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 -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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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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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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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의 논리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일반적이고 표피적이며 얄팍한 것이다. 그러나 이백육십칠년 전에는 참으로 매우 대담하며 새로운 논리였다. 그러므로 고염무(顧炎武)가 이를 보고 감탄하여 “삼대(三代)와 같은 훌륭한 세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양계초, 담사동 등이 민권공화의 설을 제창하였을 때 그의 책([명이대방록]) 초록을 수만 부 인쇄하여 비밀리에 퍼뜨렸으니, 청말사상의 급변에 매우 유력하였다.” -양계초, [청대학술개론]
 
 
명, 황혼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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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명왕조는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14대 황제 신종 만력제(萬曆帝)는 명재상 장거정(張居正)이 1582년에 죽은 뒤로는 갈수록 이상해져서, 정치를 폐업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기틀을 스스로 흔드는 짓을 했다. 20년이 넘도록 신하들의 접견을 거절했으며, 상주문은 읽지 않은 채 버리고,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결재를 무기한 회피하여 국가의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황제 스스로의 쾌락에 사용할 비용을 위해 국고를 펑펑 낭비하는 한편, 공무에 들어가는 비용은 아까운 나머지 중요한 자리에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고는 그만큼 봉급이 굳었다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태조 주원장(朱元璋) 이래 명왕조는 황제의 권한이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전통을 이어왔는데, 황제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만력제가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 버금갈 거대하고 화려한 능묘에 잠든 1620년 이후에도 잇달아 병약하고 무능한 황제들이 뒤를 이어서,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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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틈을 타고 중앙에서는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비롯한 “탁류(濁流)”들과 그들의 월권, 부패를 비판하던 “청류(淸流)” 관리들 사이의 당쟁이 격심해졌고, 지방에서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상업자본가들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한 무자비한 세금 폭탄, 이른바 “광, 세의 화(鑛稅之禍)”가 경기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 아니라 이 일을 담당하던 관리들이 농, 상, 공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세금을 긁어내는 악행을 거듭하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기강이 해이해지고 예산이 부족한 결과 국방력은 크게 감소했으며, 만주의 후금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며 중원을 넘보는 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하면서, 위기의 원인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황제의 전제권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느라 송왕조 선비들의 절의와 비판정신은 외면해 버린 당대의 학풍에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청류파 관리들이면서 비교적 젊은 기개 있는 선비들, 이른바 동림당(東林黨)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개혁의 주인공들로 기대를 모으게 되었다.
훌륭한 아버지의 기대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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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의 능에서 발굴된 황금 익선관.<출처: (CC) Mlogic at wikipedia.org>

황종희(黃宗羲, 1610~1695)는 그런 동림당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황존소(黃尊素)의 장남으로 절강성 여요현 황죽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태몽으로 기린을 보았으며, 그가 태어난 날은 공자(孔子) 탄신일과 하루만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어린 황종희에게는 약간의 언어 장애가 있었고, 그 정도의 대학자에게는 흔히 따르는 “신동 전설”이 없는 걸로 미루어 좀처럼 기대만큼 명석함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다.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서 지내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다가도 밤이면 몰래 저속한 소설과 야사를 읽었다. 어머니가 이를 알고 남편에게 알렸지만, 그는 “그런 독서가 오히려 지혜를 일깨우는 법이오”하며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는지 어땠는지, 몇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끝내 한 번도 급제하지 못했다. 명나라 말기 과거제의 혼탁함 때문이라는 변명도 있지만, 아무래도 효율적으로 점수 따는 공부에 능한 수재형 인간은 아니지 않았을까.

아버지 황존소는 남송부터 내려오는 명문의 일파에 속했지만 그 집안은 오랫동안 벼슬을 얻지 못해 한갓 토호의 지위를 면치 못했는데, 황존소가 비로소 과거에 급제해 체면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안휘성 선성에서 사법관으로 일하며 유력자 앞에서 추호도 물러서지 않는 기개를 보여 청백리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다시 북경으로 올라가서 동림당의 일원이 되어 위충현 등의 탐관오리들과 정면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황제(희종 천계제(天啓帝))의 조칙을 마음대로 위조할 수 있었던 위충현에게는 역부족이었고, 1625년에 다른 동림당 인사들과 함께 조정에서 내몰리고 말았다. 이듬해 황존소가 위충현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위충현은 꾸며낸 죄목으로 그를 잡아들여 그예 처형해 버렸다. 황존소의 나이 43세. 황종희는 17세였다.
참된 복수의 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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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을 참을 수 없던 황종희가 반드시 간신들을 없애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굳게 결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희종이 죽고 명왕조 최후의 황제인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위충현의 무리가 숙청되어 분분히 자살 또는 처형으로 삶을 마감했고, 황존소를 비롯한 동림당의 희생자들에게는 복권과 함께 벼슬이 추증된 것이다. 젊은 황종희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허탈했다.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원한을 삭일 수 없던 그는 탁류의 잔당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뛰어들어 폭력을 휘둘렀다. 위충현에 빌붙었던 허현순(許顯純), 최응원 등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허현순이 자신이 황실의 외척임을 들어 벌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하자, “네놈은 반역을 도모한 거나 마찬가지다! 반역자는 황제의 살붙이라도 용서가 없거늘 외척 따위가 어디서 망발이냐!” 이렇게 소리친 황종희는 허현순에게 달려가 쇠꼬챙이로 마구 찔렀다(쇠몽둥이로 때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허현순을 걷어차고는 다시 최응원을 난타하고, 그의 수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그 수염은 아버지의 영전에서 태웠다고 한다. 아무리 중죄인이라 해도 엄연히 국가의 사법과정을 방해한 것이지만, 사정이 참작되었던지 황종희는 처벌받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황종희는 아버지를 모함하는 상소문을 올렸던 이실을 심문할 때도 그를 폭행했으며 아버지를 처형했던 망나니와 옥졸 두 사람들을 붙잡아 살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직무를 수행했을 뿐인 망나니와 옥졸까지 해친 점은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으나, 숭정제가 “충신의 가엾은 아들이 아닌가!”라며 두둔했으므로 역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한을 풀고 그 뜻을 받드는 일은 폭력으로만 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못지 않은 청백리이자 뛰어난 선비가 되어,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신명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황종희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 추천해 준 유종주(劉宗周)에게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유종주는 왕수인(王守仁)의 제자로 대표적인 양명학자 중 하나였으나, 이지(李贄)나 나여방(羅汝芳) 등 “양명 좌파”들은 왕수인의 본뜻에서 너무 멀리 나가 “자신의 욕망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것”을 주장했으며 그것이 나라가 이토록 어지럽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게 된 데 기여했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유종주를 따라 황종희도 양명학의 맥을 잇되, 양명 좌파의 급진성을 따르지는 않으며 주자학, 그리고 고증학과도 일종의 절충을 시도하게 된다.
허무하게 끝난 반청 무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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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는 이후 16년 동안 동림당의 정신을 계승하고 옛 학문을 제대로 익히자는 뜻의 ‘복사(復社)’를 비롯한 여러 학술, 문학 모임을 만들고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글 읽는 즐거움에 파묻혀 있을 수는 없었다. 명왕조의 종말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1644년 3월,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가 자살했으며, 두 달 뒤에는 이자성을 몰아낸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차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종희의 스승 유종주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황종희도 이에 참여했다가 함께 남경의 복왕(福王) 정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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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살이호 전투 장면. 명과 조선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후금에게 패했고, 결국 후금(청)의 중국 제패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복왕 정권은 청나라에 맞서는 일보다 당쟁에 더 골몰했으며, 위충현 이래의 악연 때문에 동림당 인사들이 다시 한 번 표적이 되었다. 황종희도 하마터면 체포되어 처형될 뻔 하다가, 청나라의 공격으로 모면하기도 했다. 실망한 유종주는 낙향했으며, 시국을 비관하여 단식한 끝에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황종희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고, 1년 만에 복왕 정권이 무너지자 노왕(魯王)을 도우며 사재를 털어 5백 명의 병사를 모집, ‘세충영(世忠營)’이라는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 군대에 대항했다.
노왕 정권에서는 황종희의 주장이 비교적 힘을 얻어서 한때 다른 병영의 병력을 합해 3천 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며 청군 요격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노왕을 옹립한 무장들이 좌우하는 정국이었고, 군자금이 필요하다며 현지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므로 백성들은 차라리 청나라를 응원하는 판이었다. 결국 노왕이 공세에 못이겨 복건으로 피신하자, 세충영 병사들과 함께 사명산에서 농성 중이던 황종희는 그를 찾으러 홀로 길을 나섰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한 채, 그 사이에 사명산이 함락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음을 깨달은 황종희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화안산으로 피신했다가, 3년 뒤 다시 노왕을 만나 잠시 곁에 있었지만, 상항이 절망적임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며 낙향했고, 그것으로 그의 반청 무장투쟁은 끝났다. 1649년이었다. 황종희의 나이 40세. 명나라의 명맥은 13년이나 더 뒤에, 계왕(桂王)이 운남성에서 오삼계(吳三桂)에게 살해당하며 완전히 끝나게 되지만, 이미 천하는 청나라의 손에 있었다.
말년의 황종희는 변절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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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십여년 동안 황종희는 식구들을 데리고 사방을 떠돌며 살았다. 그의 반청활동을 익히 아는 청왕조에서 그를 지명수배했으므로 어딜 가도 안심하고 지내지 못했다. 이때를 전후해 일본에도 한 차례 다녀왔다고 한다(노왕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빌리러 갔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그리 신빙성이 없는 설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황종희는 여러 자식과 손자, 형제를 잃고, 산적들에게 사로잡혀 모욕을 당하는 등 고생이 끊이지 않았다.
고달픈 심신을 달래주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과 책뿐이었다. 황종희는 유랑의 틈틈이 시를 쓰고는 모아서 시집을 엮기도 하고, 유학서적을 집필하기도 하고, 복왕과 노왕 정권의 전말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변화는 1662년을 기점으로 왔다. 이때 계왕이 죽어서 명왕조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을 뿐 아니라, 청왕조에서는 강희제(康熙帝)가 등극했다. 아직 어렸던 강희제가 친정을 하기에는 세월이 더 필요했으나, 그의 시대는 청왕조의 기틀이 완성되는 한편 폭력과 무법의 그림자가 걷히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는 시대가 될 터였다. 명왕조의 지사들도 차츰 반청의 뜻을 접고, 시대에 순응하게 되었다.
황종희도 그랬다. 계왕의 죽음을 듣고 “이젠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며 통곡했던 그는 세월이 지나며 청왕조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조금씩 틀었다. “거짓 왕조(僞朝)”, “오랑캐의 두목(虜主)”이라던 호칭이 “우리 왕조(我朝)”, “천자(天子)”로 바뀌었으며, 책을 마칠 때도 “강희 몇 년” 하고 청왕조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청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마쳤지만, 자신의 자식이나 제자가 관리가 되는 일은 말리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부끄러운 변절이 아니냐는 비판이 그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의 철학과 입장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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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청왕조의 중국 지배를 안정시켰고, 중국 문화를 장려하여 선비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주는 천하의 객일 뿐, 백성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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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황종희는 양명학의 종지를 따라 사람의 천품에는 태어날 때부터 차이가 있다는 주자학의 주장을 배격하고 “사람은 누구나 옳은 행동을 가릴 수 있는 양지(良知)를 가지며,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러므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여긴 양명 좌파와는 달리, 공부와 수양을 통해 양지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주자학과, “유학이 융성했던 송나라와 명나라가 왜 망했는가? 명분과 공리공론에만 얽매여, 진정 나라와 백성에 유익한 정책을 펴기를 게을리한 선비들의 잘못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더 철저한 고전 분석을 통해 유학의 진면목을 밝혀내자고 한 고증학의 입장에 잇대어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명나라가 망한 원인이 선비들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았다. 만력제나 천계제를 생각해 보라. 복왕과 노왕은 또 어땠는가? 무능하고 우둔한 위인이 우연히 군주가 되어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력은 하지 않고 스스로의 쾌락만 추구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치지 않았던가? 이런 군주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살며, 자신의 이익만을 구했다. 공공의 이익이 있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고, 공공의 해로움이 있어도 없애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자신만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의 이익을 추구했다. 또한 자신만의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고, 천하의 해로움을 없애려 했다. (.....) 훗날의 군주는 그렇지 않다. 천하의 이해관계를 온통 자신의 손 안에 쥐고는 천하의 모든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돌리고, 천하의 해로움은 그대로 천하에게 돌리고 있다. 천하의 백성이 자기 뜻대로 살지도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모두의 공적인 이익이라 속여 그것을 추구하게 한다. (.....)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었고 군주는 객(客)이어서, 군주는 평생 천하를 위해 수고했다. 이제는 군주가 주인이고 백성이 객이 되니, 백성은 평생 군주 때문에 편안할 수가 없다. (.....) 천하에 해로운 것이 바로 군주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군주가 없다면,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살며, 자신의 이익이라도 챙길 수 있으리라.”
1663년에 나온 황종희의 대표작,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 나오는 말이다. “명이(明夷)”란 주역의 한 괘로서 빛이 어둠 속으로 숨은 암담한 현실을 나타낸다. 황종희는 지금의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하면서 그 원인의 분석과 처방이 자신에게 있으니, “누군가 찾아와 그것을 활용해 주기를 대망한다(待訪)”는 뜻에서 이 책을 썼다. 그렇다면 처방이란 무엇인가? 그는 군주 세습제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요순시대의 선양(禪讓) 제도로 돌이키기는 무리라 보았다. 그러나 재상제도는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 본래 군주와 신하는 함께 나라를 이끄는 파트너였는데, 명나라에서 재상제를 폐지하며 모든 신하는 군주의 노예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상이 이끄는 각료회의에서 정책을 결정해 군주의 결재를 받고 시행하도록 하며, 위충현처럼 황제의 총애를 업은 환관이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군주는 매월 대학(大學)을 방문하여 대학 좨주(祭酒)의 가르침을 듣는다. 그 가르침은 유교 경전의 풀이에 그치지 않고, 정책의 비판과 대안의 제시 등도 포함된다. 경연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나왔지만 명나라 때는 완전히 형식화되어 있었는데, 황종희는 조선에서처럼 군주가 학술토론과 정책토론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다른 점은 군주가 좨주를 스승으로서 존중하여, 그의 충고를 최대한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황종희는 또 송나라와 명나라의 국방이 약해진 것이 송나라 때 지방 절도사를 폐지하고 군사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데 있다고 보아 이를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일부 절도사의 힘을 키워 역성혁명이 일어날 소지를 높이겠지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한두 절도사의 야심조차 제압할 수 없는 왕조라면 없어지면 그만 아닌가? 그보다는 천하 만민이 외적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지 않게 방비하는 게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볼 때 황종희의 ‘변절’은 결코 변절이 아니다. 선비가 목숨을 걸고 충성해야 할 대상은 천하의 백성이지, 군주 개인이나 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황제들이 본분을 잃고 천하를 해롭게 했다면, 새로운 왕조에 의해 교체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명왕조의 신하였던 자신은 청왕조에서 벼슬하지 않는 것이 예의지만, 목숨을 걸고 청나라에 끝까지 맞선다거나, 자식이나 제자들의 벼슬길까지 막는 일은 불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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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가 반청투쟁을 했다는 사명산에 세워진 “황이주기념관”. 이주(梨洲)는 황종희의 호다.
“중국의 루소”에게 배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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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인 이후 왕성한 교육과 집필 활동을 펼친 황종희는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 “절동학파”를 길러내는 한편 [명이대방록], 명대 사상사를 총정리한 [명유학안], 맹자(孟子)의 왕도정치를 풀이한 [맹자사설], 음률학서 [율려신서] 등 총 112종 1300여 권, 2천만 자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 그리고 1696년 7월,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는 장례절차를 극도로 간소화하며 관도 없이 이불에 시신을 싸서 매장하라고 유언했는데, 그 까닭을 두고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시신이 빨리 썩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단지 허례허식을 배격하는 자세를 실천해 보였을 뿐이라고도 한다.
“군주는 객이며 백성이 주인”이라는 황종희의 사상은 “군주란 본래 백성의 필요에 따라 추대된 것”이라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사상과 더불어 전근대 동아시아의 “근대 민주주의적” 사상의 실마리로 많은 각광을 받는다. 그래서 19세기 말 중국의 민주개혁파들은 [명이대방록]을 널리 인쇄해 보급했으며,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근대적, 민주주의적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군주전제권을 신권에 의해 제한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천하의 주인”이라는 일반 백성이 진정한 주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길은 열어 두지 않고 있다. 또한 양명 좌파에서 “욕망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 인간관에 다가갔던 반면, 황종희는 사, 농, 공, 상의 기본적 평등은 말했으되 실질적으로 선비 계급이 일반 백성을 지도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맥락에서 금은의 유통을 금지하고 기본적으로 물물교환 경제로 가야 한다, 사치를 엄금하여 일반인의 의복이나 음식을 제한해야 한다, 등등 주자학적인 정책도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인생역정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상가는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한계를 넘어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찾아내고, 자기 시대에 맞게 활용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