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는 미쿠니아파트와 유림아파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0년대 일본기업과 공공기관이 한국에 온 일본인 노동자를 위해 건립한 '요(寮)'라는 건축물에서 우리는 아파트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요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파트라고 할 수 없지만 '공동주택' 형태를 띠었다는 점에서 아파트와 같은 계통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파트와 요의 관계는 인류와 유인원(類人猿)의 관계와 비슷했다.
한국건축가협회가 1994년 발간한 <한국의 현대건축 1876~1990>에서는 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평면 형식은 장방형(사각형)을 채택했고 (중략) 약 9.9㎡(3평) 침실은 3450*3600 또는 3600*2850 규모였으며 같은 건물내에 식당, 공동욕실, 공동화장실, 공동세면장 등이 마련돼 있었다." 아파트라기 보다는 2, 3층으로 된 군대 막사와 더 유사했던 것같다. 아파트가 주요 자재로 콘크리트를 사용한 데 비해 요는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다. 경성전력주식회사가 신당동에 세운 '장진요'를 비롯해 일본인 노동자가 많이 살았던 회현동, 회현동, 용산 등에 이런 요들이 많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당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누구였을까? 신문기사나 간행물에 따르면 일제시대 아파트는 중산층을 위한 주택이었다.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요와는 달리 관사로 쓰인 미쿠니아파트는 주로 간부급 직원들이 살았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공간에 특히 열광한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젊은 세대였다. 그들은 기존 주택에 비해 개인생활을 더 철저하게 보장해 주고 최신 설비를 갖춘 아파트야말로 미래 주거문화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아파트에 대해 글을 쓴 작가나 기자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문화를 여는 첨병' 또는 '쾌적하고 즐거운 도시 생활로 이끌어 주는 주거공간'으로 찬미하고 있다. 1930년대까지 아파트는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아파트를 건립한 사람도 일본인이었고 그곳에 사는 주민도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상류층이나 중산층은 주로 한옥에 살았고 하층민들은 가마니로 만든 '토막'에 거주했다.
1942년이 돼야 한국인 손으로 건설한 아파트가 나타난다. 대한주택공사의 전신(前身)인 조선주택영단이 설립한 혜화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일본식 다다미와 좌식생활을 고려해 설계됐다. 한국인 손으로 건립됐다고 하지만 1930년대 나온 아파트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결국 '한국식 아파트'는 그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에서 그 싹을 틔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