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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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 -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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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시작했던 일을 칼빈(칼뱅)은 명석한 지성과 쉼 없는 펜으로 계속하여 완성할 것이다. 루터는 로마 교회에서 신교를 떼어냈고 종교개혁을 가져왔다. 칼빈은 그것을 확립하고 안정시킬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진리들을 종이 위에 담아내고,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가를 해석할 것이다.” -테아 반 할세마, [이 사람 존 칼빈]
성당, 대학, 법원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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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Jean Calvin, 1509.7.10~1564.5.27)의 본명은 장 코뱅(Jean Cauvin)이다. 그는 평생 여러 이름을 만들어 썼는데, 칼뱅(Calvin)이라는 이름은 14세 경에 칼비누스(Ioanis Calvinus)라는 라틴어 이름을 짓고 그것이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프랑스식으로는 장 칼뱅이 된 것이다. 장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의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아직 어릴 때 죽었으며,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본래 하층민이었으나 꾸준한 노력 끝에 시민권을 얻었고, 교회의 서기 일을 보고 있었다.

누아용은 종교적 분위기가 유난히 짙은 도시로, 대성당 말고도 교회당이 무수히 늘어서 있어서 “뭐든 말 세 마디를 마치기 전에, 교회 종소리를 한 번은 듣게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어딜 가도 교회와 성직자를 보게 되는 곳이었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종교적 성향이 몸에 배었을 성 싶지만, 대부분의 종교개혁가와는 달리 칼뱅은 종교가로서의 외길 인생을 걷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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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가 되던 1523년(1521년이라는 연구도 있다)에 파리로 가서 신학 공부를 했지만, 석사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에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또한, 당시 부흥하고 있던 인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생애 첫 저작은 1532년 4월에 출간된 [세네카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었는데, 이는 철저히 철학적, 인문학적인 저서로 신학적 의미는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청년 칼뱅은 스스로 회상하듯 “학자로서 사는 삶을 동경하며”, “종교인의 행동양식을 익힌 채”, “법관으로 일하며 수입을 얻으려 했다.”
도망자가 써낸 ‘개신교회의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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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종교인이 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1531년에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 1533년에 거의 끝나 가던 법학 공부를 중단할 때까지의 어느 시점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지 않은 채, “주께서 갑작스레 나의 마음을 돌리셨다. ... 나는 곧바로 새로운 길을 달려가려는 열망에 불탔다. 다른 공부를 손에서 놓치는 않았지만, 더 이상 전처럼 열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제 일생을 신에게 봉사하기로 다짐한 장 칼뱅, 이 학구적이고 금욕적인 청년의 눈에는 당시 여러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던 새로운 흐름이 띄었다. 그보다 25년 연상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 로마교회의 지배질서를 뒤흔든 지 십여 년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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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출간된 [기독교강요].

그것이 단순한 흥미였는지, 열정적인 몰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곧 칼뱅 자신이 싫든 좋든 그 일원으로 간주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파리 대학의 학장이던 니콜라스 콥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1533년 11월 1일의 만성절 기념사에서 다분히 개신교적인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보수적인 파리 대학 교수들은 격분했는데, 그 기념사가 사실 장 칼뱅이라는 젊은이가 써준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최근 연구는 대체로 이것을 헛소문으로 본다) 칼뱅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그는 파리 대학 기숙사에서 침대보로 밧줄을 만들어 붙잡고 창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리고 누아용, 앙굴렘, 푸아티에 등을 전전하며 도망자 생활을 했다. 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1494~1547)는 잔인하게 신교도를 탄압했으며, 혐의가 있는 자는 가차 없이 화형대로 보내는 중이었다.
칼뱅은 피신 생활의 와중에 개신교의 사상이 결코 위험하거나 부도덕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소책자를 써서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는데(1536), 이것이 그의 대표작 [기독교강요]였다. 이 책은 프랑수아 1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지만(그는 그 책을 한 번 펼쳐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전 유럽에 칼뱅의 명성이 떨치는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개신교는 로마 교회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개신교 지도자끼리도 견해의 차이 때문에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기독교강요]는 개신교의 기본 정신과 교리를 체계적이고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던 것이다. 칼뱅은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익힌 폭넓은 문헌 지식과 날카로운 해석 능력, 그리고 법률가로서의 체계적인 논변술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대열에 끼지 못했던 그가 루터에 버금가는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제네바 행, 실패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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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이런 능력에 주목한 사람 중에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활약하고 있던 종교개혁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도 있었다. 루터 이상으로 다혈질이었던 그는 가톨릭 미사에 뛰어들어 사제의 손에서 성유물을 빼앗아 강물에 던져 버리는가 하면, 설교단에 뛰어올라 사제를 걷어차 버리고 신교의 가르침을 목청껏 떠드는 등, 신교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535년 8월, 제네바 의회는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선포하고는 미사 금지와 성상 파괴를 지시했다. 종교개혁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개신교 쪽에서는 값진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파렐은 자신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뚝심으로 마련한 토대 위에 정교하고 우아한 신학의 건물을 지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536년 8월, 잠시 묵어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도착한 칼뱅을 붙들고 “이 도시를 위해 헌신해줄 것”을 요청했다. 칼뱅은 몇 번이고 사양했으나, 파렐은 예의 그 막무가내식의 기질을 발휘해 칼뱅을 밀어붙인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제네바에 눌러앉게 된 칼뱅은 ‘성서 강해 교수’라는 직함을 얻고, 시민들의 생활을 보다 경건하게 만들기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베른, 로잔 등 인근 칸톤(canton, 주)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게끔 힘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곧 벽에 부딪혔다. 성찬식의 횟수를 연 4회에서 월 1회로 늘린다는 것과 교회 측에 불성실한 신도를 파문할 권리를 준다는 개혁안은 제네바 시의회가 보기에 도에 지나쳤다. 논란 속에서 치러진 1538년의 선거에서는 베른의 보수파와 연계된 후보들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하찮은 문제를 들추며 칼뱅과 파렐에게 굴복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를 거부하자 1538년 4월에 추방해 버렸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간 칼뱅은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기독교강요]의 증보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을 시작으로 신약성서의 주석본을 잇달아 펴내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그는 결혼도 했는데(1540), 이들레트 드 뷔르는 칼뱅이 바라던 이상대로 온화하고 순종적인 아내였으나 몹시 병약했다. 아이를 여럿 낳았으나 대부분 일찍 떠나보내야 했고, 그녀 자신도 결혼 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신정정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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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 10월, 칼뱅은 제국회의가 열리고 있던 보름스에서 편지 한 장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년여 전에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도시, 제네바에서 온 편지였다. 개혁자들이 떠난 뒤로 갈수록 방종과 타락에 물들고 있는 도시의 상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칼뱅에게 돌아와 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칼뱅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찌 또 그 십자가를 짊어진단 말인가”라며 한사코 거절했으나 결국 삼고초려에 응했고, 약 1년 뒤인 1541년 9월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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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이루었던 장로들. 좌로부터 파렐, 칼뱅, 베자, 녹스. <출처: (CC) Mathieu.clabaut at wikipedia.org>
그는 제네바에 짐을 풀자마자 새로운 교회법 초안을 작성해서 시의회에 넘겼으며, 승인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의 세속법 개정위원회에도 참석하여 자신의 개혁안을 반영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으며, 이 역시 성공했다. 그리고 이후 근 20년 동안, 제네바에서는 일종의 “신정정치(神政政治)”가 행해졌다. 칼뱅이 직접 통치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속 권력은 여전히 시의회의 손에 있었고, 칼뱅은 1559년이 되기까지는 제네바 시민권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장로회’의 일원이자 지도자였고, 이 장로회는 그가 이미 1536년에 시의회에 요구했던 권한, “불성실한 신도를 파문하고, 죄질이 나쁠 경우 이를 시의회에 고발해 처벌받도록 한다”는 권한을 이용해 모든 시민의 생활을 통제했다.
불성실의 기준은 어이없을 정도의 경건주의였다. 세례식 때 하품을 하면 구속, 예배 도중에 졸아도 구속, 스케이트를 타면 벌금, 악기를 연주하면 추방, 도박이나 음주는 중죄였다. 모든 술집은 철거되었고, 축제는 폐지되었으며, 식당에서는 기도를 올리고 성서를 읽기 전에는 음식을 주문할 수 없었다. 이런 신정정치적 제도개혁 말고도 거리에 오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 발코니에는 아이가 추락하지 않도록 난간을 달아야 한다, 상품 가격을 과도히 올려서는 안 된다 등등 실생활을 개선하는 개혁도 적지 않았으나, 칼뱅의 위세가 떨칠 때의 제네바 시민들은 삶의 소소한 재미조차도 마음 놓고 누릴 수가 없었다. 이런 극도의 경건주의는 칼뱅의 사후에 영국의 청교도에게 계승되고, 미국에까지 이어진다.
제네바에서 벌어진 종교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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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반대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미 페랭(그는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랑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웃은 죄로 처벌받았다)을 비롯한 “방종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그의 실각을 노렸으며, 1553년에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런데 마침 “세르베투스 사건”이 터졌다. 인문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 (Michael Servetus, 1511~1553)는 혈액순환을 처음으로 발견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나,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원죄설도 부정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는 쫓기는 몸이었다. 그가 어쩌다가 제네바에 들어오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당국에 고발하고 그가 자신에게 써보낸 ‘불온한’ 편지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그를 화형에 처했으며, 이를 계기로 칼뱅 반대파의 기세도 꺾였다. 칼뱅을 반대하는 자들은 세르베투스처럼 “악마의 끄나풀”이라는 인식이 시의회나 시민들에게 두루 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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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편지. 영국의 에드워드 6세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칼뱅의 완고함과 냉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거론되었다. 특히 몇 년 전에 역시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제네바에서 쫓겨났던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는 이 사건을 두고 칼뱅을 통렬히 비판하는 책자를 써냈다. “대관절 성서의 어느 구절에 ‘이단’이라는 말이 있으며, 이단이면 죽여도 된다는 말이 있는가? ... 교리상의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살인일 뿐이다.” 20세기 초의 전기작가로, 카스텔리오를 옹호하며 칼뱅을 비판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이렇게 평가했다. “종교개혁은 본래 영적, 종교적인 자유를 위한 운동이었다. 모든 사람의 손에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할 권리를 돌려주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칼뱅은 루터가 가져온 ‘기독교도의 자유’라는 이념을 다른 모든 정신적 자유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가차 없이 빼앗아버렸다. 그는 자신만이 신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성서 해석을 폭군처럼 막아버렸다.”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신, 구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이 세르베투스를 단죄했으며, 칼뱅은 화형보다 덜 잔혹한 처형법을 청원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세르베투스가 교리상의 이유로 죽어 마땅하다 믿었으며, 그를 고발함으로써 화형대로 등을 떠밀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칼뱅 반대파의 마지막 공격 시도는 1555년 5월에 있었으나, 페랭 등은 실패하고 외국으로 달아났다. 같은 해에 칼뱅에게 제네바 시민권이 주어지면서 그의 권위는 부동의 것으로 되는 듯했으나, 동시에 결핵이 그의 건강을 좀먹기 시작했다. 말년의 칼뱅은 개인적인 수치도 겪어야 했는데, 그의 하인과 딸이 잇달아 간통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칼뱅은 한동안 제네바를 떠나 두문불출할 만큼 괴로워했으나, 병들고 지친 몸을 끌고 다시 나타나 예전처럼 일을 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하필 내가 게으름을 피울 때 오시면 어쩔 것인가?”라며. 1564년 초,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모두에게 뚜렷했다. 그는 최후의 힘을 짜내며 설교와 집필을 했으며, 4월 말에는 마지막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5월 27일이 될 때까지 유언과 재산 상속,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의 마지막 편지, 그를 제네바로 오게 했던 파렐과의 마지막 만남 등 신변 정리를 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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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진 세르베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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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독단성을 공격한 카스텔리오.
최대의 자유와 한없는 겸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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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이 종교개혁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루터를 비롯한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원칙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서만이(sola scriptura)” 등을 신학이론으로 체계화하고 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과정에 당사자 스스로의 회개, 고백, 선행 등의 행동과 교회(사제)의 사면, 징계 등의 조치가 개입된다고 여겼다. 이런 논리에 따라 교황이 죄를 없애 준다는 면죄부를 팔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개혁자들의 눈에 사람의 죄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대로 간단히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9) “의인은 오직 믿음을 말미암아 살리라.”([갈라디아서] 3:11) 그들은 사람은 스스로의 선행으로도, 교회의 용서로도 용서받을 수 없고 오직 신의 구원을 믿음으로써만 구원된다고 여겼다. “오직 믿음으로.” 그렇다면 믿음의 근거는, 행동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직 성서만이.” 칼뱅은 이런 개신교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정립해 나가면서 특유의 “예정설”에 이르게 되었다.

이 예정설이란 흔히 오해되듯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의 각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거짓 종교’를 믿으며 타락을 일삼는 자들까지 천국에 가게 될 턱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실만으로 누구나 구원받는다고도 할 수 없다. 겉으로만 믿을 뿐 속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여기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도 얼마나 많은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마태복음] 7:21)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 이후 모든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으나, 실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그 중 일부이다. 그리고 신이 전지전능한 이상, 누가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할지를 미리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 즉, 구원은 “미리 예정된 것이다.”

구원이 미리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면, 그리고 어떤 선행도 그런 예정을 변경하여 새롭게 구원이 있도록 할 수 없다면, 칼뱅이 그토록 엄격한 생활 준칙을 강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게 될 사람’에게는 구원이 정말 이루어지도록 신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신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가 있다. 로마 교회에서처럼 “주기도문을 열 번 외워라”, “10실링을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라” 등의 간단한 행동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그렇게 엄격하게 스스로를 다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떤 행동으로도 신 앞에 당당할 수 없고, “이만한 일을 했으니 나는 무죄 아닙니까?”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제아무리 반성하고, 금욕하고, 경건한 삶을 산다 해도 한없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구원받지 못할 자’ 역시 억지로라도 경건히 살아야 한다. 그의 방종이 구원받을 사람의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구속에서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은 늘 스스로를 단속하고 깨끗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며, 모든 정치, 법률, 관습은 모두가 최대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규제하고 유도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근대사상의 실마리를 제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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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 있는 “칼뱅 묘”. 이는 상징적인 것이며, 그의 유언에 따라 무덤에는 아무런 표시도 남겨지지 않았기에 오늘날 그의 정확한 묘소는 알 수가 없다. <출처: (CC) Schutz at wikipedia.org>

결국, 칼뱅은 모든 개인이 신 앞에 복종하며, 개인의 욕망을 자제하고 신이 제시하는 대로 살 것을 주문한다. 이런 사상이 과연 근대적인 것인가? 오히려 로마 가톨릭보다도 금욕적이고, 독단적이며, 비합리적인 사상이 아닌가?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칼뱅의 사상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의외로 그렇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칼뱅은 정치체제 중에서 군주제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고, 귀족제와 민주제가 절충된 형태가 가장 낫다고 보았다. 한 사람에게 막대한 권력이 주어지는 군주제는 군주가 개인의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기 쉬우며, 그에 따라 나라 전체가 방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이 대다수인 민중에게 통치권을 온전히 줄 수도 없다. 따라서 민중과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으면서 민중을 선도하는 귀족들이 민중의 견제를 받으며 정치를 이끄는 체제가 최선인 것이다. 이는 조금 바꿔 생각하면 근대 대의민주주의 체제와 비슷하며, 실제로 미국 독립 당시 세워진 정부제도는 칼뱅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는 돈벌이를 한 사람이 그 이익을 흥청망청 써버리지 않고, 최대한 소비를 자제하며 대부분을 재투자함으로써 성립된다. 자본가가 사치 욕구를 억제하며 재투자를 하는 동기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화폐물신성’에서 찾았다. 돈을 써서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만족시킬 수단을 얻기보다, 돈 자체를 모으고 또 모으는 일에 끌린 나머지 자본주의적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이런 금전욕 말고도 문화적인 동기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스스로를 위해서 돈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벌며, 신이 내린 재능을 펼치기 위해 사업을 한다. 이런 동기는 칼뱅의 사상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사이에는 큰 친화성이 존재한다고 베버는 결론지었다.

이런 사상이 근대적인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이념과 아주 똑같다고 볼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칼뱅 사상의 응용이지 직접 적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칼뱅이 제시한 인간상, 근면히 일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면서도 사치 향락에 빠지지는 않으며, 언제나 성서를 옆에 두고 도덕률을 입에 달고 사는 가부장의 모습, 그야말로 근대 부르주아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1530년대 초, 한 프랑스 청년의 회심은 그 자신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세계사적 전환점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