실제 에디슨의 기업 경영 성과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에디슨이 시작한 벤처기업은 모두 실패했는데, 그 원인은 오늘날 많은 벤처기업들이 실패하는 원인과 비슷했다. 에디슨은 자금을 모으고 기업을 세우고 수요도 창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기업 경영 자체에 있었다. 개발팀을 이끄는 연구 개발자로서는 탁월한 에디슨이었지만, 전문적인 경영관리에서는 뛰어나지 못했다. 별도의 경영관리팀을 두지 않으려 했던 에디슨이 물러나고 전문경영자가 들어선 다음에야 회사가 되살아났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뭔가를 포기했을 때가 사실은 성공의 문턱 바로 앞이었을 때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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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링컨 대통령,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토머스 에디슨. 미국인들이 널리 추앙해마지 않는 미국의 대표적 위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규 학교 교육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과 전형적으로 자수성가했다는 점이다. 미국이 자부해온 ‘무한한 기회의 땅’, ‘개척자 정신’ 등의 정체성과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들로 평가 받는 것이다. 에디슨은 미국인들에게, 아니 세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사업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미국은 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더욱 강해지고 더욱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더 나은 방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걸 찾으세요. 열심히 일하는 걸 대체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쉼 없는 노력과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보의 필수 조건입니다. 뭔가를 포기했을 때가 사실은 성공의 문턱 바로 앞이었을 때가 많습니다. 실패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용감해지세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전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