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에도 페르시아의 위세는 여전해 보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언론을 통제했으며, 페르시아 백성들은 그들의 왕이 서방에서 아테네를 불태우고 스파르타 왕을 죽였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제국의 위신 추락은 피할 수 없었으며, “중단 없는 정복”을 지향했던 페르시아의 발전전략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반란이 염려된 중앙정부는 지방의 군사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방력에 치명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래서 기원전 401년에 키루스의 반란에 동참했던 그리스 용병들은 비록 반란이 실패하여 퇴각했음에도 아르메니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제국 영토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귀국할 수 있었다. 이제 종이호랑이가 되어가고 있던 제국은 대담하고 야심만만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말발굽에 짓밟힐 날만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후 그리스는 전에 없는 번영기에 들었으며 특히 아테네는 “전 그리스의 모범”임을 자칭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델로스 동맹 맹주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거대 해군을 건설하고 여러 도시국가를 종속시켜, “아테네 제국”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이를 곱게 볼 수 없었던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결국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약소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이 어떻게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그리스 중장보병과 삼단노선의 기술적 우위도 해답의 일부가 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한 전술의 승리로 본다. 마라톤에서나, 테르모필라이에서나, 살라미스에서나 그리스는 자신들이 유리한 지형에서 싸울 수 있었으며 따라서 전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그리스군이 대체로 운이 좋았으며, 테미스토클레스나 밀티아데스 같은 명장들의 탁월한 전술적 결정이 큰 작용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빅터 핸슨은 문명사적인 의의를 찾는다. 그리스인들은 “자유인”(비록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만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었고, 많은 노예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였지만)이었던 반면 페르시아인들은 모두 왕의 “노예”였고, 자신의 재산과 가족, 조국을 지키려 싸우는 자유인들의 기세에 목숨만 아까울 뿐인 노예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기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라톤이나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보다 그리스군의 투지가 훨씬 앞섰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전략, 전술이 다양하지 못하고 무기의 성능도 대단하지 않았던 당시의 전쟁에서, 그런 투지는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병력과 물자에서 압도적이었던 페르시아는 전투에서 몇 번 지더라도 전쟁을 최종적으로 승리로 이끌 힘이 있었으나, 살라미스 해전 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먼 타지에서 장기 총력전을 펼치는 일이 페르시아의 전쟁 목표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를 분기점으로 그리스는 부흥의, 페르시아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것은 장기적으로 유럽이 오리엔트를 압도하고, 7세기에 이슬람이 등장할 때까지 서구문명이 서아시아를 주도하는 역사의 서막이 된다.
참고문헌: 헤로도토스, [역사], (범우사, 1995);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존 키건, [세계전쟁사], (까치, 1996); 빅터 핸슨, [살육과 문명], (푸른숲, 2002); 톰 홀랜드, [페르시아 전쟁], (책과함께, 2006); 귄터 블루멘트리트, [전략과 전술], (한울, 1994); 배리 스트라우스, [살라미스 해전], (갈라파고스,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