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역사] 초-한전쟁 (2) - 항우와 유방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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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 [인물/역사] 초-한전쟁 (2) - 항우와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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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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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입성하는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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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 전쟁 개요

전쟁주체 한(漢) 왕국과 그 동맹국들 vs 서초(西楚)

전쟁시기 기원전 206~기원전 202

전쟁터 중국 화북 지방 주요전투 평성 전투, 유수 전투, 성고 전투, 해하 전투



초-한 전쟁, 드디어 막이 오르다


“항우는 천하의 주재자로서 불공평하다. 6국 왕실 출신자는 모두 변변찮은 땅에 봉하고, 자신과 가까운 자들은 좋은 땅에 봉하며 원래의 왕실을 박해하고 있다. 우리만 해도 조나라 왕실의 후예가 황량한 변방인 대(代)에 쫓겨나 있다.” 본래 친구였으나 군공에서 앞선 장이가 조나라의 알짜에 해당하는 상산의 왕이 된 데 불만을 품었던 진여가 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는 많았다. 유방도 이를 이용해서 항우 타도의 명분으로 삼았으며, 광무산에서 항우와 대치했을 때 “항우의 열 가지 죄악”을 열거하며 “6국의 왕실을 푸대접하고 가까운 자들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것을 그 하나로 꼽았다.

‘6국 재건 원칙’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항우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대표주자는 제나라였다. 어쩌다 보니 세 개로 나뉜 제나라의 왕이 모두 옛 제나라 왕실의 후예가 된 제나라는 오히려 그러다 보니 서로 통일 제나라의 왕이 되려고 다툼이 심했고, 그 중에서 사실 누구보다 왕위에 합당했지만 항우와의 알력 때문에 아무 곳에도 분봉받지 못했던 전영(田榮)이 봉기하여 제나라 전체의 왕을 자처하게 된다. 서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나라가 이렇게 강력한 반 항우 세력으로 돌아서자 항우는 직접 출정했으며, 치열한 싸움이 이어져서 동쪽의 상황을 돌볼 여유가 없어져 버렸다. 불화는 동남쪽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유방 못지않게 비천한 출신인 영포는 구강왕 자체에는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자기 영토 내로 쫓겨나 있던 의제를 죽이라는 항우의 명령을 수행한 결과 의제 살해의 비난을 자기 혼자 뒤집어쓰고 있다고 여겨 불만이었다. 그리고 항우가 자신을 어엿한 전우로 대접하지 않고 측근들의 말만 듣는다는 점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정세를 틈타, 기원전 206년 8월, 한나라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했다. 군사력 면에서는 몇 달 전 합류한 한신의 공로가 컸다. 용병의 천재인 그는 ‘오합지졸’ 성격이 강했던 유방군을 조련하여 항우군 못지않은 강군으로 키워냈다. 처음 발탁된 그에게 유방이 “이런 벽지에서 썩느니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도망치는 사람이 많아 큰일이다. 병사는 물론 장교들도 계속 탈영한다”고 푸념하자 한신은 오히려 그런 감정을 이용하자고 했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모두 단결하여 강력한 힘을 기르자”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조나라와 싸울 때 “죽을 지경이 되면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심리”를 이용해 배수진을 쳤던 것에서도 보듯, 그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사기를 북돋울 줄 아는 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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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왼쪽)과 한신(오른쪽) <출처: en.wikipedia.org>

 

그 힘을 과시하듯 한때 천하제일의 명장이었던 장한의 옹진을 포함한 삼진(三秦)을 격파한 한나라는 진격을 계속, 은왕 사마앙, 서위왕 위표 등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면서 기원전 205년 3월에는 서초를 압도하는 병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항우가 없는 서초의 수도, 팽성을 공격했다. 56만의 대군 앞에 팽성은 함락되었고, 초-한 전쟁은 이처럼 싱겁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제나라를 내버려두고 3만의 정예병력만 추려 전속력으로 남하했다. 정예군에 의한 특유의 돌파력에다 길을 우회하여 팽성의 북쪽 대신 서쪽에서 들이치는 기습공격까지 가미되니 기세 등등하던 유방도 속수무책이었다. 퇴각하는 유방군을 항우군은 추격하여 수수 강가에서 다시 한 번 대패시켰는데, 유방은 겨우 수십 기만 거느리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한군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걸 보자 여러 왕국들도 다시 초나라에 붙어, 국면은 순식간에 초나라의 압도적 우위로 바뀐 듯했다.
 



세 개의 전선


그런 우위를 깨트린 것은 구강왕 영포와 제나라에서 항우에 대항하며 유격전을 펼치던 팽월이었다. 장량의 계책에 따라 유방은 이들을 회유할 사신을 보냈고, 성공했다. 이들의 공격 덕분에 유방에 대한 초나라의 공세는 주춤했으며, 고립되어 고사 직전까지 몰렸던 유방은 한숨을 돌리고 형양으로 나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한편 한신은 별도의 병력으로 북진하여 위나라, 조나라, 그리고 제나라를 공략해 나가고 있었다. 항우조차 하기 힘들었던 이 공략을 그는 끝내 이뤄냈으며, 그런 점에서 군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천재성은 공인되었다. 그는 중원 북동부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한편 남쪽에서 항우와 대치 중인 유방에게 병력을 계속 공급해 주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4년에서 203년까지 전선은 대략 셋으로 갈라져, 북쪽에서 한신(및 팽월), 중앙에서 유방, 남쪽에서 영포가 항우에 대적하면서 삼진 쪽을 맡고 있던 소하가 보내는 보급으로 전력을 유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유방에게 딱히 최선은 아니었다. 모사 괴통이 “천하삼분지계”를 올렸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장악한 한신은 그만큼 유방에 대해 독자성을 갖고 움직이게 되었다. 팽월과 영포도 반드시 유방에게 협력할 의리는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할 때만 해도 이들이 소환에 응하지 않아서, 따로 벼슬과 포상을 약속한 뒤에야 비로소 병력을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항우처럼 믿을 수 있는 전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에 기초하여 움직였던 유방 전략의 한계점이었다. 유방은 이런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항우를 물리치기만 하면 6국 재건의 명분을 팽개칠 뿐 아니라 군공에 따른 분봉이라는 원칙도 무시하고, 진나라와 같이 한 사람이 천하를 독점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런 맹점을 항우가 파고들어, 한신과 영포, 팽월을 한나라에 등지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영포와 팽월은 지나치게 “내 편”을 따지며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 항우의 성격을 잘 알았으므로 회유의 가능성이 적었다. 한신만은 초나라에 종속하라는 게 아니라 대등한 관계가 되어 공존하자는 선에서 회유 가능성이 있었고, 항우의 사자가 실제로 그런 뜻을 전했으나, 용병만큼 전략에는 밝지 못했던지, ‘사나이의 의리’인지, 한신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믿어 준 한왕을 배신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사면초가 속에 우희와 결별하다


항우는 한때 형양의 유방을 효과적으로 몰아붙여 그가 기신에 의한 거짓 항복이라는 구차한 술책으로 달아나도록 할 만큼 승세를 잡기도 했으나, 세 개의 전선에서 적을 상대하게 된 이상 좀처럼 통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유방에게 “너와 내가 일기토를 하여 전쟁을 끝장내자”고 제의하기도 하고, 유방의 부모를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기도 했으나 모두 유방에게 기만당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 항우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한신도 영포도 아닌, 팽월이었다. 그는 동쪽에서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항우의 보급선을 곧잘 차단했다. 소하의 풍족한 보급을 누리고 있는 한군에 비해 초군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항우는 직접 팽월을 격파하기로 하고 본거지인 성고를 나섰다. 그러나 그 사이에 유방군의 도발에 넘어간 초군의 조구가 패배, 성고를 점령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온 항우는 한군을 다시 물리쳤지만, 많은 장수와 병력을 잃었으며 그나마 비축해 둔 식량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 한계라고 느낀 항우는 유방 측의 평화협정 제의에 응했고, 홍구를 기준으로 동쪽은 초, 서쪽은 한의 영역이라는 합의문을 인정했다. 그리고 우호의 표시로 인질로 잡아온 유방의 식구를 풀어 주었으나, 유방은 항우군이 말머리를 돌리자마자 추격 명령을 내렸다. 인도적으로는 못할 일이지만,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는 병법에 충실한 결정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력이 많이 줄었으나, 일단 항우가 본거지인 강동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그 전에 결판을 내야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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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하 전투 국면

항우의 정예군은 아직 강했지만, 유방군에 영포, 팽월, 한신군이 합세한 이상 전체적으로 병력 차이가 너무나 났다. 보급 문제도 심각했다. 계속 동남쪽으로 후퇴하던 항우군은 해하에 이르러 한군의 포위에 걸려들었다(이곳이 지금까지 알려진 해하가 아니라 보다 서쪽의 진하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겨우 수십 기의 병력만 남은 항우가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250km나 더 멀리 퇴각했다는 말인데 현실성이 의심된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항우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는데
때가 불리하니 추(騶)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우(虞)야, 우야, 너를 장차 어쩌란 말인가.


경극 [패왕별희]로 유명해질 비장한 장면을 연출한 항우는 다시 이를 악물고 극소수의 병력만 거느린 채 장강으로 말을 달렸다. “한 번 소리치면 한나라 장수들이 바람에 쓸리듯 넘어지는” 장관도 연출했다. 그러나 정작 오강의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의 시체를 얻어 상을 타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몸은 다섯 조각으로 찢겼고, 유방은 다섯 사람에게 항우의 영지를 나눠 분봉해 주었다. 기원전 202년 정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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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를 삶아먹다


유방은 항우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제나라로 “쳐들어가서”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그를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겼다. 한 달쯤 후에는 한나라 황제로 즉위했으며, 기원전 195년까지 팽월, 한신, 영포를 차례로 반역자로 몰아 처형했다. 그리고 그 해에 신하들과 ‘백마의 맹세’를 하며, “유씨 이외의 왕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결국 유방의 승리는 후덕(厚德)의 승리이자, 후흑(厚黑)의 승리이기도 했다. 진나라의 무리했던 통일체제가 무너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6국을 재건해야 한다”는 원칙과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없다”는 인식은 서로 충돌하고 교잡했으며, 그 두 가지를 대충 엮어서 꾸민 것이 항우의 봉건체제였다. 그러나 당연히 불거진 불만을 이용한 유방은 “불공평한 영역 배분을 재편성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악의 원흉인 항우를 처단해야 한다”는 명분을 잘 잡아냈다. 그리고 천하를 사냥개처럼 몰아 항우라는 토끼를 잡은 뒤, 그 천하를 삶아먹었다.

전쟁사적으로 그것은 용맹스러운 소수 전사집단과 그들이 진심으로 승복하는 영웅적 군주라는, 서양에서는 알렉산드로스에서나 아더 왕 이야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 부정되었음을 뜻했다. 대신 군주는 왕궁에 가만히 앉은 채 장수에게 병농일치 체제의 대군을 맡겨 전쟁을 수행하게 하고, 그 장수가 조금만 인기와 힘을 얻으면 숙청해 버리는 동양적 전제체제의 패턴이 정착되었다. 그 패턴은 이후 북방민족 등과의 교류로 가끔 변형되기는 하더라도, 수천 년 동안 중국 군사체제의 기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