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생성의 딜레마 - 아리스토텔레스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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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생성의 딜레마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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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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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철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자부심 강한 아테네의 귀족 출신 플라톤, 그에 비해서 아테네인으로부터 촌놈 취급을 받은 마케도니아 스테이기라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 그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동시에 철학사에서 일종의 테제와 안티테제이기도 하다. 그들 이후의 서양 철학사는 그들의 긴장 관계에 대한 어느 한 쪽 편들기, 아니면 그들의 화해를 모색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에 대한 개요적 탐구는 그 철학자에 대한 왜곡을 수반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 연구가인 거스리(W. Guthrie)는 플라톤이야말로 개요적인 설명으로 가장 크게 상처를 받는 철학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 못지않게 개요적인 탐구로 인해 상처를 입는 철학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친 탐구를 한 방대한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매우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 철학자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개요적 탐구는 거대한 건축물의 한 모퉁이를 만지작거리는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요적인 설명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우리는,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몇 그루의 나무만을 골라서 간단히 그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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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운동은 환상일 뿐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과 만물은 변화하고 운동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 중 과연 어느 것이 옳을까?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두 사람의 통찰력을 모두 인정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하나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계이다. 그 곳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변화와 운동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한 현실계를 넘어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그곳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상들로 이루어진 이데아의 세계이다.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변화와 운동이 없는 세계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실계는 이데아계의 모형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아계가 본체요, 원본이라면, 현실계는 그것의 그림자요, 복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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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의 원본은 변함이 없는데, 복사본은 계속해서 변할수 있는가?
이렇게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가 있다는 주장 - 이를 이원론(dualism)이라고 한다 ― 을 통해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세계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세계를 구별함으로써, 존재와 생성의 딜레마에 답하려고 한다. 그런데 과연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세계는 존재하는가? 또 플라톤의 이원론은 존재와 운동의 문제에 적절한 답을 주고 있는가? 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아니다’이다. 그가 그렇게 답하는 첫 번째 이유는 현실계에 있는 사물의 본질이 이데아(형상)라면, 사물 자체와 그 사물의 본질이 어떻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사과’라는 사물과 사과의 본질이 어떻게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설명에 반대하는 더욱 심각하게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으로는 현실계의 운동에 대해서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실계의 사물이 이데아 세계의 모형이라면, 어떻게 원본은 변함이 없는데 복사본이 계속해서 변할 수 있는지, 즉 현실계의 운동,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은 답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불만이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많은 지적 유산을 계승하지만, 이데아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잠시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에 주목해 보자. 플라톤에게 참다운 세계는 현실계가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이다. 그래서 현실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아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즉 참다운 지식(에피스테메)은 이데아계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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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그림에서 플라톤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데아계는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므로, 경험은 이데아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 경험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플라톤은 학문의 모델을 기하학에서 찾는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본질은 현실계의 사물 내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험이 지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그는 수학(기하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현실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것이어서, 기하학은 현실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계에 내재된 기본원리나 근본 법칙을 발견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과학을 중시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의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보게, 우리는 이 현실계를 넘어서 이데아계에 대해서 알아야 하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의 뒤덮듯 손바닥을 피고, “선생님, 우리의 탐구의 시작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현실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플라톤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책은 우주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은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한 [윤리학]이라는 점도 두 사람의 철학적 관심의 차이를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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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믿는 존재와 생성의 아포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답하는가? 그는 모든 운동(변화)에는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 같지만, 여기서 그가 ‘원인’이라고 한 말은 현대적인 의미의 원인과는 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개념은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이른바 ‘형상인’, ‘질료인’, ‘운동인’, ‘목적인’이라는 네 가지를 원인 개념에 포함시키는데, 이를 흔히 4원인설이라고 한다.
 
 
형상과 질료는 전문적인 철학용어지만, 어떤 대상이 갖는 형태를 형상이라고 이해하고, 그 대상이 만들어진 재료를 질료라고 이해해두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생각 속에서나 그럴 수 있을 뿐이고, 실제로 그 두 개념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 둘은 분리된 실재가 아니다. 형상은 개개의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 현실계에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형상과 질료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라는 의미로 ‘신테토스(synthetos)’라고 불렀다. 그 말은 오늘날 구체적 대상(concrete thing)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콘크레투스(concretus)’로 번역되었는데, 그 라틴어 단어도 역시 ‘복합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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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다른 사물과 구별해 주는 것은 의자의 형상이고, 다른 의자와 구별해주는 것은 의자의 질료이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현실계에 존재하는 것은 형상과 질료를 지닌 복합체로서 구체적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계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고 ― 그는 그것을 제일실체(primary substance)라고 불렀다 ― 그것들은 모두 질료와 함께 형상을 갖는다. ‘의자’를 예로 들어 보자. 현실계에 존재하는 모든 의자는 일정한 모양을 지니고 있고 또한 나무나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의자들이 동일한 형태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형상은 보편적이다. 또한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의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형상은 사물의 ‘무엇임(whatness)’, 즉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로서 형상은 저 멀리 이데아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계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본질을 파악하는 데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질료는 한 사물에게 고유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질료는 그 사물을 같은 종류의 다른 사물과 구별해주는 ‘그것임(thisness)’, 즉 개체성에 해당한다. 의자를 의자가 아닌 다른 것과 구별해주는 것은 의자의 형상이고, ‘이 의자’를 ‘저 의자’와 구별해주는 것은 그것의 질료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의자의 형상인과 질료인은 의자의 존재 원인이다. 이쯤만 이해해도 그의 원인 개념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원인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인은 의자를 만드는 목수가 나무라는 질료에 형상을 주기 위해서 가하는 작용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운동인’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원인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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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4원인설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목적인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토대가 되는 목적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목적론을 플라톤으로부터 물려받았지만, 훨씬 세련된 형태로 발전시켜 그의 모든 학문으로 토대로 삼는다. 원자론자들에 대한 앞의 글에서 간략하게나마 기계론적 사유와 목적론적 사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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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연물에는 존재의 목적이 있다. 대리석 자체 속의 형
상이 대리석의 존재 목적이다.

목적론이란 인간의 행위에 목적이 있고, 인공물이 존재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자연현상에도 발생의 목적이 있고, 자연물에도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입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변화와 운동의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조각가에 의해서 다윗 상으로 변한 대리석은 그 자체 안에 이미 다윗 상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 대리석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고 대리석은 존재 목적인 다윗 상이 되기 위한 변화의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었고, 조각가는 그것을 실현해낸 것이다. 결국 대리석 덩어리에는 다윗 상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운동의 주체는 현실계에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이다. 차가움 자체가 뜨거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있던 찬 물이 뜨거운 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내용은 그 대상이 가진 형상의 변화이다. 대리석 자체가 다른 무엇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대리석 덩어리가 멋진 ‘다윗 상’으로 변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와 ‘가능태’ 개념을 도입한다. 대리석 덩어리는 그 자체로 질료와 형상을 지니고 있는 복합체였는데, 그 질료가 다른 형상(다윗의 모습)을 획득함으로써 다윗 상이 된다. 그러니까 대리석 덩어리는 다윗 상의 가능태이고, 다윗 상은 그 대리석 덩어리의 현실태이다. 가능태는 현실태의 형상을 결여하고 있는 존재 상태를 말하고, 가능태는 결여된 형상을 획득함으로써 현실태가 되는 것이다. 또 상수리는 상수리 나무의 가능태이고, 상수리 나무는 상수리의 현실태이다. 즉 상수리의 질료에는 상수리 나무가 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운동이란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화되는 것, 즉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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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는 개념적인 면에서나 시간적인 면에서 가능태보다 우선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상수리라는 질료 안에는 상수리 나무의 가능성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수리 나무의 가능태로서 상수리는 상수리 나무라는 현실태 개념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현실태는 가능태보다 개념적으로 앞선다. 그리고 가능태로서의 상수리는 현실태로서의 상수리 나무로부터 생긴다는 점에서 현실태는 시간적으로도 가능태보다 앞선다. 결국 달걀의 현실태인 닭은 달걀보다 개념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닭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닭은 다른 달걀에서 나온 것 아닌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일까?
지금까지 내용을 잘 이해한 독자라면 그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이 무엇일지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사고 때문이다. 사실, 현실태와 가능태의 개념을 도입하는 배경에도 목적론이 깔려있다. 달걀의 존재 목적은 닭이고, 가능태로서의 달걀은 자신의 현실태(닭)를 실현할 수 있는 원리를 자체 내에 담고 있다. 그러니까 달걀보다는 닭이 개념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존재와 운동에 대한 논쟁을 거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대체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철학적 사유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