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 음악이란?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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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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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2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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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을 좋아해요.” 소개팅에 자리에서 마음에 쏙 드는 파트너가 이렇게 말했다. A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옛날 일이 떠올랐다. 과거에 퓨전 스타일의 고깃집에서 파트너와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그때 나온 여성도 꽤 마음에 들었었다. 어떤 바로크 스타일의 음악(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비발디의 곡이었을 것이다)이 울려퍼지고 있었고, 그녀는 “이게 무슨 곡이에요?”라고 물었다. A군은 정신이 팔려서 그만 “쇠고기예요. 이거 호주산인데요.”라고 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색한 웃음 뒤에 당연히 소개팅은 그날로 스톱이었고 A군에게는 아픈 추억으로 남았다. 그런 A군 앞에 해맑은 파트너가 나타나 고전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다. 예전에 네이버 <오늘의 클래식>에서 ‘빈 고전파 음악’에 대해 읽은 것이 생각났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시겠군요.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말하고 나서 A군은 파트너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다음 주말에 애프터를 확정지은 A군은 네이버에 접속해서 <오늘의 클래식> 고전파 음악 1편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의 자각, 자유에 대한 열망 - 고전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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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란 당대 작곡가들이 붙인 말이 아니다. 후세에 이르러 낭만주의 음악과 대조적이었던 그 이전의 음악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렇다면 음악에 있어서 고전파, 고전주의란 무엇일까? 두루뭉술하게 정의하자면, 음악사를 통틀어 볼 때 바로크 음악이 신에 가까운 음악이고, 낭만주의 음악이 인간에 가까운 음악이라면 고전파 음악은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다. 1776년 당대의 음악학자인 찰스 버니가 집필한 책에 보면 “음악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확실히 악의 없는 사치품이며 불필요한 것이지만, 청각을 크게 발전시키고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럼 그 100년 전에는 어땠는가 보자. 음악학자 안드레아스 베르크마이스터는 음악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될 하느님의 선물”이라 했다. 음악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얼마나 변했는지 감이 잡히시는가? 18세기라는 시기는 바로크의 ‘신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시대상을 좀더 들여다보자.
18세기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의 시대였다. 계몽주의란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때까지의 사회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종교와 교회에 반대하고 자연적인 종교와 실제적인 이론에 부응하는 움직임이었다. 로크, 흄, 몽테스키외,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형이상학과 권위, 특권에 반대하고 상식과 경험에 기초한 심리학, 사회학, 개인적인 자유, 동등한 권리와 보편적인 교육에 대해서 찬성했다. 고전주의 운동은 고대 세계의 예술과 문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스와 로마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로 유형과 조화를 존중하여 객관적인 형식미를 추구한 이 시기 사람들은 중세 문화와 옛 민요에도 흥미를 가졌다. ‘고전적’이란 의미의 라틴어 Classicus는 사실 로마시대의 상류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바뀌어서 고대의 물건, 혹은 고대 예술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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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군주 프리드리히의 궁전에 모여든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계몽주의 시대 군주들은 예술과 문학을 보호하고 사회개혁 과정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고전파 음악이 발흥하던 시기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 러시아의 카타리나 대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 루이 16세 등 계몽주의 성향의 군주들이 할거하던 시대였다. 이들이 내세운 인도주의,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를 바라는 이념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고전파 음악의 핵심정신으로도 반영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화두다. 당대에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군주, 괴테를 비롯한 시인들, 모차르트를 비롯한 작곡가들이 가담한 세계시민주의적 단체였다.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실러의 [환희의 송가] 그리고 실러의 작품을 텍스트로 사용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프리메이슨 혹은 18세기 인도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계몽주의의 전성기에 ‘개성의 해방’을 외치고 나타난 문학적 혁신운동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독일에서 일어났던 문학운동인 질풍노도(Strum und Drang)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 신호탄이 되었다. 질풍노도 운동은 무르익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방점을 찍은 사례라 하겠다.
예술의 대중화를 요구한 시민사회 - 간명한 음악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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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은 바로크 음악에 대한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1737년경에 작성된 당시 기록에는 바흐의 대규모적 합창음악과 엄격한 대위법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는 반응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감수성의 변화는 시대적인 흐름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자연이란 숲이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장식을 벗은 원래 모습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바흐의 대위법과 같은 바로크 음악의 복잡한 형식보다는 간명하고 명쾌한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과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고전주의와 ‘대중화’가 결합하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는 당시 급격하게 변해가던 시민사회와도 관련이 있었다. 18세기 무렵 신흥 시민계급이 대두해 각 지역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1776년 자유와 독립을 내건 미국이라는 신생국가가 탄생했고,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상을 타고 신흥 중산계급이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라섰고 예술과 학문은 대중화의 단계로 들어선다. 작가와 예술가의 작품을 소비할 수 있는 대규모 시장이 만들어졌고,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상아탑의 성곽을 높이 쌓아올리기 보다는 평범한 일반대중을 의식하게 되었다. 대중을 위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야흐로 문화가 널리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후원자의 손길이 점차 멀어지면서 청중의 성격이 귀족에서 현대적 의미의 일반 서민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음악’을 쓰던 작곡가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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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이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에스테르하지 궁전. 에스테르하지와 하이든의 사례는 귀족 후원자와 음악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이후 후원자의 존재는 약해지게 되며, 작곡가는 후원자가 아닌 자신을 위한 음악을 창작하게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모여든 청중들을 위해 기획된 공개 연주회가 종래의 소수 귀족 연주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중적인 콘서트의 레퍼토리는 어땠을까 생각해보자.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적 다성음악은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단순 명쾌한 선율을 지닌 화성 양식이 융성하게 되었다. 대중적 수요를 맞추기 위해 악보 인쇄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이해하기 쉽고 연주하기 쉬운 음악에 대중적인 수요가 집중됐다. 통주저음에 의한 바로크 음악의 기법은 파기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이 큰 약진을 하게 된다.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날 무렵, 이렇듯 간소하고 자연스런 형태로 태어난 음악을 고전파 음악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른바 ‘고전파 3총사’의 음악은 시민사회의 변화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들의 음악은 독일, 오스트리아 시민사회의 정신, 계몽적 합리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근대사회의 핵심을 응축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범세계적인 문화적 토양 - 빈이라는 도시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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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의 핵심 작곡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들은 모두 빈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빈 고전파’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왜 빈이었을까? 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었을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음악의 도시’라 불리는 까닭이 있었다. 1789년경 빈을 살펴보면 인구가 23만 정도로 독일의 베를린보다 훨씬 컸다. 유럽의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중심 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동시대 런던의 인구는 80만 이상이었고 파리는 50만 정도, 나폴리는 40만이었다. 빈은 이들 도시보다는 작았지만 런던, 파리, 나폴리를 잇는 대도시이자 음악의 도시였다. 이를 빈의 ‘하드웨어’에 대한 설명이라 한다면 그 ‘소프트웨어’는 더욱 풍성했다. 젊고 야심찬 음악가들이 속속들이 빈으로 모여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빈에는 스페인에서 보헤미아(현 체코), 헝가리까지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가 있었다. 합스부르크 궁의 주변에는 궁정에 종사하는 귀족계층과 부유한 직업인(의사, 은행가, 법률가, 상인) 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음악을 향유하고 장려할 수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빈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막론하고 음악을 지원하고 소비할 수 있는 인프라가 풍부한 도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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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른바 ‘고전파 3총사’는 모두 빈에서 활동했으며 빈 고전파 음악을 완성했다.
또한 빈이라는 도시는 문화적 포용력과 다양성이 풍부한 도시였다. 당시 빈에서는 이탈리아 음악, 프랑스 음악, 독일 음악이 동시에 향유되고 있었다. 이런 문화적 다양성이 고전파 음악의 보편성과 범시대적 특성을 형성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은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독일어권의 음악적 유산만을 흡수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 음악의 등장은 세계주의적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8세기의 시대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고전파 음악의 완성을 본 것은 빈을 비롯한 독일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프랑스, 이탈리아의 음악이 있었다. 당시의 음악적 사정을 살펴보면 유럽의 여러 궁정에서 일하던 음악가들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이었다. 고전파 음악은 이탈리아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한 빈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저력을 바탕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민족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그리 크지 않았다. 외국 태생의 군주들이 각 나라를 다스렸다. 영국, 스웨덴, 폴란드에는 독일 출신 왕들이 있었고, 나폴리에는 스페인 출신 왕이, 투스카나에는 프랑스 공작이, 러시아 여제로는 독일 출신의 카타리나 2세가 재임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쓰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 궁정에 머물렀고, 이탈리아 시인 메타스타지오는 빈의 독일 황제 궁에 있었다. 파리에서는 독일 출신의 교향곡 작곡가들이 활약했고 독일과 스페인,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도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이 여왕을 모시던 하녀의 일기를 보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각종 언어가 등장한다고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당시 빈에서는 유럽 각국의 문화가 풍요롭게 향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음악가들은 빈이라는 도시가 주는 포용력과 다양성에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빈으로 모여들었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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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빈의 도시 풍경. 고전파 음악이 흥성했던 빈은 유럽 문화적 다양성의 중심에 서 있는 도시였다.
계몽적 합리주의를 표현하는 소나타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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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의 정수는 음악 형식으로서의 ‘소나타 형식’이다. 이는 빈 고전파의 최대 성과라 할 수 있다. 소나타 형식은 ‘계몽적 합리주의’를 음악을 통해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시부-전개부-재현부’라고 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소나타 형식은 유럽 음악에 있어서 가장 완성된 형식미의 표현이다. 소나타 형식의 정립은 곧바로 교향곡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소나타 형식은 만하임 악파2049587376_tOjDKmsd_txt_number1.gif 를 통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았던 근대 관현악법의 성과(다이내믹한 표현, 새로운 악기 편성의 개발)와 결합해 교향곡 형식을 확립했다. 교향곡은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음악 장르가 되었다. 동시에 바로크 시대의 합주협주곡을 대신하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 독주 협주곡의 등장도 이 교향곡 형식의 확립과 궤를 같이 한다. 현악 4중주곡,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나타 장르도 소나타 형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전파 시대에 등장했다. 이러한 다양한 음악 장르는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시민계급 정신의 음악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