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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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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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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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 ?~?)는 고려의 여인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14세기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동을 지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거대 영토를 가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황후가 고려의 출신의 여인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기황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황후가 된 이후 37년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원나라와 고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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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넓히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 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 덕분에 몽골제국(원 세조(쿠빌라이 칸)가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시기에는 아직 몽골 제국이었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은 원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 통교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한반도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 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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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황후의 초상화.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여자 외에도, 원의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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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북원의 혜종).

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혜종)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했다.
황제의 총애는 황후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황후는 당시 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 되던 1335년 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에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죽었다.
순제는 총애해 마지 않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실권자이던 바얀[伯顏, 메르키트 바얀]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고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었던 기황후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를 낳고 이듬해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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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어차피 제1황후는 허수아비 황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 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轅)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기씨 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는 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의 악행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여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 때 시작되어 80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금해진 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후 계속 제기되었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 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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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 그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원나라의 몰락과 기황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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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순제 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 즉위 전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종용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고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가 1365년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동안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한족들이 홍건적이 되어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점령하자 원나라 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 연천에 기황후의 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다. 능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에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능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황후는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황후는 오랫동안 원나라 망국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황후라는 존재가 14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의 역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