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역사] 초-한전쟁 (1) - 항우와 유방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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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 [인물/역사] 초-한전쟁 (1) - 항우와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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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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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입성하는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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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 전쟁 개요

전쟁주체 한(漢) 왕국과 그 동맹국들 vs 서초(西楚)
전쟁시기 기원전 206~기원전 202
전쟁터 중국 화북 지방
주요전투 평성 전투, 유수 전투, 성고 전투, 해하 전투




영웅의 군대와 제왕의 군대

[초한연의](초한지)나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 같은 소설을 보면, 한나라와 초나라의 세기의 쟁패전을 판가름한 것은 다름아닌 양측 최고지휘관의 성격과 인품 차이인 것처럼 보인다. 항우(項羽)는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었으나 오만 때문에 그 유리함이나 전쟁 도중에 얻는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불리해졌을 때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반쯤은 자멸했다. 그러나 대체로 불리했던 유방(劉邦)은 필요하면 적에게 애걸을 해서라도 곤경을 모면했으며, 일단 기회를 얻으면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오만한 항우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인재들을 소홀히 했으며, 유방은 그런 인재들을 끌어들여 점점 힘을 불려서 마지막에 항우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이런 평가는 소설적 상상력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보면, 초-한 전쟁의 최종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유방은 스스로 자신의 승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나는 행정에서는 소하(蕭何)에 못 미치고, 지략에서는 장량(張良)에 못 미치고, 군사지휘에서는 한신(韓信)에 못 미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부릴 수 있었다. 반면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승리한 것이다.” 또한 이에 앞서 한신이 항우에게서 빠져 나와 유방에게 기용되었을 때, 그는 “한왕(유방)의 능력은 대체로 항우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항우는 필부의 용기와 아녀자의 인정을 가진 사람이니, 우두머리가 되어 큰 일을 할 재목이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유방이 이기고 항우가 진 것은 일종의 ‘사필귀정’, 오만하고 덕이 모자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진 것으로 보는 관점이 오랫동안 널리 유행했으며, 두 사람의 인성을 놓고 리더십 이론에서 사례연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사의 관점에서 볼 때, 초-한 전쟁의 승패가 그것만으로 갈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술적인 면과 전략적인 면에서의 차이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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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타고난 능력과 재능은 항우에 비해 떨어졌지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능력으로 결국 승리한다.   

 

당시의 군대는 대부분 병농일치제에 따른 군대였다. 즉 밭을 가는 평범한 농부들을 강제징집하거나, ‘군대에 들어오면 먹을 것을 준다’고 하여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 유랑민 등을 끌어들여 병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국고나 지방 유지의 ‘기부금’, 지휘관의 사재로 마련한 간단한 병기를 지급하고, 기초 훈련만 시킨 다음 전장에 내보낸다. 이처럼 대체로 아마추어의 군대이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의식도 부족한 군대였기에, 전문 전사집단에 비해 병력이 많아도 전투력은 높지 않았으며, 전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군율을 따르게 하고, 책략을 쓰거나 부대 배치를 교묘하게 해서 전력 이상의 효과를 내는 장수를 명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항우의 군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수 병력은 이런 식이었겠지만, 그는 꾸준한 훈련과 단합 정신 고취를 통해 소수정예 병력을 갖추고, 그 병력의 월등히 높은 전투력을 무기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최종전에서 패한 다음 “강동의 팔천 자제와 함께 강을 건너왔거늘 이제 그들이 전멸했으니 혼자서 돌아갈 면목이 없다”고 한탄한 것이나, 초-한 전쟁이나 그에 앞선 진제국과의 항쟁에서 그가 다른 장수의 군대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적진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을 선호한 것을 볼 때 그렇게 추정된다. 이런 정예병력은 군사훈련 못지않게 ‘우리는 하나’라는 단결 의식과 불굴의 투지를 계속해서 주입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항우는 늘 일선에서 앞장서 돌격하며 부하들의 투지를 불태웠고, 최고사령관의 몸으로 직접 벽돌을 나르거나, 다친 병사를 간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등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면서 병사들의 신뢰와 충성을 다지려 했다. 


이런 점은 좋아 보이지만, 반대로 그것은 소수의 분전에만 의존하는 병력운용, 그리고 “우리 편”을 지나치게 철저히 따지는 경향과도 결부된다. 그래서 항우의 막료들을 보면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항우의 친인척, 즉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반면 유방의 막료들은 처음 고향에서 건달 노릇을 하다 만난 사람들을 비롯하여, 천하의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항우가 잔인무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사건으로 항복한 진나라 병사들의 불평불만을 듣고는 그들 20만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사건이 있는데, 20만은 좀 과장으로 보이지만 아무튼 그것은 “병사가 굳이 많을 필요는 없다. 정말 내 수족처럼 믿고 부릴 수 있는 병사만 주위에 남겨야 한다”는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의식은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 말고는 믿지 않으며 포상에도 인색했던 나머지 한때 그를 도왔던 영포(英布)나 팽월(彭越)등이 유방 편으로 돌아섬으로써 끝내 패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반면 유방의 군대는 전형적인 병농일치적 군대, 좋게 말하면 농민군이며 나쁘게 말하면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적어도 초기에는 강제징집보다는 “먹여 주고 돈도 준다”는 선전에 의존해 만든 군대였다. 이런 군대도 사기가 높을 수 있는데, 어쨌든 자기 발로 찾아 든 군대이며, 계속해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면 동기부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욕은 공포감에 미치지 못하며, 한 번 패배하거나 불리해지면 항우의 정예병만큼 죽기로 싸울 턱이 없다. 유방의 주위에는 그를 대신해 목숨을 잃은 기신처럼 충성스러운 사람도 많았던 것 같지만, 그들은 ‘의협’의 정신에 따라 유방을 도운 사람들이었고 눈앞의 이익에 홀려 한나라의 깃발 아래 모여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항우와 유방의 군대가 정면대결을 하면 지는 쪽은 거의 유방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항우가 누렸던 그런 전술적 우위를 전략적 불리함이 압도하면서, 초-한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말하자면 초군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그리스군과 비슷했고(테르모필라이에서 “밥을 든든히 먹어 둬라, 그리고 오늘 저녁은 저승에서 먹자꾸나!”고 외치는 레오니다스의 모습은 “내가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으리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잘못 싸운 게 아님을 증명하리라!”고 해하에서 외치는 항우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한군은 페르시아군과 비슷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결판은 서양과는 정반대로 났다.



 

 난세는 새로운 인물을 낳고


“진시황제는 비루하고 탐욕스러웠다. 자신의 꾀만 믿고 신하들을 믿지 않으며 선비들과 백성들을 모두 따돌렸다. 공명정대한 정치를 폐하고 자기 개인의 권위만 내세웠다. 언론을 통제하고 형벌을 가혹히 했으며, 사술과 무력을 앞세우고 인과 의를 소홀히 여기니 그 통치는 포악하였다.” 한문제 때의 학자 관료, 가의(賈誼)는 [과진론]에서 진나라의 통일과 그 허무한 멸망을 논하며 진나라가 가혹한 정치를 한 결과 모처럼 이룩한 통일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왕조 자체도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은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오늘날도 통설이 되고 있는데, 진나라 때의 죽간 등을 살펴보면 진나라의 법률은 가혹했다기보다 세밀했으며, 오히려 일반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면이 강했다는 최근의 반론도 있다. 아무튼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로 갈라져 지내온 중국 대륙이 하나로 통일된 이상 반발 세력이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움직임을 법제와 무력,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로 눌러 오던 진시황이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이상(기원전 210년), 통일을 깨고 다시 전국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기원전 209년, 제일 먼저 반 진나라의 깃발을 올린 사람은 옛 전국시대 6국의 후예들이 아니라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라는 구호를 외친 평민 출신의 진승(陳勝)이었다. 그는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한동안 진나라를 위협했지만, 몇 달 만에 패망했다. 그것은 진승의 지도력이나 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신분질서가 엄격하던 시대에 이름 없는 평민이 하루아침에 왕이라며 나선 데 대한 불신과 혐오도 한몫 했다. “저 따위가 왕이라고 설치면 나라고 못할 까닭이 있나?” “난 왕을 할 그릇은 못되지. 하지만 적어도 저런 비천한 자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어!” 실제로 진승이 처음 거병했을 때는 장이, 진여 등 옛 6국의 귀족 출신들도 여럿 가담했으나, 곧 등을 돌렸으며 진승은 장한(章邯)이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에 대패한 다음 쓸쓸히 자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진승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옛 6국의 후예다. 이제 진나라의 무도함을 벌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명분을 거는 반란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왕후장상의 씨” 중에는 강동의 회계에서 일어난 항량(項梁)도 있었다. 그는 옛 초나라의 명장으로 최후까지 진나라에 항전했다는 항연의 아들이었다. 항량은 그 점을 내세우며 초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대의를 걸고 회계태수 은통을 죽이고 스스로 회계군수가 된 다음 세력을 크게 키워 6, 7만의 대군을 거느렸다. 그리고 모사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 초나라 왕실의 후예라는 미심(芈心)을 왕으로 받들고(초회왕), 우이를 수도로 삼고, 스스로는 무신군이라는 작위를 가짐으로써 초나라 재건의 면모를 확실히 했다.

항량이 장한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그 조카인 항우가 대신해서 신생 초나라의 병권을 쥐었다. 항우의 본명은 항적(項籍)이며, ‘우(羽)’는 자(字)다. 말하자면 관우의 ‘운장’, 장비의 ‘익덕’ 같은 것인데, 초-한 전쟁 무렵에는 자를 가진 사람이 명문귀족의 후예뿐이었다(유방의 진영을 보면 한나라 귀족 출신인 장량, 즉 장자방을 제외하면 자를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는데 지나칠 정도로 대범하여, 글공부는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된다’고 배우지 않았고, 무예도 ‘한낱 병사의 재주에 불과하다’며 소홀히 했으며, 병법을 가르치자 그때서야 관심을 보였으나 대강만 익히고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고 한다.

항우의 필생의 숙적이 될 운명이던 유방은 항우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패현에서 태어났다. 출신은 천민을 겨우 면한, 보잘것없는 농사꾼 집안이었던 것 같다. ‘방(邦)’이라는 이름은 그가 어느 정도 성공한 뒤 스스로 붙인 것이며, 본래는 ‘유계(劉季)’라고 불렸는데 ‘계’란 넷째 아들 또는 막내라는 뜻으로, 변변한 이름도 없이 “유씨네 막내놈” 정도로 통했다는 이야기다. 그 아버지 이름인 유태공도 “유씨 할아범”, 어머니의 유온도 “유씨 할멈”이라는 뜻밖에 없어, 유방이 얼마나 변변찮은 집안 출신인지 알게 해준다.

유방은 그나마 일도 안 하고 주색잡기로 소일했다고 한다. 나이가 제법 들어 정장이라는 말단 공무원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른바 ‘영양가 없는’ 감투였으며 본질은 여전히 백수건달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까지도 거칠게 살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귀족들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묘한 비범함이 엿보여, 상당한 호족에 속했던 여씨 집안에서 부인을 맞아들였다. 정장으로서 죄수들을 진시황의 능묘 건설 현장으로 인솔하던 도중에 마음이 맞는 몇몇과 달아나서 망탕산에서 산적질을 했으며, 진승의 봉기 소식이 들려오자 패현의 현령을 없애고 현을 장악했다. 이후 한동안 독자적으로 진나라와 싸웠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항량의 군대에 들어가 수천의 병력을 지휘하는 탕군의 장이 되었다. 당시 항우는 장안후라는 작위를 갖고 있었다.




누가 관중에 먼저 들어갈 것인가?


기원전 207년, 초회왕은 조나라를 압박하고 있던 진나라의 주력군, 장한의 군대를 무찌를 책임을 항우에게 맡기고, 유방에게는 진나라 수도 함양의 관문인 함곡관을 공략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시에 “먼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묘하다. 함곡관을 돌파하면 함양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며, 그렇다면 초회왕은 유방에게 관중의 왕을 넘겨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먼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이라는, 어떤 공평한 조건을 걸고 경쟁을 붙이는 투의 선언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유방이 이길 것은 당연한데 말이다. 관중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터전으로 당시 중국 경제력의 6/10을 쥐고 있을 만큼 중요한 땅이다. 그런 땅을 눈 뜨고 뺏기는 일을 항우가 과연 승복했을까?

이를 놓고 여러 학자들이 고민을 해왔으나 정확한 해답은 없다. 어떤 경우에는 관중 왕에 대한 초회왕의 약속은 없었고 나중에 유방을 옹호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라 보지만, 이 약속 이야기가 이후에도 중대한 국면마다 여러 차례 언급됨을 볼 때 약속은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추정이 있다. 주력을 가져간 항우에 비해 유방의 병력은 변변치 않고([사기]에는 “진승과 항량의 패잔병을 긁어모으며 진군했다”고 적혀 있다), 함곡관까지의 길은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항우가 장한을 꺾은 뒤에 뒤따라가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 말하자면 유방군은 일종의 초전 탐색용 부대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유방군은 “함곡관을 공략”하는 임무만 주어졌으며 거기서 항우군 등을 기다렸다가 함께 함곡관을 돌파하고 함양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다른 한 가지다.

이런 추정이 어떻든 실제는 유방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는데, 무서운 속력으로 서쪽으로 진군하여 기원전 207년 10월에 함양에서 얼마 떨어진 패상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자 진나라의 3세 황제 자영은 패상까지 나와 항복했으며, 유방은 유유히 함양에 입성하여 유명한 “약법삼장”을 내놓고, “군사가 조금이라도 백성을 괴롭히면 엄벌한다”고 강조하여 민심을 널리 얻었다. 막 장한군의 항복을 받고 자신도 서쪽으로 진군 중이던 항우는 이를 듣고 분노했으며, 함곡관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던 유방의 병력을 단숨에 무찌르고 관을 돌파했다. 싸워 봐야 승산이 없다고 여긴 유방은 장량을 사신으로 보내 사실상 항우에게 항복했으며, 항우는 함곡관에서 조금 떨어진 홍문에 진을 치고 그곳으로 유방을 불렀다. 이 유명한 “홍문의 연회”에서 범증은 유방을 죽이라고 재촉했으나 항우는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유방은 목숨을 구했다. 이어서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자영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진나라의 명맥을 확실하게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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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항우의 함양 진격로

  

 이런 전개의 이면에는 유방군의 특색이 숨어 있다. 진승군과 항량군의 패잔병이라면 결국 한몫 잡으려 군에 들어갔다가 죽음의 공포에 도망쳤던 건달, 유민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을 흡수하니 일단 병력은 증대하지만, 이들을 만족시켜 주려면 성읍을 하나 점령할 때마다 약탈을 자행하여 전리품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고 있노라면 시간이 지연되고, 관중에 빨리 도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방은 “절대 약탈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테니 길만 열어 달라”고 마주치는 성읍마다 교섭했던 것 같다. [사기]에는 유방의 덕망과 역이기의 책략으로 싸우지 않고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 식으로 교전을 피하며 계속 진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실망한 병사들이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강한 군사력은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함양에 도착했을 때는 사실 병력이 불충분했지만, 이미 장한군이 항우에게 항복했음을 알고 있던 자영은 항전을 포기하고 유방을 맞아들였다. 그 대신 그 동안 거쳐온 성읍들에서처럼 약탈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을 것이다. 유방은 관중에서 병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이었지만 항우군은 예상보다 빨리 쫓아왔으며, 당연히 항우군을 물리칠 힘은 없었으므로 유방은 항우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초패왕의 신봉건 체제


그러면 왜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서 죽이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진나라 멸망 후에 대한 항우의 구상이 얽혀 있다. 본래 반 진나라 항쟁의 명분은 예전 전국 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항우도 그런 명분에 따라 초회왕을 옹립했다. 하지만 정말로 옛 왕조들이 복원된다면 ‘초왕의 신하’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별로 남는 게 없다. 또한 옛 왕실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전공은 뛰어났던 영포, 한광 등의 반발도 거셀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황제로 나선다면 반 진나라 항쟁의 명분이 단숨에 사라질 뿐 아니라 여러 제후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항쟁을 마무리한 지금은 여러 나라가 분립된 봉건체제를 재현하되, 보잘것없는 출신에게도 전공에 따라 왕의 자리를 줄 필요가 있었다.

항우는 이를 기원전 206년 정월에 시행했다. 초회왕은 ‘의제(義帝)’라 하여 명목상의 황제로 높이고, 영포는 구강에, 유방은 한왕이라 하여 서촉에 봉하고 진나라 땅은 셋으로 나누어 항복한 장한과 사마흔, 동예에게 주었으며 제나라, 연나라, 위나라, 조나라, 한(韓)나라는 각각 두셋씩 나눠서 일부는 옛 왕실의 후예에게, 일부는 군공이 있는 장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초나라 서부와 조, 한, 위의 일부를 포괄하는 땅을 다스리는 ‘서초패왕’이 되었다. ‘패(覇)’는 춘추시대에 주나라 왕이 힘이 약한 상황에서 강력한 제후국이 대신 천하를 안정시킨다며 내세운 개념이었다. 이제 항우가 의제를 위해 천하를 안정시킬 것이고, 다만 제후보다 한 단계 위인 왕이므로 ‘패왕’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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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분봉체제

 
이처럼 일단은 의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그가 관중의 왕을 삼기로 약속한 셈인 유방을 섣불리 해치울 수 없었고, 구왕실 출신자와 비출신자의 균형을 맞춘다는 방침도 있었으므로 더더욱 손을 대기 꺼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주저함은 결국 항우 자신의 파멸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런 화근은 명분과 실리를 대충 짜맞춰서 만들어 놓은 그의 신 봉건체제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