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진리의 길’과 단순한 ‘의견의 길’이 갈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성과 소멸을 믿는,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사람(可死者)’이라고 파르메니데스가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음’을 탐구의 길에 도입하여 ‘있음’과 뒤섞은 데에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도 통용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생성되기 전의 상태를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소멸된 후의 상태도 ‘없음’이 아님에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만 생성과 소멸을 주장할 수 있고, 동시에 ‘생성’과 ‘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음과 없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의미 깊은 논증의 한 전형을 보고 있다.
결국 ‘의견의 길’을 떠나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생성, 소멸, 변화 등 존재와 관련된 여러 개념에 대한 명석한 논리적 분석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뒤섞지 않는 데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지중해의 푸른색과 해안의 흰 색이 선명히 나누어지듯 명석한 이성적 판단은 놀랍게도 변화의 주체를 엘레아의 하늘로 증발시켜 버렸다. 바꿔 말해, 철학자들이 시간과 공간에 연장(延長)된 존재, 즉 지금 여기에, 그러나 나중에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연속적으로 지속된다고 간주되는 개체(個體), 예를 들어 나와 너, 이 나무와 저 나무가 서로 독립적 존재라는 생각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