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아랍전쟁(1) - 문명의 충돌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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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아랍전쟁(1) - 문명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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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라우를 굴복시키는 헤라클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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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이야 왕조 최대 영역 (750 AD)

동로마-아랍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동로마 vs 라시둔 조
2단계: 동로마 vs 움마이야 왕조
전쟁시기
AD 634 - AD 740
전쟁터
현재 이라크,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부, 터키, 콘스탄티노플
주요전투
야르무크, 알렉산드리아, 1차 콘스탄티노플, 2차 콘스탄티노플, 아크로이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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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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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야만족’인 오도아케르에게 밀려 황위를 포기한다. 이를 보통 로마 멸망의 해로 보고 있지만 476년은 ‘서’로마제국 멸망의 해일 뿐이다.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금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재건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한 후 제국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진 후였다. 이미 서로마의 수도도 사실상 라베나로 옮겨진 후였고 로마는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접수하기 전에 이미 쇠락한 상태여서 수도로써의 기능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그 넓은 영토를 상실한 서로마 정부는 이탈리아 반도의 농민들을 쥐어짰고 정부의 수탈에 넌덜머리를 내던 이탈리아 농민들은 야만족의 군대가 이탈리아에 들어올 때 로마를 위하여 싸우지 않고 오히려 무거운 세금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며 야만족 군대를 반겼다.
서로마는 멸망하였고 그 땅은 로마인들이 과거에 야만인들로 불리던 고트족, 프랑크족 등에게 넘어갔지만 동로마는 제국 동쪽의 교역망에서 나오는 부(富)를 거머쥐고 번영을 누렸다. 6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합작하여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일부 되찾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는 의심 많은 황제 밑에서 벨리사리우스가 악전고투하면서 얻어낸 결과였고 유스티니우스와 벨리사리우스 사후에 동로마는 되찾은 영토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야만인’들에게 넘어갔다.
동로마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제국의 동쪽에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존재가 너무 컸다. 로마제국이 통일되어있던 3세기부터 로마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서로마가 무너지고 동로마가 홀로서기를 하면서 최대의 적으로 등장하였다. 7세기 초에는 사산조의 샤한-샤(왕중왕)인 호스라우와 장군 샤르바라즈와 샤힌의 침공으로 시리아와 아나톨리아(터키) 대부분을 잃고 일시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등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624~627년에 걸쳐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흑해의 동쪽 끝에 상륙하여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기습공격하였다. 동로마군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세티폰으로 가는 길목인 니네베에서 페르시아군과 격돌하였고 헤라클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장군 라자데와 일대일로 싸워 그 목을 베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다스타기르드에 있는 페르시아의 왕궁을 불태우고 크세티폰 바로 앞까지 진격하였다. 이로서 페르시아 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호스라우는 급히 후퇴를 하는 중 왕자인 카바드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와중에 암살되었다. 카바드는 서둘러 동로마와 평화협정을 맺고 페르시아가 점령한 땅으로부터 물러났다. 헤라클리우스의 동로마군은 팔레스타인을 다시 점령하고 예수가 매달렸다는 십자가(True Cross)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셨다.
헤라클리우스의 재위 시에 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어가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한 제국이 나뉘어지기 전에도 그리스어는 로마제국 동부의 상용어(常用語)가 되어있었다. 공식언어는 라틴이었지만 헬레니즘 시절부터 그리스가 지중해 연안을 따라 퍼진지 오래여서 로마의 점령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일종의 동경심을 가지고 있어 그리스어 사용에 대한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더 이상 라틴어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고 이미 제국 신민들의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쓰는 상태에서 헤라클리우스는 다만 이를 공식화시킨 것뿐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의 승리로 인하여 비롯된 일시적인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떠돌이 유목민족에 불과하던 아랍인들이 ‘선지자’라 불리우는 모하메드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기치아래 통일되어 무서운 기세로 아라비아 반도를 뛰쳐나온 것이다.
유랑민족에서 정복민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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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개념으로써의 아랍인은 이미 BC 9세기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부터 드러난다. 아시리아왕 샬마네세르 3세의 치적을 기념하는 석부조(石浮彫)에 낙타를 타고 아시리아 기병과 싸우는 아랍 전사들이 등장한다. 이후 지금의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에서 케다르, 나바테아 등의 왕국을 세우며 무역으로 번성하지만 일부는 로마에 복속되고 그 땅은 ‘아라비아’ 속주가 되었다. 나머지는 페르시아의 백성으로 살거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역과 유목을 하면서 살아갔다.
근근이 살아가던 아랍민족이 크나큰 전환점을 만나게 된 것은 7세기초, 선지자 모하메드가 산 위에서 수도하던 중 천사인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신에게의 ‘복종’이란 뜻의 이슬람을 창시하면서부터이다. 모하메드가 아라비아 반도에 적극적인 포교를 하면서 다신관(多神觀)에 기반한 종교를 받들던 아랍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아울러 메카나 메디나 등의 주요 무역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나 유대교도 이슬람의 확장을 경계하고 박해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의 신관(神觀)과 교리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고 일부의 교리는 수용되었다. 사실 이슬람의 초기 개종자들은 거의 메디나 출신이었는데 당시 메디나에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메디나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을 자주 접하면서 일신교(一神敎)의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모하메드가 주장하는 이슬람은 다신교를 통하여 복을 빌고 아울러 이를 통하여 상행위를 하는 세력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검은 돌’인 카바가 있어 아라비아 다신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메카의 세력들은 이슬람의 초기 개종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에도 이슬람을 믿고 ‘모슬렘’이 되는 자들은 나날이 늘어갔다. 새로이 모슬렘이 된 자들은 대개 주변의 강대한 부족들에게 핍박을 받던 약한 부족 출신이었다. 한 번 메카 세력의 공격으로 피신하게 되지만 모하메드는 한 발 물러나 세력을 더욱 크게 키웠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세력들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대상(隊商)행렬을 공격하여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그들과의 전쟁을 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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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고 있는 모하메드(그리고리 가가린 作).
모하메드는 바드르와 메디나 수비전 등의 전투로 메카세력을 완전히 무찌른 뒤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연합세력을 격파한 후 세상을 떠났다. 이슬람교도들은 모하메드의 장인을 칼리파(계승자)로 받들고 라시둔 조(朝)를 세운 후, ‘성전(지하드)을 통일하여 세상의 넓은 땅을 다르-알-이슬람(복종의 땅)으로 만들라’는 모하메드의 유시를 받들어 아라비아 반도를 뛰쳐나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멸망과 동로마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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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신흥종교의 교리 아래 통일된 아랍인들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아랍군의 선두에는 아랍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 받는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있었다. 먼저 페르시아가 이슬람 아랍군의 제물이 되었다. 사산조는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역공에 크게 패한 후 비록 휴전을 하기는 하였으나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어 지방의 영주들이 제국의 궤도로부터 빠르게 이탈하고 있었다. 모하메드의 사후 불과 1년후인 633년에 지금의 쿠웨이트인 살라시르에서 약 2만의 군으로 두 배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후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히라와 무자야 등지에서 연이어 페르시아군을 이겼다. 이슬람의 급격한 팽창에 놀란 동로마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와 동맹군을 결성하여 이라크 중북부의 피라즈에서 아랍군과 맞섰으나 알-왈리드의 포위작전에 연합군은 궤멸당하고 피라즈는 아랍군에 점령되었다. 비록 페르시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전에 642년에 알-왈리드가 사망하기는 하였으나 알-왈리드가 죽은 직후 아랍군은 현재 이란의 하마단시(市)인 나하반드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모은 5만군을 완파하였다. 이로서 페르시아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전에 사산조의 영토였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부가 라시둔 조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동로마라고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와 동로마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에 아랍군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동로마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634년에 동로마의 영토였던 시리아의 타드무르(팔미라)를 점령한 후 중요 요새이던 보스라와 고도(古都)인 다마스쿠스 역시 아랍군의 손에 떨어졌다. 헤라클리우스의 활약으로 확보한 시리아를 잃을 위기에 처한 동로마는 약 10만의 대군을 모아 아랍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동로마인들은 물론 그루지아인, 아랍 기독교도, 슬라브족에다 프랑크족 용병,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불러모은 대군이었다. 동로마군은 약 알-왈리드가 이끄는 4만의 이슬람군과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 북부를 형성하는 야르무크 강가에서 격돌하였다. 동로마군의 보병은 초전에서는 아랍군의 측방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그때마다 적시(適時)에 투입되는 이슬람 기병의 활약으로 초전의 기세를 잃고 진퇴를 반복하였다. 6일간 이어진 전투의 마지막 날, 아랍군 사령관인 알-왈리드는 동로마의 기병을 격파하여 주력인 보병을 고립시키려 하였고, 기병을 최대한 모은 다음 보병대의 옆을 돌아 동로마 중기병이 대형을 미처 이루기 전에 공격하였다. 동로마 중기병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고립된 보병들은 강 옆으로 이어진 협곡을 따라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적의 패주로를 예상한 알-왈리드의 함정이었다. 알-왈리드는 이미 일단의 기병대를 협곡에 배치하여 동로마군의 도주를 막았고 완전히 포위된 동로마군은 철저히 짓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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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에 있는 카바의 전경 (188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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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에 있는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의 묘
야르무크 전투의 결과로 동로마군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어 637년에 알-왈리드가 이끄는 아랍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기독교도들의 관점에서는 성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동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상실하면서 소위 성지를 되찾는 것은 이후 모든 기독교 국가의 목표가 되었고 수세기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아울러 아랍군이 북아프리카의 동로마 영토를 접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집트방향으로 향한 아랍군은 헬리오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는 동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에 건립한 후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존재하였던 알렉산드리아 역시 641년에 아랍군에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동로마 정부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고 있었는데 아랍-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 정부는 심한 재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는 무역기지일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시절부터 제국을 먹여 살리던 곡창지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집트를 아랍군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는 식량보급기지도 잃어버린 셈이 되었고 동로마는 이집트 실함으로부터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645년에 동로마군은 상륙작전으로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기는 하였지만 이듬해에 아랍군에 다시 점령당하였고 647년에는 튀니지 지역마저 점령당하면서 카르타고 항구를 제외하고는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동로마군의 패배는 아랍군에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로마가 당시 근동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정교(正敎)의 교리를 강제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로마의 종교적 독재와 지나친 세금에 시달리던 근동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용인해줄뿐더러 세금도 동로마보다 낮은 이슬람의 통치를 선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이후 수세기 동안 반복되어 나타난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과 테마 제도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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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둔 조가 팽창을 하는 와중에 이슬람 제국 내에선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이끈 깔리프(최고 종교지도자) 우마르가 644년에 페르시아인 포로에게 암살당하면서 움마이야 가문의 오트만이 깔리프로 등극한다. 656년에 이집트에서 라시둔조의 총독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이집트의 반란군은 일종의 자치권을 획득한다. 반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메디나로 암살단을 보내어 오트만을 암살하게 된다. 오트만이 암살된 후 알리가 깔리프가 되지만 알리는 일부 세력에 의하여 오트만의 암살을 사주하였거나 사실상 묵인하였다고 의심을 받게 되고 이에 656년에 라시둔 조는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알리는 모하메드의 부인 중 한명인 아이샤가 이끄는 파벌을 무찌르지만 모하메드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무아위야가 이끄는 다른 파벌의 도전을 받는다. 알리는 659년에 무아위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무아위야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를 본 시리아의 일부 파벌들이 무아위야를 새로운 깔리프로 추대하였고 일시적으로 라시둔조는 두 개의 파벌이 있게 된다. 그러다가 661년에 알리가 암살당하고 무아위야가 깔리프가 되면서 추대로 깔리프를 선출하던 라시둔 조의 계승방식을 바꾸어 친족간 계승으로 바꾸어버린다. 추대에 의한 종교지도자 대신 계승에 의한 실질적인 왕이 이슬람 제국을 다스게 된 것이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이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수염왕’ 콘스탄투스 2세가 이전의 용병 위주의 군제를 고쳐 이후 동로마 제국의 근간이 되는 ‘테마’ 제도를 도입하였다. 국가가 장원을 설립하여 병사들에게 내어주고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대신 전쟁 시에는 자신들이 있는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떠나 원정을 하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용병제도에 비하여 보다 안정적인 군사동원을 가능케 하였다. 일단 병사들이 자신들이 일구고 있는 땅을 지키려고 용병들보다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정착이 되기 전에 움마이야 왕조의 새 깔리프인 무아위야는 해군을 발진시켜 동로마 해군을 수 차례 무찌른 후 아들 야디즈의 지휘하에 대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동로마-아랍 전쟁의 정점을 이루게 되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