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자유와 한없는 겸허함
칼뱅이 종교개혁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루터를 비롯한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원칙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서만이(sola scriptura)” 등을 신학이론으로 체계화하고 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과정에 당사자 스스로의 회개, 고백, 선행 등의 행동과 교회(사제)의 사면, 징계 등의 조치가 개입된다고 여겼다. 이런 논리에 따라 교황이 죄를 없애 준다는 면죄부를 팔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개혁자들의 눈에 사람의 죄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대로 간단히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9) “의인은 오직 믿음을 말미암아 살리라.”([갈라디아서] 3:11) 그들은 사람은 스스로의 선행으로도, 교회의 용서로도 용서받을 수 없고 오직 신의 구원을 믿음으로써만 구원된다고 여겼다. “오직 믿음으로.” 그렇다면 믿음의 근거는, 행동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직 성서만이.” 칼뱅은 이런 개신교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정립해 나가면서 특유의 “예정설”에 이르게 되었다.
이 예정설이란 흔히 오해되듯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의 각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거짓 종교’를 믿으며 타락을 일삼는 자들까지 천국에 가게 될 턱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실만으로 누구나 구원받는다고도 할 수 없다. 겉으로만 믿을 뿐 속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여기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도 얼마나 많은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마태복음] 7:21)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 이후 모든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으나, 실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그 중 일부이다. 그리고 신이 전지전능한 이상, 누가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할지를 미리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 즉, 구원은 “미리 예정된 것이다.”
구원이 미리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면, 그리고 어떤 선행도 그런 예정을 변경하여 새롭게 구원이 있도록 할 수 없다면, 칼뱅이 그토록 엄격한 생활 준칙을 강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게 될 사람’에게는 구원이 정말 이루어지도록 신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신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가 있다. 로마 교회에서처럼 “주기도문을 열 번 외워라”, “10실링을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라” 등의 간단한 행동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그렇게 엄격하게 스스로를 다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떤 행동으로도 신 앞에 당당할 수 없고, “이만한 일을 했으니 나는 무죄 아닙니까?”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제아무리 반성하고, 금욕하고, 경건한 삶을 산다 해도 한없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구원받지 못할 자’ 역시 억지로라도 경건히 살아야 한다. 그의 방종이 구원받을 사람의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구속에서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은 늘 스스로를 단속하고 깨끗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며, 모든 정치, 법률, 관습은 모두가 최대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규제하고 유도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