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두 사람의 대화의 주제는 덕(아레테)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프로타고라스는 그럴 수 있다고 답한다. 우리가 누구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 그들의 공통 관심은 더 이상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처럼 피시스의 문제가 아니라 노모스의 문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로마 시대 철학자 키케로 식의 표현을 쓴다면 그들은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린” 철학자다.
둘째, 두 사람은 대화법의 달인이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자신은 프로타고라스처럼 웅변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대화를 짧고 간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때때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 못지않게 긴 연설을 하기도 한다. 대화법(엘렌쿠스)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한 방법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또한 프로타고라스가 즐겨 한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의 순서로 볼 때 대화법의 원조를 굳이 따지자면 프로타고라스로 봐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모두 자연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에 관심을 쏟았다고 해서 그들의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프로타고라스는 노모스의 상대성에 눈길이 갔고, 소크라테스는 노모스의 상대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추구했다. 프로타고라스가 철학의 역사에서 악역에 머물고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주역이 된 결정적인 이유다. 대화법도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우리의 무지를 알기 위한 방법인데 비해 프로타고라스의 대화법은 우리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 웅변이나 변론이 동원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을 무너뜨리고 내 주장을 보강하는 데 있어서는 변론술이나 웅변술의 효용은 매우 크다. 나는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더 훌륭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프로타고라스 같은 훌륭한 적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