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클렘페러 - 지휘자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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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클렘페러 -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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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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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뿔테안경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초창기에는 빠른 템포로 지휘하고 급진적인 현대들도 무대에 올렸지만, 우리에게 기억되는 클렘페러의 음악은 엄격하고 유장한 템포로 서둘지 않고 음악의 모든 요소들을 음미하게끔 견고한 구조에 담아낸 만년의 녹음들이다. 그가 해석한 독일 고전과 낭만음악은 늘 각별한 가치를 띠고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이후, 즉 1950년대 중반 이후 만년의 녹음을 들어보면 클렘페러의 음악세계는 앙상블이나 음색, 감정표현 등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 느리고 엄격한 템포로 악곡의 형식과 느낌을 구축하는 스타일이다. 중음역이 두텁게 도드라진 클렘페러 사운드는 어떻게 보면 인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확대경을 들이댄 듯 또렷이 들리는 지저귀는 목관과 총주에서 밀어붙이는 금관악기의 활약은 엄격한 형식의 큰 캔버스 안에서 대비와 대조를 거듭하며 생명력을 얻는다. 스케일 큰 음악. 그가 ‘지휘대의 거인’이라 불렸던 건 단지 198cm의 키 때문만이 아니었다. 온갖 역경을 겪었음에도 그 때마다 일어섰기에, ‘지휘대의 불사조’라는 그의 별명이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말러의 추천이 길을 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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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클렘페러(1885년 5월 14일~1975년 7월 6일)는 중부 유럽 실레지아 지방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당시는 독일 영토였다.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한 클렘페러는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한스 피츠너를 사사했다. 1905년 클렘페러는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중 무대 밖에 위치한 금관악기군을 지휘하다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조우했다.
클렘페러는 말러의 음악세계에 깊이 경도돼 있었고 말러 [교향곡 2번] 스코어를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이 스코어를 보고 감탄한 말러는 선뜻 추천서를 써 주었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 구스타프 말러는 오토 클렘페러씨를 추천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뛰어난 음악가이고, 지휘자로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음악감독으로서의 직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저는 클렘페러씨에 관한 질문에 대해 무엇이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시 말러는 빈 궁정오페라(지금의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었으며, 명성과 영향력이 높았다. 이러한 말러의 추천으로 클렘페러는 프라하에서 독일 오페라 담당 지휘자가 되었다. 클렘페러는 자신을 추천하는 말러의 메시지가 담긴 작은 카드를 평생 동안 간직했다고 한다. 그 뒤 1910년, 클렘페러는 말러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의 초연 무대를 함께 준비하며 말러를 도왔다. 그런데 말러의 도움을 받고 그에게 배운 클렘페러가 말러 교향곡 전곡을 남기지 않은 것(2, 4, 7, 9, ‘대지의노래’를 녹음했다)은 좀 이상하다. 물론 클렘페러에게 말러의 작품은 매우 중요한 레퍼토리였지만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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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모습
그 예를 보자. 클렘페러는 말러 [교향곡 1번]같은 경우는 “4악장(마지막 악장)이 너무 현란한 목소리로 바뀐다”고 했는가 하면 [교향곡 5번]에서는 “3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길다”고 비판했고,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마치 살롱 음악 같다”고 꼬집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클렘페러의 말러 연주는 말러 직계 제자였던 브루노 발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었다. 클렘페러가 해석하는 말러 연주의 성격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해석은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말러적이지 않다. 그는 늘 냉정할 정도로 복잡한 감정 표현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고전적인 양식의 범주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진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을 추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클렘페러의 남긴 말러 연주는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프리츠 분덜리히 등 명가수를 맞이해 녹음한 [대지의 노래]는 페리어와 파착을 기용한 발터의 음반과 더불어 이 작품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취적이었던 독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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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러 덕을 본 젊은 시절의 클렘페러로 이야기를 돌리자. 그의 지휘봉을 원한 곳은 많았다. 함부르크(1910~1912)와 바르멘(1912~1913), 스트라스부르 오페라(1914~1917), 쾰른 오페라(1917~1924), 그리고 비스바덴 슈타츠오퍼(1924~1927)에서 일이 끊이지 않았다. 쾰른 오페라 시절이었던 1919년, 쾰른 극장의 오페라 가수 요한나 가이슬러와 결혼한 클렘페러는 1921년에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며 베를린에서도 널리 호평을 받았고 1927년에는 운터 덴 린덴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제공하는 크롤 오페라 극장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클렘페러의 명성은 만년에 EMI와의 녹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대기만성형 지휘자’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독일 시절부터 이미 고전음악뿐 아니라 동시대의 음악에 대해서도 뛰어난 해석을 선보인 지휘자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자체 예산이 없고 인원도 제한된 상황에서, 무명의 곡목과 동시대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공연했다. 단 12음 기법에 의한 무조음악은 제외되었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클렘페러가 공연한 곡들을 보면 레오슈 야나체크의 [죽은 자의 집으로부터]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기대 Erwartung],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렉스], 파울 힌데미트의 [카르디야크 Cardillac] 등 다수의 동시대 음악 초연이 포함돼 있었다.

현대음악의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명성을 높인 그는 유명한 곡에 대해서도 새로운 현대적인 연출을 시도하는 등 과감한 시도로 많은 호평과 반발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특히 바그너 오페라를 상연했을 때는 나중에 빌란트 바그너가 확립한 ‘신바이로이트양식’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감행해 많은 바그너 숭배자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크롤 오페라 시절 독일 경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독일 복고주의가 대두되었고, 유대인이었던 48세의 클렘페러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원래 클렘페러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었으나 만년에는 유대교 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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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지휘할 당시 1930년의 클렘페러 초상 <출처: wikipedia>
불운했던 미국 시대 – 몸의 부분적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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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클렘페러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A 필)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고, 1937년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LA에서 그는 나중에 클렘페러 음악세계의 핵심이 되는 정통 독일 레퍼토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베토벤, 브람스, 말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현대음악도 연주도 계속했다. 함께 LA에 거주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을 LA 필과 초연하기도 했다. 클렘페러의 지휘 아래 LA필의 실력은 급성장했다. 이 시기 클렘페러는 피츠버그 심포니등 다른 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영국과 호주를 비롯해 여러 나라를 연주여행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리더십에 잘 반응하는 연주를 펼쳤지만, 클렘페러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심각한 조울증이 반복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조증과 울증의 극과 극을 오가는 괴로운 나날들이 계속됐다.

1939년 할리우드 볼에서 LA 필의 여름 시즌을 마치고 보스턴의 병원을 방문해서 건강검진을 받은 클렘페러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이것은 잘못된 진단이었다. 이후 뇌수술을 받은 클렘페러의 몸은 부분적으로 마비가 됐다. 중풍이 온 것이다. 그는 우울한 심리상태로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클렘페러가 병원을 나와 잠적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클렘페러가 실종됐다는 내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나중에 클렘페러가 뉴저지에서 발견됐을 때 헤럴드 트리뷴지는 요양원 안에 갇혀있는 클렘페러의 사진을 실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클렘페러는 LA 필을 가끔씩 지휘하기는 했지만, 음악감독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구나 조울증은 더욱 악화되고 예측할 수 없는 클렘페러의 불규칙적인 습성으로 인해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그를 ‘불편한 손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클렘페러가 만년에 지휘자로서 전성기를 활짝 꽃피운 곳이 대부분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던 사정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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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으로 돌아온 클렘페러는 62세 때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 극장(1947~1950)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그동안 악단의 기틀을 착실히 다졌지만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하는 헝가리의 공산주의 법에 넌더리가 난 클렘페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지휘하는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그는 덴마크 왕립 오케스트라, 몬트리올 심포니, 쾰른 방송교향악단,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지휘했다. 그러면서 미국 복스(Vox)사와 음반 녹음을 계속 진행했다. 런던에서 지휘할 때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눈에 띈 클렘페러는 1952년 EMI와 음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다른 의미도 있었다. 당시 EMI 소속이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이적한 것에 대한 레그의 대항 조치로도 볼 수 있다.
1954년, 런던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자신이 조직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69세의 클렘페러에게 맡겨 베토벤, 브람스 등 작곡가들의 수많은 명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EMI에서 맞은 전성기의 신호탄이었던 이 시기는 클렘페러의 경력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59년 레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초대 수석지휘자 자리를 클렘페러에게 맡겼다. EMI와의 종신 녹음계약도 함께 체결했다. 이 시절 클렘페러는 스위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에서 지휘했고, 때때로 지휘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1963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클렘페러의 연출작 중 하나였다. 그는 코벤트 가든에서 모차르트 [마술피리]를 지휘하기도 했다.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1964년 이 오케스트라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범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원래 영국 EMI에서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를 목표로 월터 레그가 결성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EMI를 떠나며 이 오케스트라의 해산을 선언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도 쓰지 못하게 된 단원들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자체 운영을 시작하고 클렘페러를 이 오케스트라의 회장으로 모셨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뉴필하모니아 시절 필하모니아 시절보다 더 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가졌다. 고집불통에다가 기인같은 성격의 클렘페러였지만 그는 사실 많은 음악가들을 마음으로부터 존중했고, 단원들은 클렘페러와 연주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했다 한다.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그 뒤 1977년 원래의 이름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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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가수들과 악보를 보고 있는 클렘페러의 모습
한편 작곡가로서의 클렘페러의 역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클렘페러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는 6곡의 교향곡, 한 곡의 미사, 9곡의 현악 4중주, 다수의 독일 가곡(리트)과 오페라 [Das Ziel]이 있다. Das Ziel 은 독일어로 ‘목적지’나 ‘종착점’을 의미한다(영어로 번역하면 ‘The Goal’). 작곡가 클렘페러 자신이 말하길 “죽음을 은유하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이 오페라 중 ’명랑한 왈츠‘는 클렘페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으로 꼽힌다. 클렘페러는 여간해선 자작곡을 직접 지휘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죽음 이후 이 작품들은 잊혀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가끔씩 클렘페러의 작품들이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플레이보이 기질과 화재 사고에 관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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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렘페러의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것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플레이보이로 유명했던 그의 여자관계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수없이 당했던 신체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함부르크에서 지휘할 무렵 클렘페러는 유부녀였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만과 불륜 관계였다. 어느날 슈만과 오페라를 공연하고 돌아올 때 불륜에 화가 나 있던 슈만의 남편이 기다리다가 그를 곤봉으로 내려쳤다. 그 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오케스트라 피트에 나타난 클렘페러에게 청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클렘페러는 객석을 향해 고함 쳤다.
“내 음악이 듣고 싶지 않은 놈들은 나가라!”
클렘페러가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방식을 일러주는 일화가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무렵 여자 첼로 주자가 마음에 든 클렘페러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트리오곡 초연을 연습하자며 호텔로 그녀를 불렀다. 피아노 트리오 편성이고, 다른 남자 바이올린 연주자도 동시에 초대했기 때문에 그녀는 안심하고 초대에 응했다. 막상 3명이 연주를 시작할 무렵 피아노 앞에 앉은 클렘페러가 남자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악보를 전달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있었다. “바이올린 파트는 아직 미완성이오. 당신은 집에 돌아가도 좋소.”

무대에서 떨어져 척추가 골절된 바 있는 클렘페러는 일생동안 많은 사고를 당했다. 몬트리올을 방문했을 때 공항 트랩에서 넘어져 다리와 허리뼈가 골절되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클렘페러는 의자에 앉아서 지휘해야 했다. 1958년 9월, 클렘페러는 침대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자다가 이불에 불이 붙었다. 불을 끄려고 가까이에 놓인 액체를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기름이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그는 일년 가까이 치료에 전념하게 됐다. 1959년 8월 위에 언급한 EMI와 종신 레코드 계약을 체결한 뒤 곧 회복하여 연주 활동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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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쾰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악보를 보고있는 클렘페러의 모습 <출처: Unterberg, Rolf ar de.wikipedia>
클렘페러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을 때 그의 곁에는 딸 로테 클렘페러가 있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흔들리지 않는 의지로 클렘페러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딸 로테가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클렘페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인 베르너 클렘페러는 유명 배우였다. 클렘페러의 마지막 콘서트 투어 장소 중 하나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클렘페러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 팔레스타인에서 연주를 했었다. 그리고 1970년 이스라엘 방송 당국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두 개의 콘서트를 이끌었다. 이때 프로그램은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전곡과 모차르트 [교향곡 39번]과 [4번], [41번]이었다. 이 투어기간동안 클렘페러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었다. 1972년 지휘대에서 은퇴한 클렘페러는 1973년 취리히에서 88세로 사망했고 취리히에 묻혔다.
 
 
클렘페러의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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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렘페러의 명반들은 대부분 EMI 레이블에서 나왔다. 최근에는 EMI의 음원을 발매하는 테스타먼트 라벨이 스튜디오 레코딩 음원 뿐만 아니라 방송 녹음들을 발굴해 출시하고있다. 1950년대 초기 음원들은 Vox에서 다수 발매되었는데 차츰 저작권이 만료되는 초기 음원들과 방송녹음들은 Tahra, Medici, Naxos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CD로 발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클렘페러의 음반 가운데서도 꼭 들어봐야 할 녹음은 바흐 B단조 미사(EMI),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EMI), 베토벤 교향곡 전곡(EMI, Testament),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EMI), 멘델스존 교향곡 3번, 4번(EMI), 브람스 교향곡 전곡(EMI), 말러 교향곡 2번, 4번, 7번, 9번, 대지의 노래(EMI), 브루크너 교향곡 4번, 6번, 7번(EMI) 등이다. 클렘페러가 지휘한 협주곡 녹음 중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반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EMI)과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반주한 베토벤 협주곡 3번, 4번, 5번(Testament)이 우선 생각난다.
 
 
연표
1907 프라하 독일 극장 악장으로 데뷔
1910 함부르크 오페라 지휘자
1912 바르멘 오페라 지휘자
1914 스트라스부르 오페라 지휘자
1917 쾰른 오페라 지휘자
1923 쾰른 음악 총감독
1924 비스바덴 오페라 지휘자
1927 크롤 오페라 지휘자
1931 베를린 슈타츠오퍼 지휘자
1933~1939 나치에게 추방, LA 필 상임 지휘자
1947 부다페스트 국립극장 음악감독
1951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지휘
1954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 상임지휘자
1959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종신 상임지휘자
1964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회장 취임
1972 지휘 은퇴 선언
1973 취리히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