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들이 멀미를 하고 기생충병으로 죽기 시작하면서 조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씨 정권은 수적(水賊)들을 써서 조조군에게 수시로 기습을 가하였다. 소규모 부대로 배에 올라 병사 몇 명 죽이고 달아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적벽 전투에서 동오의 주장(主將)중 한 명이었던 감녕(甘寧)이 수적출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나라가 수적들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많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배들을 마구 습격하니, 함선 지휘관들은 경계를 위하여 병사들의 하선(下船)을 금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함상생활에 익숙지 못한 북방병사들의 체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동오는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 배를 모아 동오의 수군과 결전을 하려던 조조의 계획은 물 건너가고, 조조는 오림에 대선단을 정박하여 둔 채 어찌 할 것인지를 고심하였다. 지속적인 기습과 체력저하로 조조군의 기민한 대처능력이 떨어졌을 때 오군(吳軍)은 잘 타기 쉬운 물질을 가득 실은 돌격선들을 조조의 선단 쪽으로 밀어보냈다. 조조군의 함선들은 돌격선이 부딪치자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선단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오림의 강안(江岸)은 갈대밭이어서 불이 갈대로 옮겨 붙으면서 ‘천지사방’이 화마에 휩싸였다.
조조의 수군은 거의 전멸하고 정예인 기병을 포함한 조조의 육군은 수군을 구출하는 일을 포기한 채 남군(지금의 호남성 강릉)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상당수가 병으로 사망하기는 하였지만, 육군이 전투로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조는 남군에서 버티려 하였지만 조조의 군사는 멀리 나온 원정군이었기 때문에 변변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조조는 남군을 포기하고 형주 본성으로 철수한다. 북방을 통일한 후 형주를 병탄하고 여세를 몰아 남방까지 통일하려던 조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북방에서 유목민과 처음으로 싸우던 농민 병사들이 유목민들의 기마전에 고전을 하듯이 조조군은 오(吳)의 수상(水上) 게릴라 전술과 기습전에 녹아났다. 이는 단순히 조조 개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북방세력이 남방을 접수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적벽에서 조조의 실패로 말미암아 북방세력은 향후 70년간 양자강 남쪽을 넘보지 못한다.
이로서 동오의 독립은 보장이 되었고, 떠돌이였던 유비는 참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주 북부를 얻어 세력을 키워나갈 기반을 확보하였다. 일찍이 제갈량은 세력균형책으로서 ‘천하삼분지계’를 주창한 바 있다. 중원을 이루는 세력이 서로 견제하게 만듬으로써 전쟁의 빈도를 낮추고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유비와 동오가 적벽에서 이김으로써 중원은 세 나라로 갈리고 ‘천하삼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관중과 촉한
적벽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당분간 남방을 정벌하려는 뜻을 접었다. 군사적 피해도 피해지만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마씨(馬氏)일족을 위시한 관중과 서량의 토호 10여명이 ‘타도 조조’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관중연합군은 꺼져가는 한조(漢朝)에 대한 충성심으로 조조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의 반란세력들은 약탈형, 세력유지형, 왕조건국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약탈형은 민란세력이 단순히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움직이며, 세력기반을 마련한다던가 나라를 세운다거나 하는 정치적인 목표는 없다. 장씨 삼형제가 사망한 후의 황건잔당이나 흑산적이 이에 해당한다. 세력유지형은 대개 어떤 지방의 토호세력이 난세를 만나 자신의 영토와 세력권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유형이고, 필요에 의하여 기타 정치세력과 이합집산을 하고 작은 나라를 세우기도 하지만,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자리에 오를 생각은 없다. 마지막이 바로 나라를 세우고 군주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중원을 하나의 정권아래 통일을 시키려고 하는 유형이다. 조조나 원소, 손책은 모두 중원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군사를 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씨와 서량-관중 군벌들은 천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적벽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조조는 동오와 유비라는 강적을 앞에 두게 되었다. 일전에 원소와 싸우기 전에 여포를 정리하였듯이 유사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고도로 군사화된 서량과 관중의 군벌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위수(渭水)지역의 농토와 초원의 마필,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단련된 보병, 그리고 유목기병들까지 있었다. 관중-서량군은 조조가 그들을 적대시하는 기미가 보이자 대규모로 군을 동원한다. 이때 화북의 패왕이었던 조조는 이를 구실삼아 관중으로 진격한다.
전통적인 강군의 고장인 관중-서량의 연합군은 전투력이 강했지만 연합군의 최대약점은 지휘권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약 10명의 군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연합군을 이루었기 때문에 공을 다투면서 서로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혼성군(混成軍)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지휘권 분열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관중-서량 연합군은 전략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제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관중 밖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계획이 없었던 연합군의 최대 관심사는 조조군이 관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리하려면 우선 관중과 중원간의 관문인 동관(潼關)을 막아야 했다. 하남(河南)에서 관중방면으로 진격하는 군대는 동관을 지나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조조는 외통길인 동관에 대한 정면공격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택하였고, 그 선봉을 서황(徐晃)에게 맡긴다. 서황의 우회기습공격으로 관중-서량연합군에서는 비상이 걸렸고 이를 양봉이 저지하려다가 패하면서 조조의 군이 위수 북쪽 지방을 장악한다. 이때 연합군은 조조군이 위수를 건너 장안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조조군은 다시 한 번 연합군의 허를 찌른다. 조조군은 위수를 다시 건너기는 하였지만 장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과 합세하여 동관을 앞뒤에서 친다. 결국 동관은 함락당하고 조조의 대군이 대거 관중으로 진입한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관중군과의 화의에 임하였지만 이는 지연술이었다. 위수의 북쭉으로 간 조조군은 위수를 역(逆)도하하여 위남(渭南)을 서쪽에서 치고 이에 조조의 본군이 화의를 결렬시키고 공격을 개시한다. 동관을 함락시킬 때 썼던 작전의 재연이었다. 서량군은 대패하였다. 조조는 서량과 관중의 군벌들을 쓸어버리면서 든든한 군사기지를 얻음과 동시에 장안을 차지하여 명분상의 우위가 더욱 더 높아지게 되었다.
유비의 서촉점령
한편 형주에 있던 유비는 조조가 언제 다시 쳐내려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조조와 손권의 사이에서 불안해하였다. 형주가 비록 양자강 중류의 요충이기는 하였지만 유비는 외적으로부터 안전하면서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지가 필요하였다. 이에 유비는 수비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서촉에 관심을 두었다. 서촉은 좋은 농토와 목초지가 널려있는데다가 난리통에서 비껴있는 곳이라 세력과 군사를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 서촉은 아버지인 유언(劉焉)의 익주목 자리를 물려받은 유장(劉璋)이 다스리고 있었다. 익주는 일견 평화로웠지만 사실은 유씨 일족과 기존 호족들간에 상당한 갈등이 있는 상태였다. 유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유장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입지강화를 위하여 유비를 끌어들이려는 세력들도 있었다. [삼국연의]에도 등장하는 장송, 법정 등의 군소귀족이었다. 사실 익주 내에서도 유비의 숨은 의도를 아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반대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 버린다. 익주에서의 절대 권력을 장악했지만 조조 같은 거대세력을 두려워하던 유장은, 어느 정도 힘이 있어도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지 않은 유비가 적절한 이용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장이 안이하기는 하였지만 자기 영토안의 세력균형에 대해서까지 무지하지는 않았다.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조조가 관중으로 출병한 시기와 맞물렸고 유비는 익주 내외의 이런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다. 유장을 설득하여 북방의 장로와 조조를 방비해야 한다며 군사를 빌리고 얻은 군사들을 회유하였다. 유비는 자신이 원래 형주에서 데려온 병력에다가 회유된 유장의 병사들, 그리고 익주 북부 맹달의 군사를 합쳐 약 약 3만 정도의 군사를 마련한다.
유비의 원래 계획은 익주 내부의 장송으로 하여금 유장을 제거하고 유장군이 지리멸렬하는 사이 재빨리 군을 진격시켜 성도에 무혈입성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장송이 처형당하게 되자 전면전밖에 없다고 판단, 가맹관에서 그대로 남진한다. 유장의 군대는 병력이 태부족이었다. 유비는 재빨리 면죽을 함락하고 낙성을 포위한다. 설상가상으로 유장에게 방어군을 얻어 이끌고 나온 유장의 신하 이엄조차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낙현 싸움에서 유비가 새로 얻은 군사 방통이 승부를 서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유비의 군은 추진력을 잃고 수세에 몰렸다. 이에 유비가 형주에 있던 그의 군사와 장비, 제갈량 등을 불러들이자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익주의 각 군현이 무너졌다. 이윽고 굳건히 버티던 낙현마저도 무너지자, 유장은 구원의 가능성 없이 철저히 고립이 되었고 유비군이 성도를 포위한지 수십일 만에 성을 나와 항복한다. 시골 출신의 떠돌이 잔반 유비가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세 조각의 천하’중 한 곳을 차지한 것이다.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중국전역을 떠돌던 유비는 더 이상 떠돌이도 아니었고, 단순한 하나의 군웅도 아니었다. 명백히 중원의 세력균형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한 지역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삼국의 본격적인 쟁패
유비는 서촉을 점령하여 단단한 본거지를 마련하였지만 214년경에 조조가 한중(漢中)에 자리 잡고 있던 오두미도(五斗米道) 교단을 무찌르면서 서촉(西蜀)의 지리적 이점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촉한의 최대 이점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침공이 어렵다는 것인데 한중은 서촉과 북쪽의 관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령산맥 중간에 있었다. 위나라가 한중을 점령하였으니 진령산맥은 지리적인 방벽으로서 무력화 된 것이다. 수월하게 한중에 진출한 조조는 급할 것이 없었다. 엄청난 인구와 군사력을 확보하고, 공격에 유리한 지역까지 차지하였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침공준비를 하였다. 이와 반대로 유비에게는 엄청난 위기상황이었다. 유비에게는 한중을 점령하고 있는 위군을 격파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유비는 서촉 전역에 거국적인 동원령을 내리고 최소한의 수비군을 제외한 서촉의 정예병 거의 전부를 동원하였고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 유비가 서촉 점령전을 시작할 때도 지휘한 병력이 불과 3만 남짓이었다. 조조의 침공에 맞서 5만을 동원했다는 것은 유비와 서촉 정권이 얼마나 조조의 한중 점령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위나라의 10만 대군을 서촉의 신생정권이 이기느냐의 여부에 따라 서촉이 번영하고 한나라 중흥의 명분을 이어갈 수 있느냐, 또는 나라를 기틀 위에 세우기도 전에 사라지느냐의 상황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