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상대적인가? - 프로타고라스의 덫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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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상대적인가? - 프로타고라스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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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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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주인공보다 빛나는 악역이 있다. 그런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주역이 아니라 악역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악역이 쳐놓은 덫을 단지 빠져나갈 뿐이다. 실질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악역이라는 이야기다. 철학에서도 그런 빛나는 악역이 있을까? 있다. 철학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년경~420년경)일 것이다. 그가 철학의 주역들에게 장치한 덫이 상대주의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화이트헤드(Whitehead)의 지적이 옳다면, 악역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위치는 더 커진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보편 철학을 옹호하는 한, 프로타고라스가 제기한 상대주의와 끝없이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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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산 철학자다. 나이는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보다 많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는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을 찾아온 소크라테스에게 “나는 나이가 많네. 아마 자네들의 아버지 뻘쯤 될 것이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프로타고라스가 철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정확하게 자리 매기기 위해서는 서양 철학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 철학(철학의 눈으로 볼 때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철학적 동일체다)과의 관련성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 철학을 구분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통상적인 분류법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소크라테스를 기준으로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그리스 철학을 식민지 철학과 아테네 철학으로 나누는 것이다. 전자가 시간 질서에 따른 구분법이라면, 후자는 공간 질서로 분류한 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방식에 따른 분류는 내용적으로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등 사제 관계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세 주역이 바로 아테네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철학의 숲>에 등장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시간적으로는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ic) 철학자이며, 공간적으로는 아테네 철학자가 아닌 식민지 철학자들이다. 그러면 프로타고라스는? 굳이 분류한다면, 그 또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이며, 또한 그리스 식민지 철학자다. 그의 고향은 그리스 북쪽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한 압데라(Abdera)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를 그렇게 보는 게 과연 옳은가?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나이가 많지만,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호흡한 사람이다. 아테네 출신은 아니지만, 그가 주로 활동했던 무대는 아테네다. 그에게 아테네는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정치가 페리클레스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며, 아테네 법을 가다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이동시킨 철학자라는 점이다. 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분류법은 소크라테스를 기준점으로 삼는 것도, 또 아테네라는 공간 안에서 철학을 했느냐 밖에서 철학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철학의 관심 영역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철학의 물줄기를 확 돌려놓은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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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돌려놓았다.
잠깐!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철학의 영역을 확장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서도 보편성을 추구한 철학자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보다 한 발 앞서 노모스, 곧 인간세계가 가진 성격에 관심을 쏟은 철학자가 바로 프로타고라스다. 프로타고라스가 노모스의 상대성을 강조했다면, 소크라테스는 노모스의 보편성을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프로타고라스를 철학의 역사 속에서 자리 매길 때 소크라테스와 분리시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분류하는 데 반대한다. 프로타고라스를 아테네 철학과 분리해서 바라보는 데도 반대한다. 그는 소크라테스 철학과 함께, 아테네 철학과 함께 묶어서 봐야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한 묶음으로 묶어서 그리스 인간철학의 시대를 활짝 연 철학자로 봐야 한다. 여기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철학적 적수, 다시 말해 플라톤과 그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완벽한 악역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악당은 주인공의 눈으로 해석되어야 더 맛이 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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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는 인간세계의 보편성 보다도 상대성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타고라스가 스스로 쓴 문헌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등의 책을 썼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프로타고라스 편에서 보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프로타고라스 철학에 대한 기록은 제법 남아 있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 중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젊은 소크라테스가 나이 든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다른 대화편과 마찬가지로 내레이터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소크라테스다.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프로타고라스이고, 어느 대목에서 어느 대목까지가 플라톤이 상상력으로 그린 프로타고라스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프로타고라스 철학과 소크라테스 철학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은 짚어볼 수 있다.
첫째, 두 사람의 대화의 주제는 덕(아레테)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프로타고라스는 그럴 수 있다고 답한다. 우리가 누구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 그들의 공통 관심은 더 이상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처럼 피시스의 문제가 아니라 노모스의 문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로마 시대 철학자 키케로 식의 표현을 쓴다면 그들은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린” 철학자다.
둘째, 두 사람은 대화법의 달인이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자신은 프로타고라스처럼 웅변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대화를 짧고 간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때때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 못지않게 긴 연설을 하기도 한다. 대화법(엘렌쿠스)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한 방법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또한 프로타고라스가 즐겨 한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의 순서로 볼 때 대화법의 원조를 굳이 따지자면 프로타고라스로 봐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모두 자연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에 관심을 쏟았다고 해서 그들의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프로타고라스는 노모스의 상대성에 눈길이 갔고, 소크라테스는 노모스의 상대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추구했다. 프로타고라스가 철학의 역사에서 악역에 머물고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주역이 된 결정적인 이유다. 대화법도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우리의 무지를 알기 위한 방법인데 비해 프로타고라스의 대화법은 우리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 웅변이나 변론이 동원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을 무너뜨리고 내 주장을 보강하는 데 있어서는 변론술이나 웅변술의 효용은 매우 크다. 나는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더 훌륭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프로타고라스 같은 훌륭한 적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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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소개된 곳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 [테아이테토스]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압축해서 요약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우리가 프로타고라스 철학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은 이 짧은 진술이 전부다.
프로타고라스를 상대주의 철학의 시조로 보는 견해도 이 진술을 토대로 후세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보탠 것이다. 상대주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진리가 포함되며, 가치도 포함된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을 인식의 상대주의, 우리가 옳다고 믿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주장을 가치 상대주의 또는 윤리 상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또 어떤 것이 옳으며 어떤 것이 잘못인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큰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참과 거짓, 그리고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철학이 상대주의의 늪에 빠진다면 철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철학자들이 상대주의를 공공의 적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주의는 참으로 묘한 주장이다. 우리는 앞에서 상대주의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말로 정의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상대주의는 정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명제가 옳다면, 바로 그 명제에 의해서 상대주의를 정의한 명제 자체가 상대적 타당성밖에 가지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자가당착이라고 부른다. 자기 주장을 자기 스스로 파괴한다는 뜻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소피스트의 계열에서 끄집어낸 것은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웅변술과 수사학의 힘을 빌어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으로 바꾸는 기술을 극도로 경멸했다. 원래 지혜로운 사람, 또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소피스트가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궤변론자라는 뜻으로 바뀐 것은 플라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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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는 다양한 얼굴과 가치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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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멸의 시각 때문일까? 소피스트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프로타고라스에게는 유난히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프로타고라스의 불가지론(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이 분노해 프로타고라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하고, 프로타고라스가 쓴 책들을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과 주장]에 나온다. 또 있다. 이번에는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이 가르친 제자와 수업료 때문에 재판을 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허구다. 그것도 프로타고라스 편에서 보자면 아주 악의적인 허구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버트런드 러셀이 쓴 [서양철학사]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여러 변형이 있지만 두뇌 회전을 위해 프로타고라스의 수업료 재판에 얽힌 추문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프로타고라스에게 변호사를 꿈꾸는 젊은이가 찾아온다. 이 젊은이는 당대 최고의 변론술을 구사하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수업을 받아 변호사가 되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문제는 당장 수업료를 낼 돈이 없다는 점이다. 프로타고라스의 변론술은 비싸기로 악명 높다. 오늘날로 치면 특급 족집게 과외 선생님쯤 되는 모양이다. 제자는 프로타고라스와 과외비 후불제 계약을 맺는다. 제자가 변호사가 된 뒤 첫 소송에서 승리하면 변호사 수임료를 전부 프로타고라스에게 지불하기로 한다. 단 첫 소송에서 패배한다면 프로타고라스가 가르친 변론술이 신통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수업료를 주지 않기로 계약한다. 제자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변론술을 배우고 난 뒤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건 의뢰가 없었다. 수업료를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프로타고라스는 제자에게 약속한 수업료를 내라고 재판을 건다. 제자 편에서 보면 그의 첫 소송이 스승 프로타고라스와의 재판이 된 셈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어차피 나는 수업료를 받게 되어 있다. 재판에서 내가 승리한다면 판결에 따라 나는 수업료를 받을 수 있다. 재판에서 제자가 승리한다면 계약에 따라 수업료를 받을 수 있다.” 자, 이제 당신이 프로타고라스의 제자라고 하자. 당신은 어떤 논리를 펼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