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론자들 - 데모크리토스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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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자들 - 데모크리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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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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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가 발생했다. 경고등이 울리고 전문가들이 몰려온다. 몰려든 전문가들은 버그를 해결할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버그가 성공적으로 제거되면 한 동안 잠잠하겠지만, 곧 또 다른 버그가 나타날 것이다. 사실 이 ‘버그’라는 말은 낯설지 않다. 그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오류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듣는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한다.’는 말에는 버그를 제거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버그’와 같은 것은 프로그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인류의 지성사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버그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에는 수많은 버그가 있었으며, 지금도 많은 버그들이 있다. 이른바 위대하다고 불리는 철학자들은 해결하기 힘든 버그를 만들어 냈거나 그런 버그들을 납득할만하게 해결한 사람들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서 발생한 버그를 해결하는 데 중요 공헌을 했으며, 칸트는 근대 합리론경험론 사이에 발생한 버그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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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다루게 될 버그는 철학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것 중에 하나이다. 이 버그를 제시한 사람은 바로 파르메니데스이다. <철학의 숲>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그는 변화(그리고 운동)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다소 어렵고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위해서 파르메니데스의 증명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중요한 점은 ‘변화’를 ‘무(無, 없는 것, 비존재)에서 유(有, 있는 것, 존재)가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 데 있다. 우리는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물론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염두에 둔다면, 21세기의 우리 역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의미의 ‘변화’ 역시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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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 변화의 원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문제는 이런 논리적인 증명이 우리의 경험, 혹은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뭐라고 논증하든 지구는 움직이고 있고, 나는 늙어 가고 있다.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논리적으로 아무리 나를 설득하려도 해도, 나는 날아오는 총알 앞에 절대로 머리를 내밀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문제없어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 우리의 경험과 충돌하는 것이다. 버그가 발생했다. 경고등이 울리고 전문가들이 몰려온다. 몰려온 고대 그리스의 전문가들 중에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레우키포스(Leucippus),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등의 다원주의자들이 있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몰려든 전문가들 중에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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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든 전문가들은 어떻게 버그를 제거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고 논증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파르메니데스의 중요한 유산으로 받아들인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는가? 물론 있다. ‘변화’를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파르메니데스와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사용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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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현대과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설명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이다. 보통 이 둘을 묶어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이라고 부른다.
둘 중 레우키포스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심지어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원자론자라고 할 수 있는 에피쿠로스(Epicurus)는 그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까지 말한다. 레우키포스는 일반적으로 원자론의 창시자이자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적인 맥락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에 비해 데모크리토스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는 기원전 460년 경에 압데라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 다른 철학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가 다닌 여행지 목록에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는 물론 저 멀리 인도까지 들어가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글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의 글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윤리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고, 그를 유명하게 만든 원자론에 대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잠시 데모크리토스의 윤리적 격언 중에 한 가지를 살펴보자.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가능한 가장 유쾌하게, 그리고 가능한 가장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유쾌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우는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와 대조적으로 ‘웃는 철학자(laughing philosopher)’로 알려져 있다. 이제 이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이 파르메니데스가 찾아낸 버그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어떻게 변화를 파르메니데스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한 과학적 상식을 생각해보자. 산소(O2)와 오존(O3)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여러 산소 원자들 사이의 다른 배열을 통해서 설명한다. 산화수은에 열을 가하면 산소와 수은으로 분해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것 역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었던 산소와 수은 원자가 열을 받은 이후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된다고 설명한다. 즉 산화수은에 열을 가했을 때 없던 원자가 새롭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여러 원자가 새롭게 배열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변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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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설명을 파르메니데스와 비교해보자. 없던 것에서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설명은 그의 생각과 일치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철학의 숲>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하나, 즉 일자이다. 하지만 위의 과학적 내용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원자들이다. 그리고 그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 즉 새로운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변화라고 보았지만, 위에서 변화란 이미 있는 것들의 새로운 배열이 된다. 이렇게 현대 과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원자론자들이다.
원자론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대상들이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주에 있는 원자들의 수는 무한하고, 그 크기와 모양은 무척 다양하다. 그리고 각각의 원자는 완벽하게 꽉 찬 것으로, 원자 내부에는 빈 곳이 없으며, 더 이상 자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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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움직임과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빈 공간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사실 원자(atom)는 ‘자를 수 없는’이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형용사 atomos에서 유래했다. 한편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찰하는 대상들의 변화란 이 원자들의 구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 대상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배열이나 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원자들이 다른 식으로 배열된다는 것을 원자들이 차지한 장소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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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명은 원자론자들로 하여금 원자와 전혀 다른 존재를 가정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여기 바둑판이 하나 있다. 그리고 이 바둑판 위에는 바둑알이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바둑알을 놓을 자리가 없다. 그럼 바둑판에서 바둑알을 떼어내지 않고, 그 바둑알의 배열을 바꿀 수 있겠는가? 얼핏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원자론자들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바둑알의 배열을 바꾸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점유하고 있지 않은 빈자리가 적어도 하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원자론자들은 꽉 찬 원자와 대비되는 텅 빈 무언가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허공(void)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허공의 크기는 무한하며 그 속에서 원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사실 허공이 있어야지만 운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순환적인 운동은 꽉 찬 바둑판에서도 가능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우주론’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이 ‘허공’은 철학적으로 특별하다. ‘허공’이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럼 ‘허공이 있다’는 것은 사실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도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허공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결론 - 변화가 불가능하다 - 에 이르렀다. 하지만, 원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거꾸로 세운다. 그들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상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견 논리적으로 문제 있어 보이는 ‘허공(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 원자론자들의 세계에서는 원자들이 허공 속을 움직이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계속 움직이면서 원자들은 서로 충돌해 튕겨 나가기도 하고 서로 얽히기도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원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대상들과 우주를 형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럼 이런 원자들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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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원자들은 무언가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침 7시이다. 내 침대 옆에 있는 자명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왜 자명종이 울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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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자들은 원자의 작동 매커니즘, 기계적 법칙을 통해 세
계를 설명했다.

첫 번째 답은 ‘나를 깨우려고’이다. 두 번째는 ‘전기적인 작동에 의해서 오늘 아침 7시에 울리도록 자명종을 맞춰 놓았기 때문에’이다. 첫 번째 답은 자명종이 울리게 된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해 두 번째 답은 목적이 아니라, 자명종의 작동 메커니즘을 언급하고 있다. 원자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아니면 원자들의 작동 메커니즘, 혹은 자연 법칙을 제시할 수도 있다. 다른 말로,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을 ‘특정한 목적의 지배를 받는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설명 중에서 원자론자들이 택한 것은 뒤에 것이다. 그들은 목적을 배제하고, 자연법칙을 통한 기계론적인 설명을 도입한다.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이런 원자의 움직임을 키질에 비유한다. 곡식을 키에 놓고 위로 던졌다 받으면서 껍질은 날려 보내고 낟알만 키에 남겨 놓는 작업과 비슷하게, 원자들은 계속 움직이면서 비슷한 것끼리 모이게 된다. 이런 설명에는 분명 목적이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의 목적 없는 기계론은 그 후 철학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다. 목적을 제거해 버린 원자론자들의 생각은 조화로운 목적들의 세계를 상정한 플라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된다.
마지막으로 원자론자들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마무리하자. 데모크리토스는 우리의 인식 과정, 즉 감각과 사고 모두 원자들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혼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그 역시 원자들(빠르고 둥근 불의 원자)로 설명한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물질적인 원자로 설명한다. 그에게는 엠페도클레스의 사랑(Love)이나 불화(Strife)와 같은 것은 없으며, 아낙사고라스의 지성(Nous)과 같은 것도 없다. 피타고라스의 신화적인 면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이런 입장을 유물론(materialism)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명력(vital force)과 같은 것을 상정하는 입장과 대비된다.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이 보여준 유물론과 위에서 언급한 기계적 철학은 17세기 과학 혁명을 지나면서, 보다 세련된 형태로 발전되어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