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1) - 동과 서의 대격돌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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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1) - 동과 서의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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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올리비에 메르송이 그림에 담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아테네에 알린 병사.
그리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알리고 절명하였다는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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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개요

전쟁주체
그리스 도시국가들 VS 페리시아 제국
전쟁시기
기원전 491~기원전449
전쟁터
그리스 중북부, 에게해 일대, 소아시아, 키프로스,
이집트
주요전투
마라톤전투, 테르모필리아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 미칼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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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중의 왕”, “서양 오랑캐”들을 손보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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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 최대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48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2천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 제국의 정점에 당당히 서 있던 단 한 사람, 사트라프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은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그 왕 중의 왕이 별 자원도 없는 산과 섬투성이의 땅에서 북적대며 살던, 전부 합쳐봐야 2백만이 되지 않는(그나마 상당수는 페르시아를 적대시하지도 않았다) 서쪽의 그리스인을 정벌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가지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원나라가 일본을, 미국이 베트남을 기어코 정벌하려고 했던 까닭과 차이가 없었다. 바로 “제국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것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둬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 대군을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수립된지 아직 반세기 정도인 제국으로 생명력이 왕성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사업”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바로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원나라의 쿠빌라이[忽必烈]가 일본을 칠 때, 복속시킨지 얼마 안 되는 남송과 고려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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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이 그린 옥좌의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22년에 새로운 왕이 된 다리우스 1세(Darius I)는 개인적으로도 그런 전쟁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쿠데타-암살이라는 과정을 거쳐 왕이 되었고, 따라서 불만세력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아후라마즈다의 의지를 받들어 전 세계를 지배할 사명을 띤 자”로 내세웠고,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 “흙과 물을 바쳐라”, 즉 순순히 제국의 신하 나라가 되기를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그리고 기원전 49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 엄포를 무시하고 사신들을 처단하자, 왕 중의 왕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이것이 사상 최초(트로이 전쟁이 있으나, 역사적 진위가 불분명하고 동과 서의 구분 역시 뚜렷하지 않았다)의 동-서양 대격돌이 될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앞서 이오니아의 반란까지 포함하기도 하지만, 실질적 전쟁은 이 때부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라톤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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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

그리스, 특히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의 알력은 좀 더 뿌리가 깊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기원전 507년에 페르시아에 보낸 사절을 통해 “흙과 물을 바친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이는 사절들이 멋대로 정한 일이라고 했으나, 스파르타를 상대하는 와중에 다시 적을 늘릴 수 없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도전을 물리쳤고, 4년 전부터 추진해온 민주화 개혁도 위기를 넘겼다. 한편 페르시아는 병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중이었는데, 같은 그리스계였던 이오니아의 도움 요청을 아테네와 에리트레아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494년에 이오니아 반란을 최종 진압한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특히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사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으나,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시늉으로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페르시아 쪽에 민주화 개혁 이전에 아테네에서 독재정치를 했던 페이시스라토스 가문 사람들이 망명해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 고개를 숙이면 다리우스는 그들을 아테네의 사트라프로 삼을지 모르고, 그러면 그들을 내쫓은 민주개혁의 주역들에게 피의 숙청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당시 아테네의 유력 가문들은 페르시아와의 결사 항전을 외쳤으며, 일반시민들도 몇 년 동안의 민주주의를 통해 맛본 자유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스파르타 역시 정치적 사정 때문에 다리우스의 ‘성의’를 짓밟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91년, 레오니다스(Leonidas)는 아테네 공략 실패 후 인기가 떨어진 이복형제 클레오메네스(Cleomenes)를 “미쳤다”며 쿠데타를 일으켜 살해하고 새로운 왕이 된 참이었다. 클레오메네스는 본래 페르시아에 맞서 조금도 굽히지 않는 용감함으로 인기를 끈 인물이었고, 그런 사람을 거꾸러트리고 왕이 된 사람으로서 “레오니다스가 왕이 되더니 곧바로 페르시아에 꼬리를 내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490년, 에게 해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향하는 페르시아 군대(이오니아 진압에서 공을 세운 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와 다티스(Datis)가 사령관이었다)의 전쟁 목표는 간단했다. 아테네와 에리트레아를 불태워 감히 세상의 지배자에게 대항한 본보기를 보이고, 스파르타를 비롯한 되도록 많은 그리스 국가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페르시아군은 페르시아 기병대를 주축으로 메디아인, 박트리아인, 소그디아나인 등 멀리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까지 징집되어 온 경장보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숫자는 수만 혹은 수십만으로 전해지지만 당시 배편을 통한 병력 수송의 한계, 상륙장인 마라톤 평야의 넓이 등을 미루어 1만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낙소스와 델로스를 차례로 손에 넣고, 에리트레아를 격파한 다음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마라톤 평야에 진을 치고는 아테네로 진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테네는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이끄는 1만(중장보병은 4천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의 병력을 마라톤으로 급파했다. 그리스군의 ‘주전력’, 아니 사실상 전력의 전체는 중장보병이었다. 개인 비용으로 무장한, 부유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청동 투구와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지름 1미터의 원형 청동 방패와 2.4미터 정도의 장창을 들었다. 전투에 들어가면 8열 종대로 서서 왼손으로 방패를, 오른손으로 장창을 들었으며 왼팔 팔꿈치로는 옆 병사의 자세를 지지해 주었다. 이런 밀집대형(팔랑크스)은 방어력이 탁월했으나 무거운 장비를 착용한 데다 항상 오와 열을 맞춰야 했으므로 빠르게 달릴 수가 없어서 기동력이 떨어졌고, 원거리 공격력도 없었다(그리스인들은 활을 ‘겁쟁이의 무기’라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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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밀집대형의 상상도.
경장보병도 있었지만 중장보병을 보조해 주는 정도였고 실제 전력이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군이 제일 두려워하던 상대는 기병대였다. 기병대는 중장보병이 꿈도 꿀 수 없는 기동력과 함께 밀집대형을 파괴할 수 있는 돌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집대형이 한 번 파괴되면 수습이 불가능했고, 절망적인 백병전 또는 도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테네군이 마라톤에 도착해 보니, 얼마 후에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페르시아 기병대가 몰래 배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주로 경장보병뿐인 페르시아군 진지를 쳤다. 당황한 페르시아군은 활과 검으로 대응했으나 팔랑크스의 철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아테네군의 수적 열세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은 전차처럼 장갑차처럼 적을 밀어붙였다. 방패로 밀치고, 창으로 꿰고, 칼로 내리찍고. 이 때 페르시아군의 가장 나은 대응책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면서 때때로 돌아서서 반격하고, 다시 후퇴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중장보병은 그들을 따라잡을 속도가 없는 데다 쉽게 지쳤기 때문에 결국 진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군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첫째, 조국과 가족을 구할 결의에 불타는 아테네군과 달리 왕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전쟁터에 끌려왔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기백이 부족했다. 그래서 양쪽 날개가 먼저 무너지자 둑이 터지듯 무질서하게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 페르시아군의 진영 뒤에는 얼마 못 가서 큰 늪지대가 있었다. 도망치다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페르시아군 병사들을 아테네군은 악마처럼 도륙해 버렸다. 아테네군의 전사자 192명, 페르시아군은 6400에 달했다고 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배를 타고 달아나는 적군을 바라보다가, 밀티아데스는 비로소 적 기병대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차렸다. 본래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군을 마라톤으로 유인해서 붙잡고 있는 동안, 주력을 배편으로 빼돌려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아테네의 친 페르시아 세력이 내응하게 되어 있었다. 아테네군은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짚어, 그야말로 마라톤을 하듯 달려갔다(이 전투의 승전을 알리려 42.195킬로미터를 달려간 병사가 아테네에 이르러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는 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간발의 차이로 그들은 페르시아군보다 먼저 아테네에 닿았고, 적군은 상륙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 전쟁의 제1막은 끝났다. 그리스의 ‘기적 같은’ 승리로!
혼자 힘으로 페르시아를 물리침으로써 아테네의 위신은 한껏 높아졌고, 그것은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 ‘페르시아, 페르시아 하더니만, 별 것 아니잖아?’하는 자신감과 ‘다음에는 우리도 한몫 해야지!’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한편 페르시아의 야전지휘관들에게는 그리스에 대한 공포를, 최고사령관(즉 왕)에게는 ‘다음에는 온 힘을 다 기울여,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는 분노를 심어주었다.
 
 
참고문헌: 헤로도토스, [역사], (범우사, 1995);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존 키건, [세계전쟁사], (까치, 1996); 빅터 핸슨, [살육과 문명], (푸른숲, 2002); 톰 홀랜드, [페르시아 전쟁], (책과함께, 2006); 귄터 블루멘트리트, [전략과 전술], (한울, 1994); 배리 스트라우스, [살라미스 해전], (갈라파고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