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되어 로마 시대에 절정을 이룬 스토아 철학의 연원도 따지고 보면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으로 소급된다. 로고스를 따르라는 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의 빼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서양사상의 원류를 이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를 매개로 서로 손을 잡는다. 근대에 와서도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은 그 맥이 이어진다. 아니, 근대 철학의 원류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전에 제자 한 명 두지 않은 헤라클레이토스는 사후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셈이다. 특히 근대 철학의 끝자락에 위치한 헤겔이 그렇고, 탈근대 철학의 앞자리에 있는 니체가 그렇다.
헤겔이 내세운 “철학은 사상으로 파악된 그 시대”라는 명제는 헤라클레이토스 식으로 말하면 사상은 역사적으로 흐르는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사상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누가 이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을까? 헤겔에 따르면 이 법칙의 발견자는 바로 헤라클레이토스다. 그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전쟁과 평화,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등 대립항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대립항은 투쟁 또는 전쟁 상태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대립적 양상이 감추어진 조화라는 것을 주목한 최초의 철학자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또 다른 제자다. 니체는 헤겔과는 달리 변화의 원리를 변증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니체는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믿는 모든 것은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부르는 이데아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또는 도덕 규칙은 아무 것도 아닌 ‘니힐’(nihil)이다. 니체가 보기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니힐리즘의 본질을 꿰뚫어 본 고대 철학자다.
이제 우리는 고대의 이 괴팍한 철학자와 떠날 시간이다. 여러분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누구의 밧줄로 묶을 것인가? 플라톤의 변화 생성하지 않는 밧줄로 묶을 것인가, 아니면 헤겔의 변화 생성하는 밧줄로 묶을 것인가? 사도 요한의 눈으로 로고스를 세계의 구원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니체의 눈으로 로고스를 철저한 부정으로 볼 것인가? 우리는 그를 또 다른 장에서 만날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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