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를 향한 여정 - 플라톤 02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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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를 향한 여정 - 플라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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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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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항구 피레아스. 에게해에 그림같이 떠 있는 그리스 섬들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여기에서 배를 탄다. 지금은 이곳까지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시내에서부터 걸어 다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국가](폴리테이아)는 어느 여름날 소크라테스가 피레아스에서 열린 축제를 구경하고 난 뒤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책은 두툼하다. 분량으로 보면 플라톤 [대화편] 전체의 5분의 1쯤 될까? 그래서 다른 [대화편]은 한 숨에 죽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다. 시간을 좀 투자해야 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루소는 이 책을 “인간 교육에 대한 세계 최대의 논문”이라고 잔뜩 추켜 세웠지만 어디 교육 분야뿐이겠는가? 이 책은 오늘날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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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이 책이 씌어질 당시는 학문과 철학이 나누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중심 질문이었던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가” 하는 논의가 이 책에서는 풍성하게 펼쳐진다. 그 논의가 인간 개인에 적용되면 윤리학이 되고, 인간 사회로 확장되면 정치학이 된다. “철학자 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좀 생뚱맞은 주장이 플라톤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 이론’과 함께 등장하는 곳도 이 책이다. 이데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도 재미있다.

[국가]는 플라톤의 나이 50세가 넘어서 집필한 책이다. 그가 평생을 두고 존경했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나, 그의 독자적 철학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또는 ‘소크라테스식 철학하기’에 흥미가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는 것이 좋고, 플라톤이 꿈꾼 철학 왕국에 흥미가 있다면 [국가]를 권한다. 루소처럼 이 책을 호의적으로 읽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철학자 포퍼와 같이 플라톤을 전체주의의 원조격으로 바라본 이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가 서양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크다는 점만큼은 누구나 인정한다. 단순화해서 용감하게 말하면 서양 철학, 더 확장해서 서양 학문의 전통은 플라톤 철학에 기초하고 있거나 또는 플라톤 철학에 반기를 든 철학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류는 플라톤 철학을 지지하는 넒은 의미에서의 플라톤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플라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물음은 서양 철학의 전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이 발원하는 사실상의 분수령이 된다면, 서양 철학의 물줄기가 어떻게 플라톤에 흘러 들어와서 나갔는가 하는 점을 눈 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적 전통이 다 그렇지만, 플라톤 철학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우리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살펴보았지만, 플라톤 철학에는 소크라테스 이외의 다른 성분도 들어 있다. 플라톤의 숨겨진 철학적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대표적이다. 특히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되는 이데아 이론이 체계화되는 데에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유난히 많이 남긴 이 두 사람의 고대 자연철학자 역할이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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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학자들과 토론 중인 플라톤.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철학 전통의 원류를 이룬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서 감각적 경험은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감각적 경험의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다 변화한다. 기억하는가? 만물은 변화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헤라클레이토스 편’에서 나는 지식iN에게 물었다. 변화에서 자유로운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장 많은 답변은 뜻밖에도 변화 자체라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답변을 읽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끝없이 변화하는 만물과 그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힘으로서의 변화 자체를 구분했다고 흡족하게 생각했을까? 그는 후자, 곧 변화를 지배하는 초월적 실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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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변화하는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존재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또 그는 같은 이유에서 감각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 참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참 존재와 참 지식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자기 동일성을 가진 참 존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데아는 위 물음에 대한 플라톤의 응답이다. 헤라틀레이토스가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에서 그 변화를 지배하는 요소, 힘 또는 원리로서 로고스라는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중요한 개념을 찾아냈다면, 플라톤은 그 변화하는 모습의 배후에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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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은 참이 아니다. 이데아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등장하는 모든 철학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지만, 로고스와 이데아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로고스는 원래의 말 뜻이 “말”(spoken words)이고, 이데아는 “본다”는 말에서 나온 “모습” 또는 “형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어에 지금의 철학적 의미가 잔뜩 붙게 된 것은 2,500년 동안 생각이 쌓인 퇴적의 결과로 봐야 한다. 로고스라는 말도 그렇고, 이데아라는 말도 그렇고 우리는 지금 이 용어들을 골치 아픈 철학적 언어로 생각하지만, 원래는 일상 생활에서 쓰는 평범한 말들이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변화하는 세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화하는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는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세계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 존재라고 봐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비시간적(atemporal)이며,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비공간적(aspatial) 존재다. 잠깐! 그런 존재를 믿어야 하는가?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없다면, 그것이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이데아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고 답한다. 그것은 우리 얼굴에 붙어있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누스’(nous)를 번역한 것이다. 지성의 기능은 이데아의 세계를 보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얼굴에 있는 눈이 현상 세계를 보는 것을 기능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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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를 풀어보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짜고,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원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상식이 아니다. 일반 사람의 상식적인 의견을 전복한다. 의견을 확 뒤집어버리는 것 – 그것을 보통 ‘패러독스’(paradox)라고 부르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철학적 개념이 있다. 패러독스는 의견을 뜻하는 그리스어 ‘독사’(doxa)와 ‘거스른다’는 뜻의 접두어(para)가 결합해서 생긴 말이다. 독사는 불완전한 지식이다. 그것은 육안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참 지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할 수 있는 지식이 참 지식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육안의 눈이 아닌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이다. 그것은 지성의 눈으로만 보이는 이데아의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통 안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지식은 단순히 독사이며 그것은 결코 완전한 앎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잠깐!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다. 그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철학시에서 독사의 길과 진리(알레테이아)의 길을 이야기했다. 플라톤은 독사를 에피스테메와 대칭시켰지만, 따지고 보면 이 구분법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독사/알레테이아의 구분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가 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서 슬쩍 빼놓고 온 점이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참 지식(에피스테메)을 인식하는 기관이 지성(nous)이라는 생각도 사실은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용어를 차용했을 따름이다. 지성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 – 그것을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존재’가 되고 플라톤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아’가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또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오로지 지성의 지각을 통해서만 드러나지,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귀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대상은 오로지 눈이라는 시각 기관에만 열려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청각대상은 오로지 귀라는 청각 기관에 열려 있듯이, 존재는 존재 지각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에만 오로지 열려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지성의 지각은 존재와 동일하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던진다. “사유는 존재와 동일하다”는 진술로 흔히 변용되어서 전해지는 그의 말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장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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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는 감각적 경험의 문 너머 지성의 지각을 통해서 인지되는 참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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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시계 바늘을 뒤로 돌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복기하는가? 플라톤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아니다.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고대 자연 철학자들의 역설을 통과해야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더 콕 짚어서 이야기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존재론적 측면과 인식론적 측면이 모두 도출되기 때문이다. 더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서양 철학의 양대 기둥이라고 부르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바로 이 대목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경한 철학 용어를 퍼부어서 여러분을 골치 아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때로는 사유의 깊은 바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퍼렇게 날이 선 개념으로 추상화 작업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를 마치 세계의 비밀이나 벗겨내기나 하는 것처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암호같이 해독불능의 언어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런 일은 대체로 하나의 생각의 틀과 다른 생각의 틀이 충돌하는 전환기에 주로 일어난다.

플라톤이 [국가]를 쓸 당시의 아테네는 지중해 세계의 질서가 크게 요동치던 시기였다. 생각과 생각이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철학의 관심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관심이 이동하면서 무엇이 올바른 삶이며, 무엇이 올바른 정치 체제인가 하는 관심이 크게 고조된 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세계의 근원과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생각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깊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이 시작되는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위와 같이 여러 갈래로 흐르는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틀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그 핵심 개념이 바로 이데아다. 그가 쓴 [국가]에는 그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향기가 함께 묻어난다. 거기에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와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상 사회를 향한 설계도를 그린 플라톤, 그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철학적 토대로서의 이데아 이론과 그 기본 개념 틀을 제공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등이 함께 숨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