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 무(無)는 존재하는가?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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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 무(無)는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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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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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차라리 무(無)가 아닌가?” 또는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라이프니츠가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라는 짧은 논문에서 잠깐 지나가면서 던진 이 질문을 하이데거는 철학의 근본 질문이라 평하였다. 이 질문은 ‘존재’와 더불어 ‘무’를 겨냥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당연하며, 존재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 가운데 특히 철학은 존재하는 만물의 원천(근거)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가? 철학자들의 이 질문에서 ‘왜’라는 표현이 바로 만물의 원천, 근거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떻게 ‘무’는 질문의 대상으로 떠오를 수 있는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사유할 수 없다고 말했듯 ‘무’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질문이 ‘무’에 가 닿는 순간 그것은 ‘어떤 것(즉, 있는 것)’처럼 다루어지며, 무가 어떤 방식으로든―관념이든 현실적 사물이든―있는 것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에 대한 사유의 바깥으로 무를 몰아내는 순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미 무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을 사유하는 일은 무를 사유하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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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존재와 무’는 사르트르의 널리 알려진 책의 제목이기 이전에,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철학자들은 ‘존재와 무’의 문제에 지금까지 어떻게 접근해 왔을까?
플라톤은 존재와 무에 대해 최초로 의미 있는 답변을 내놓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피스테스]라는 글에서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있지 않은 것들은 적어도 어떻게든 있어야 한다.” 플라톤이 이런 놀라운 주장을 하게 된 사연은 무엇인가? 플라톤이 보기에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진정한 철학자와 달리 거짓판단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은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존재하지 않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함으로써 거짓말쟁이가 된 양치기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따라서 거짓말은 앞서 소개한 파르메니데스의 말대로 사유의 대상이 아니어야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앞에 늘 거짓말이 있지 않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면, 거짓말 같은 존재하지 않는 것, 바로 무에 대한 진술을 단죄하거나 비판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 고충을 플라톤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거짓말이나 거짓 판단이 실제로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또한 어떻게든 이것을 발설할 때 모순에 빠지지 않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 모순을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해결한다. “있지 않은 것들은 적어도 어떻게든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있는 것’과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상이한 것, heteron)만을 말하는 듯하다.” 즉 모범적이고 올바른 것의 타자, 참다운 존재의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 또는 비존재이다. 이렇게 보자면 무는 존재의 논리적 부정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한 ‘실존적 규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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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에 대해 최초로 의미 있는 답변을 했던 철학자
플라톤.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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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존재'와 '무'를 동일한 것으로 본 헤겔.
<출처: wikipedia>

근대의 헤겔은 무가 존재와 대립하는 것인 동시에 존재의 근본 구성에 속하는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인 ‘운동’과 ‘생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힌 인물이다. 존재와 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논리학]의 초두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동일한 것이다.” 먼저 순수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존재가 실체, 양, 질, 관계 등등 모든 범주적 규정으로부터 독립된 채로 고려되었을 때, 어떤 규정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존재는 순수하다고 불린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것에 대해 인식하고 진술할 때 우리는 늘 범주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그것은 따뜻하다, 크다 등등). 따라서 범주로부터 벗어난 순수 존재는 아무런 규정도 가지지 않으며 그에 대한 인식도 진술도 불가능한 공허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한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놀랍게도 “순수한 존재는 무(無)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한 것이다. 또는 존재는 존재이자마자 무가 된다. “존재와 무의 진리는 한 쪽이 다른 쪽으로 즉시 소실되는 운동이다.” 존재와 무는 모순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하나이며, 바로 이렇기에 존재에서 무로의 소실,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이라는 원리가 가능해진다. 요컨대 존재와 무가 모순되는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기에 태어나 죽고 또 태어나는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헤겔에게서도 무는 존재의 근본 의미에 속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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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은 20세기 초 중반에 하이데거의 사유와 더불어 존재와 무의 문제에 한동안 열성적으로 몰두하였는데, 이 몰두를 우리는 아주 넓게 ‘실존주의’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차라리 무(無)가 아닌가? 하이데거는 이 글 초두에 던졌던 라이프니츠의 이 질문과 더불어 존재와 무에 대한 사유를 진행한다. 저 물음의 앞부분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가’는 질문으로서 아무런 어려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존재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근원에 대해 묻는 것은, 존재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진행해 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근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왜 무가 아닌가’라는, 질문의 뒷부분은 사족에 불과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차라리 왜 무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존재함의 근본에는, 존재함이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질문이다. “존재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오고, 이와 같은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알려오는 것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에게 라이프니츠의 저 질문을 던져보라. ‘왜 나는 태어났나?’, ‘왜 존재하게 되었나?’ 라는 질문은 필연적인 사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신의 아들처럼 필연적으로 태어난 인간이란 없는 것이며, 모든 존재함이란 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존재에 속한다.

따라서 “무는 오히려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속해 있다.” 무가 존재자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허무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며 주입된 호기심이나 잡담에 이끌려 찾게 되는 삶의 공허한 가치나 목적들을 넘어서, 우리의 본래적인 존재함의 모습에 스스로 다가가 보아야 한다는, 적극적 행동에의 요구를 담고 있다(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이 무는 ‘불안’이라는 특수한 정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또 다른 흥미로운 논의는 이 자리에선 접어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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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주제를 자신의 저작의 제목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사르트르에게서 존재와 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리하게나마 도식을 간단히 제시해 보자. 의식=자유=무. 사르트르는 ‘의식’의 철학자라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후설의 전통에 놓여 있으며, 이 의식의 ‘부정하는 힘’의 근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지대한 영향 아래 놓여 있고, ‘정해진 본질’이 부재하는 존재의 철학자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를 선배로 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무’ 개념은 이 세 가지 측면을 종합한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은 항상 하나의 무 때문에 자기의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위해 자신을 되돌아본다고 하자. 분명히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가치관을 지녔던 사람임을 반성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존재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런 반성을 수행하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반성되고 있는 존재는 이미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과거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을 관조하고 반성한다는 점은 이미 우리 의식이 이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의식은 이 존재가 현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모든 존재와 거리를 두는 힘이라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존재도 이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이 의식 자체는 아니므로, 이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닌 것, 바로 무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본질에 충실한 존재가 아니므로 전적인 자유라고만 불릴 뿐이다. 이 자유 때문에 우리는 고정된 존재에 머무르는 법 없이, 늘 그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미래의 존재를 향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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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의 저자인 사르트르.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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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는 존재에 대한 사유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존재론의 일부이다. 잠깐만 언급하자면, 무(nothingness)를 no-thing-ness, 즉 정체성을 지닌 존재자 혹은 사물(thing)이 없는(no) 상태로 이해하고 이로부터 존재자들이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설명하고자한 레비나스의 경우도 이런 문맥에서 풍부한 철학적 성과를 낳고 있다.

결국 철학은 고대 이래로 줄곧 ‘무’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다. 그 빌미는 역설적이게도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 역시 모순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아닌 ‘무’를 어떤 것을 취급하는 사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후, 존재의 참다운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바로 ‘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다. 존재의 정체는 바로 ‘무’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