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 일본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 전해주는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열기
공부대통령 공부이야기 입시아카데미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30159_355.jpg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29628_9221.jpg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일본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48회

본문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
250년 지속된 에도 막부를 연 초대 쇼군
2049587376_yu6MLDzk_10px.jpg
일본 닛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31~1616.6.1]의 사당 도쇼구[東照宮, 동조궁]에 있는 그의 유훈이다. 이는 일부 후세에 위작된 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패자가 되어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열기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겪었던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웠던 삶을 생각해보면 이 글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세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0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전국시대가 통일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세력을 물리치고 마침내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그가 설립한 에도 막부는 이후 25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이 쇼군직을 역임하며 일본을 다스렸다. 에도 막부 시기 일본은 체제 안정을 통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으며, 이 평화를 바탕으로 사회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오늘날 ‘일본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에도는 오늘날 도쿄지역이다. 도쿠가와 가문에서 막부의 쇼군을 역임하던 시기를 흔히들 에도시대라고 한다.

2049587376_nPwKAq3M_frame01.jpg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은 뒤 신의 경지에 올라 도쇼신군[東照神君], 곤겐사마[權現樣]라고 불렸으며 죽은 뒤에도 에도시대 내내 그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을 미쳤다. 한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처세술이 너무 음흉하고 교활하다 하여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내려진 그 근본은 하나이다. 그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온갖 위기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된 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인 것이다. 그만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은 고난과 위기극복의 연속이었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인질생활
2049587376_yu6MLDzk_10px.jpg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중부 지역 현재 아이치현인 미카와쿠니의 오카자키성 성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성은 마츠다이라. 어렸을 때 이름은 다케치요였다. 그의 가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때에 크게 일어났으나 소심했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대에 와서는 서쪽으로는 오다 가문이 다스리는 오와리쿠니에 치이고 동쪽으로는 이마가와 가문이 다스리는 스루가쿠니에 치여 점점 세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이야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오다이노 카타(於大の方)이다.
이에야스는 불과 2세 때 어머니와 헤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어머니의 친정이 오다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 이마가와 가문에 눈치를 보던 아버지는 충성의 표시로 오다이노 카타와 이혼했다. 친정으로 돌아간 오다이노 카타는 2년 후 다른 성의 성주와 재혼함으로써 마츠다이라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
어린나이에 어머니와 생이별 한 후 6살이 되었을 때 이에야스에게는 또 다른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동서의 강국에 시달리던 아버지 히로타다가 이마가와 가문을 택해 보호를 받기로 결정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야할 운명이 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호송되던 중 납치되 이마가와 가문과 적대적이던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에게로 보내졌다. 오다 노부히데는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에게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복속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이미 이미가와 가문과 한배를 탄 히로타다는 이를 거절했다. 아들을 버리고 영지를 택한 것이다.
오다 노부히데는 위협한 바와는 다르게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나고야성에 숨겼다. 이때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나고야성에서의 인질 생활 2년 만에 이에야스는 다시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보내졌다. 오다 오부히데의 서장자인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와 맞바꿈을 한 것이다. 그 사이 이에야스의 아버지는 가신에게 암살당했다. 원칙대로라면 이에야스가 물려받아야 했던 오카자키의 영지는 이마가와 가문에 몰수되고 가문은 멸문되었다.

2049587376_enbYGNCp_02.jpg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아놓았던 이마가와 가문의 맹장 이마가와 요시모토.
이에야스는 8살부터 19살 때까지 슨푸성에서 인질생활을 하면서 철저히 이마가와 가문의 사람으로 키워졌다. 가문의 원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이름 중 모토(元)를 받아 이름을 모토야스라고 개명까지 하였고 이마가와 가문의 여인 쓰키야마도노[築山殿]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을 위한 전쟁에 출전하여 몇 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다
2049587376_yu6MLDzk_10px.jpg
이에야스의 운명이 다시 한번 바뀌는 계기는 전국시대 3대 야전으로 알려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고 죽으면서였다. 승승장구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으로 이에야스에게도 이마가와 가문을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에야스는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오다카 성에 주둔하던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동향을 끝까지 살핀 뒤 자신의 고향 오카자키로 돌아갔다. 이 이후에도 이에야스는 성급히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계속 이마가와 가문의 동향을 살피면서 2년 세월을 더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외가인 미즈노 가문의 중재로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성에서 역사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마가와 가문을 벗어나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은 대가는 혹독했다. 이마가와 영지에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들의 가족들은 나무에 매달아 창을 찔러 죽이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고 이에야스의 장인과 장모도 자결하여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아내 쓰키야마도노와 첫째아들만이 겨우 인질교환을 통해 살아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이후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면서 치욕스러운 이름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미카와쿠니에서 이마가와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후에는 조정에 청하여 성을 마츠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이는 그가 미카와 전체를 아우르는 지위에 오르기에는 마츠다이라라는 성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족보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성이라고 한다. 일본의 귀족은 모두 천황가로부터 파생되어 나와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세상이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는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자리에 오른 무장들 중에 자신이 천황가와 관련이 있다고 우기면서 성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녀 도쿠히메[徳姫]와 자신의 장남 노부야스[松平信康]를 결혼시켜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 동맹은 훗날 이에야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 전쟁에 함께 참여하여 그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도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그는 아네카와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돕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를 격파하고 5개의 쿠니(스루가, 도오토미, 가이, 시나노, 미카와)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이 인질 생활을 보낸 슨푸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굴욕의 과거를 보란 듯이 씻어냈다.
이에야스의 비약적 발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힘입은 것이 컸다. 명목상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였지만 사실, 이에야스에게 오다 노부나가는 주군과 다름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뜻을 거스른다면 이에야스는 존재하는 것도 어려울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이에야스에게 뼈아픈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며느리로 들인 오다 노부나가의 첫째딸 도쿠히메와 이에야스의 처 쓰키아먀도노와의 고부간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이마가와계였던 쓰키야마도노와 오다가문인 도쿠히메는 가문으로는 적대적 관계였다. 거기에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도 도쿠히메와 불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때에 도쿠히메는 쓰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고발장을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딸의 고발장을 본 오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처자를 죽일 것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자신은 다케다와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국 쓰키야마도노를 죽이고 아들에게는 할복을 명령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뢰를 되찾았지만 뛰어난 후계자였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제거하는 가혹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2049587376_d5rZLRSn_01.jpg
일본 닛코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사당 도쇼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고개 숙이다.
2049587376_yu6MLDzk_10px.jpg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 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織田信雄]와 손을 잡고 고마키 나가쿠데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맞섰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군사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으로 번번이 히데요시의 군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오다 노부카쓰가 겁에 질려 의논도 없이 히데요시에게 항복을 해버림으로써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맞설 명분을 잃고 자신의 영지에 웅거하였다.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통일전쟁을 치르던 히데요시에게 이에야스의 복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멀리 규슈까지 원정을 나가기 위해서는 히데요시의 배후 지역에 있던 이에야스를 자기편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명목상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와도 동맹관계였지 신하와 주군의 관계는 맺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원한 것은 신종(臣從)의 관계였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이고 어머니마저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이에야스의 복종을 원했다.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시와 정면으로 싸울 경우 불리한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배후를 안정시킨 뒤 히데요시는 규슈로 원정을 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아직 동쪽에는 호죠씨가 남아 있었다. 오다와라성 호죠씨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는 척하면서 그가 20년간 다스리던 5개의 쿠니를 빼앗는 대신 호죠씨가 다스리던 머나먼 동쪽의 낯선 땅을 영지로 내렸다. 사실상 중앙 정치 무대에서 내쫓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처분이었다.
하코네를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누어 간토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땅은 넓었지만 교토로 가는 길이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중앙 정치 무대와는 심리적 거리감이 매우 컸다. 거기에 이 지역은 최후까지 히데요시에게 저항한 호죠씨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충성심이 컸다. 이런 곳에 히데요시의 부하인 이에야스가 지역 영주로 부임한다는 것은 혼란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가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중앙의 땅을 몰수하여 이에야스가 돌아올 땅을 없애면서 혼란한 가운데 그를 방치하여 중앙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속셈을 아는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분노했지만 이에야스는 오히려 덤덤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던 영지를 서둘러 떠나 동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주 근거지를 비옥한 오다와라에 정하지 않고 뜻밖에 늪지대인 에도로 정했다. 이는 호죠씨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오다와라에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었지만,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도 아닌 조용한 어촌이였던 에도를 주 근거지로 정한 것은 매우 특이한 선택이었다.
그는 에도의 늪지대를 메우고 길을 닦고 상인들을 불러 모아 에도를 어엿한 성으로 발전시켰다. 이에야스는 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뒤에도 교토 인근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막부를 열어 이후 간토 지역의 발전을 꾀했고 특히 에도 지역의 개발을 통해 훗날 도쿄 탄생의 초석을 놓았다.
2049587376_toHS7ner_03.jpg
17세기에 그려진 에도성 그림.
운명의 세키가하라 전투
2049587376_yu6MLDzk_10px.jpg
동쪽에 자리 잡은 이에야스는 제어력을 상실한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각 지역 다이묘들을 국제 전쟁터로 내몰 때 아직 영지의 혼란이 수습되지 않았다는 핑곗거리를 대며 유일하게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군사력을 비축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고 전쟁이 끝이 나자 일본 국내는 다시금 중앙의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다이묘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때 실질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나갔던 무공파 다이묘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아래에 두고 각지의 다이묘들과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 그 힘을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때에 아이즈에 근거를 둔 우에스기를 토벌하기 위해 이에야스가 출병하면서 중앙 무대가 비자,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군대를 일으켜 이에야스의 뒤를 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편은 1600년 10월 21일 일본 중부지방 기후현[岐阜県]의 세키가하라정[関ヶ原町]에서 대치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사실 이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끝난 싱거운 싸움이었지만, 일본 전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양분되어 맞선 상징적 전투로서 의미가 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 승리하면서 이에야스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이 승전으로 에도 막부가 열리는 기초가 다져졌다.
2049587376_95sB4u80_04.jpg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도. 에도시대에 그려졌다.
오사카성으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이제 일개 다이묘가 아니라 천하를 손에 쥔 자의 자격으로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영지를 재분배하였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도 그 영지가 재조정되면서 아버지 때의 영화를 잃고 일개 다이묘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것이 되었다.
에도 막부를 열다.
2049587376_yu6MLDzk_10px.jpg
2049587376_iQl4FZbr_05.jpg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막부 설립을 허가받은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의 자리에 올라 마침내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쇼군이 된 뒤 2년 만에 자리를 그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슨푸성으로 물러났지만 오오고쇼[大御所]라 불리며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하여 얼마 남지 않은 토요토미 가문을 트집을 잡아 1615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도쿠가와의 평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평화는 그의 자손들이 250년간 막부의 쇼군 자리에 오르면서 유지되었다.
말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 라는 말을 하며 후손들에게 통치함에 있어 겸손함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 닛코의 도쇼구에 있는 마구간 건물에는 산자루[三猿]라는 유명한 조각이 있다.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세 마리의 원숭이가 새겨진 것인데. 이것은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견디는 인내의 처세술을 가르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난이 가득했고 죽을 위기에 자주 직면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상 사는 처세가 바로 인내였음을 다시금 일깨우는 조각상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인내를 통해 마침내 일본을 얻었고 자신의 자손들에게도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