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불가능 - 파르메니데스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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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불가능 -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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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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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150Km정도를 내려가면 바다가 보이는 구릉 위에 고대의 유적지가 남아있는 작은 마을 벨리아(Velia)가 나타난다. 이제 시간의 화살을 되돌려 벨리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540년 경 세워진 그리스의 식민지 엘레아(Elea)가 보인다. 여기가 바로 기원전 515년 경 파르메니데스가 태어난 곳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철학의 제1주제는 ‘변화’였다. 변화가 철학의 주제로 등장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계절과 자연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을 이루는 생노병사(生老病死) 모두가 변화에 속하며 삶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종교, 신화, 철학이 나름대로 이 어려운 질문에 답을 제공해 왔다. 심지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하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에 뛰어들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변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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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변화의 주체가 없어도, 또 있어도 문제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일단 변화의 주체가 없다면 변화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유가 변질되었다.” “철수야, 너 많이 변했다!” 등 변화의 주체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때 변화란 한편으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의 주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변화의 주체는 상이성과 동질성의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이 점은 금방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시점 t0의 철수가 시점 t1에서 다른 상태가 되었을 경우, 누가 변화의 주체일까? 만일 두 시점의 ‘철수들’을 서로 다른 존재라고 볼 때 변화를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동화나 신화 속이 아니라면 ‘곰이 여자로 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변화의 주체가 두 시점의 철수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면, 변화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 또 변했다는, 이른바 이중변화의 문제가 발생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의 주체가 갖는 이중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통찰하였다. 여기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와는 정반대로 “변화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지중해 철학에 새로운 전기를 불러왔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논증을 통해 변화를 부정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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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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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로는 서기 6세기경에 활동했던 신플라톤주의자 심플리키우스(Simplicius)의 저작에 인용되어 단편(斷片)으로 남은 철학시 [자연에 대하여 peri physeos]가 전해지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시에서 두 종류의 탐구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진리(aletheia)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의견(doxa)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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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소멸하지 않는 하나의 연속적 전체라고 주장했다.

이제 변화의 가능성 여부를 놓고 이 두 개의 길이 어떻게 갈라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파르메니데스는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생각할 수도, 지시할 수도, 알 수도, 말해질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실행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도깨비나 전설의 동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사물에 대하여 그림이나 영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진의 경우 없는 대상을 찍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사진이나 지도 등과 같은 그림으로는 그 어떤 부정적 묘사, 즉 부정문이 불가능하다.
이제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만일 어떤 대상 A가 B로부터 생성되었다면, B는 존재하든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다. 우선 B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B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알 수도 없으므로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음으로 B가 존재하는 경우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B와 A 사이에 간격, 즉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사실상 A가 무(無)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그것은 이미 논박 되었다. 둘째, B와 A가 붙어 있을 경우 B와 A를 구별할 이유가 없다. 즉 B와 A는 하나의 존재이며 이 경우 “A가 자기 스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역시 부정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생성된다는 생성의 주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어떤 경우에도 생성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논증은 소멸의 경우와 나아가 모든 상태변화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결국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 나누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있지도 않고, 더 적게 있지도 않은 하나의 연속적인 전체”라고 결론 내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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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리의 길’과 단순한 ‘의견의 길’이 갈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성과 소멸을 믿는,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사람(可死者)’이라고 파르메니데스가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음’을 탐구의 길에 도입하여 ‘있음’과 뒤섞은 데에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도 통용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생성되기 전의 상태를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소멸된 후의 상태도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만 생성과 소멸을 주장할 수 있고, 동시에 ‘생성’과 ‘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음과 없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의미 깊은 논증의 한 전형을 보고 있다.
결국 ‘의견의 길’을 떠나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생성, 소멸, 변화 등 존재와 관련된 여러 개념에 대한 명석한 논리적 분석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뒤섞지 않는 데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지중해의 푸른색과 해안의 흰 색이 선명히 나누어지듯 명석한 이성적 판단은 놀랍게도 변화의 주체를 엘레아의 하늘로 증발시켜 버렸다. 바꿔 말해, 철학자들이 시간과 공간에 연장(延長)된 존재, 즉 지금 여기에, 그러나 나중에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연속적으로 지속된다고 간주되는 개체(個體), 예를 들어 나와 너, 이 나무와 저 나무가 서로 독립적 존재라는 생각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기서 이성에 의한 진리의 길이 그 투명한 논리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상식적 세계와 도저히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한 충돌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상식의 세계에서 너와 나, 이 나무와 저 나무는 태어나고 자라고 머물다 사라지는 그런 개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는 이 견디기 어려운 진리와 의견 간의 넘을 수 없는 깊은 심연을 거꾸로 본격적인 존재론, 즉 형이상학의 시발점으로 간주해 왔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통한 경험 세계와 이성의 빛을 통한 실재 세계와의 간격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경험세계 저편에 존재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란 파르메니데스의 생성도 소멸도 없는 완벽한 일자(一者)에서 일자를 떼어내고 다자(多者)로 나눈 후, 그것을 사물들의 원형(原形)으로 간주한 일종의 ‘파르메니데스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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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는 서로 나누어진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나와 너는 존재한다. 이 역설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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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번역·출간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책에서 번역자들은 플라톤을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에, 파르메니데스를 K2에 비유하였다. 즉 에베레스트보다 K2가 더 난이도가 높듯이 플라톤보다 파르메니데스를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우리의 상식에 너무나 반대되어 이 일자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차도 분명하지 않다. 바로 그런 이유로 철학사가들은 파르메니데스가 실재하는 진리의 세계와 경험을 통한 의견의 세계 간에 간극을 설정하는 ‘심오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심오한 해석이 혹시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지시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있는 것은 지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시한다는 것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거나 듣거나 감촉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지시의 대상은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 가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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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은 운동이라는 변화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다.

바꿔 말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경험 저 편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계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는 눈앞의 세계인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제자였던 제논의 역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달리기가 경험을 초월하는 세계에서 벌어진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것은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날아다닌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꿔 말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가 역설로 간주되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 엘레아의 법을 만든 존경받는 시민 파르메니데스가 법을 지킬 경우와 지키지 않을 경우 어떤 차이, 즉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지 몰랐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또 엘레아의 폭군을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이 ‘암살’이 어떤 변화를 갖고 오는지 몰랐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가 K2처럼 난이도 높은 철학자인 것은 실재와 경험 간의 간극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매순간 변화를 경험하는 바로 이 세계에서 변화의 불가능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논리적으로 부정하던지, 아니면 그 일자를 경험세계와 화해시키던지 양자택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떤 길이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