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전쟁 (1) - 군웅할거(群雄割據), 영웅들의 전쟁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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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전쟁 (1) - 군웅할거(群雄割據), 영웅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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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를 보유하고 있을 경우 촉한의 기본전략

삼국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동한조정 vs 황건적
2단계: 각 군웅의 각축전
3단계: 조위(曹魏) - 촉한(蜀漢) - 손오(孫吳)
전쟁시기
AD 184 ~ AD 280
전쟁터
화북(현 하북-하남-산동), 관중(현 섬서성), 양자강 유역, 현 사천성
주요전투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서진의 오(吳) 공략전
 
 
[삼국연의]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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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중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접해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서기 3세기에서 후한(또는 동한)이 무너지고 위-오-촉으로 갈려 전쟁을 벌인 ‘삼국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하여 가진 관심은 삼국시대의 실제 역사가 아니라 15세기 명(明)나라때의 인물인 나관중(羅貫中)이 쓴 역사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에 기인한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는 물론 역사적 사실도 들어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이기 때문에 사건의 선후가 뒤바뀜은 물론, 소설적인 과장도 들어있고 어떤 인물들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하지도 않았던 일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역사적 사실여부가 분명치 않은 민간의 전승까지 접목시켰다. 이 때문에 [삼국연의]는 스펙터클하고 장대한 서사(Epic)로 거듭났지만 후세인들에게 삼국연의의 내용과 실제 삼국의 역사 사이에 약간의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삼국연의의 내용과 상관없이 중국의 삼국시대는 엄청난 격변기였으며 중국의 역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전, 후한을 통틀어 약 400년간 중국대륙을 다스린 한조(漢朝)가 무너지고 군웅(群雄)들이 난립하고 이를 통일하기 위한 경쟁과 전쟁을 거치는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이후의 중국 역사에 길이 남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흔들리는 한조와 말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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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왕조가 겪고 있던 위기의 원인은 이전의 전한시대에 발생하였다. 한나라의 군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하에 운영되었다. 평상시에 땅을 일구던 농부들이 전시에 병사로 징집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병사를 내보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피해야 하는 금기이다. 서한의 군제는 23세에서 56세까지의 성인남자들에게 2년동안 병역을 부과하였다. 해당 지역의 성인남자들이 징집되면 변경지대나 황도(皇都)에서 1년, 그리고 자신의 출신지에서 1년을 병사로 복무하게 된다. 지방에 있는 병사들은 매년 8월에 소속 군(郡)을 다스리는 태수 앞에서 훈련과 열병(閱兵)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물론 근현대만큼 행정체계가 면밀하지 못한 고대의 특성상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이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전한의 남성들은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일정숫자의 훈련된 보병들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중국 왕조들의 주적(主敵)인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병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즉 기병을 육성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한의 무제(武帝)는 대규모의 기병대를 만들어 위청과 곽거병 등의 지휘하에 흉노족의 본영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지만 그의 무리한 대외정벌로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쌓은 국부(國富)가 탕진되면서 경제가 파탄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무제는 정복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정복의 결과로 한나라에 편입된 북방 이민족들을 변방에 배치하여 다른 이민족들을 막게 하였다. 이민족 병사들이 초반에 침공군을 막아주는 동안 중원에서 정벌군을 모아 침공군을 무찌르는 방어전략을 택한 것이다.
대외정벌에 적극적이었던 무제 이후 전한의 정권을 외척들이 좌지우지하면서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AD 8년에 외척인 왕망(王莽)이 황위를 찬탈하면서 전한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 왕조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반란세력을 누르지 못하고 멸망하고 AD 23년에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다. 광무제의 후한이 등장하면서 전한 왕조 내내 존속하였던 병농일치의 군제는 일제 변화를 맞게 된다. 우선 AD 30년에 각 지방에서 군사들의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였던 도위(都尉)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듬해에는 연례열병행사가 모두 폐지되었다. 이는 전한-후한 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인구가 줄고 조세(租稅)가 급감하여 아무리 병농일치라고는 하지만 군대를 동원할 때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무제 유수가 군(郡)과 도위 중심의 제도를 폐지한 또 다른 이유는 중앙의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병력이 지방에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수의 후한 건국에는 지방 호족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고 이러한 호족들은 유수가 광무제로 등극한 후에 정치적인 대가를 요구하면서 벼슬과 함께 사실상의 자치를 보장받으려 하였다. 호족들의 자치가 보장된 상태에서 지방 장정들이 군사훈련을 계속 받을 경우, 유사시에 중앙정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에 이 장정들이 포섭될 수 있기 때문에 사전 방지 차원에서 지방군사들의 훈련을 중지시킨 것이다.
후한 정부는 병농일치의 농민출신 병사들 대신 고위귀족들의 자제들을 지원형식으로 받아들여 금군(禁軍)을 만들었다. 아울러 감옥에 차고 넘치던 사형수들과 죄수들을 사면하여 병사로 만들어 주는 대신 이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근무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나라에 귀부하는 유목민들을 기마부대로 삼아 역시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후한시대 지방행정의 기본단위는 군과 현이었다. 군과 현은 작은 단위였기 때문에 태수나 현위가 야심이 크더라도 다스리는 지역이 작고 인구가 적어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후한 중기에 지방관들에 대한 일종의 감찰 직책이었던 자사(刺史)에게 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지위(州牧)가 부여되면서 이러한 사정은 바뀌었다. 이때부터 군현보다 거대한 주(州)로 지방권력의 축이 이동했고 많은 인구와 농지를 보유하게 된 각 주의 목(牧)들이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에는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徐州)의 목(牧)자리를 받는 장면이 있고 목으로서 상당한 수의 군사를 동원하여 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소설상의 설정이 아니라 주목은 실제로 그러할 권한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점증하는 이민족의 습격, 농민들의 봉기 때문에 주목들에게는 실질적으로 군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이전에 사공(司空)들, 즉 현대의 장관에 해당하는 중앙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군의 지휘권은 자사(이후 주목)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군사의 지휘권과 지방관들에 대한 감찰권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인사권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조정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도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게 되면서 지방의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각 주의 목들은 독립왕국을 다스리는 군벌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지방관들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혼란기와 군웅할거가 도래하게 되었다.
동한 왕조의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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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에 등장하는 환관들의 전횡은 11대 황제인 환제(桓帝)때부터 본격화된다. 환제가 외척 양씨의 세력을 꺾는데 역시 환관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환관들은 양씨들을 몰아낸 후 조정에서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이 되었고 이 세력이 유명한 당고의금(黨錮之禁)을 일으키며 영제(靈帝)때의 유명한 십상시(十常侍)로 이어진다. 십상시의 권세는 천민 출신의 하(何)씨를 황제의 후비(后妃)로 밀어올리고 그녀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皇后)가 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영제가 죽은 후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하씨의 아들이 한의 소제(少帝)로 등극하면서 하황후는 태후가 되고 그녀는 오빠 하진(何進)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주었다. 하씨들이 새로운 외척세력이 되면서 환관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세력과 힘을 합하여 환관세력을 없애려 하였다. 이때 하진에게 동조한 인물 중에는 하북의 유명한 사족(士族)출신인 원소(袁紹)와 서량의 동탁(董卓)등이 있었다. 그러나 하진의 모의를 알아챈 환관들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하진을 죽이고 그 일족을 몰살하는 이른바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환관들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명분을 주었다. 이미 군대를 동원한 원소 등은 황궁에 난입하여 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2000명의 환관이 참살당했고 이로서 조정을 뒤흔들던 환관들의 세력이 꺾였다. 그러나 환관토벌을 명분으로 같이 거병하였던 서량의 동탁은 수도인 낙양에 들어오자마자 소제를 폐하고 그 동생인 진류왕을 헌제(獻帝)로 세웠다. 이에 원소 등은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군을 결성하고 동탁은 이를 피하여 서한(西漢)의 수도이던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외척과 환관들이 암투를 벌이는 동안 매관매직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변방의 장수들은 거의 독립세력이 되었으며 주목(州牧)들의 권한이 급상승하면서 조정이 통제하기 힘든 지방세력이 곳곳에 생겨났다. 원소가 결성한 호족연합군중 대부분이 한 지역을 장악한 주목이나 자사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동원한 군대를 해체하지도 않았고 이를 기반 삼아 혼란한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백성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났고 대호족들은 더 많은 땅을 점유하게 되었다. 후한은 점차 기존의 체제로는 유지가 어려운 한계상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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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皇權)의 약화, 외척의 전횡, 환관들의 득세, 이로 인한 백성들의 이반, 그리고 중앙의 약화를 틈탄 지방세력의 강화로 동한 왕조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구원을 갈망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태평도(太平道)였다. 태평도는 하북성 출신의 장각(張角)이란 인물이 창시한 도교 계통의 종교로서 신앙과 부적을 통한 기복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내세우며 혼란과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교단 자체는 장각이 만들었지만 태평도는 [삼국연의]에도 등장하는 도사인 우길(于吉)의 사상과 저서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 하북성에서 시작한 태평도는 백성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불과 수 년 만에 화북과 하남 지역에서 신도 수십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는 일부 환관들과 관리들과 결탁하여 중앙정부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84년에 본격적인 봉기의 기치를 올린다. 장각은 당시에 유행하던 오행종시설(五行終始說)을 이용하여 한나라의 상징이 불(火)이기 때문에 화의 기운이 다하면 흙(土)이 성(盛)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태평교도들은 창천(푸른 하늘)로 대변되는 한조(漢朝)가 망하고 황천(누런 하늘)이 도래한다며 누런색을 스스로의 상징으로 삼아 누런 색의 띠를 머리에 둘렀고 이 때문에 황건당(黃巾黨)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바로 태평도의 난(亂), 또는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장각이 일으킨 난은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그리고 말세론적 교리가 주는 강력함으로 인하여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등 화북지방뿐만 아니라 현재의 호북, 안휘등 양자강 유역으로도 급속히 퍼졌다. 확산속도가 빠른데다가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아 고질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동한조정은 단독으로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이 당시 동한조정은 십상시 세력이 일으킨 당고의금 사태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힘을 잃고 물러나있었다. 이때 지방의 태수로 있던 황보숭이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황제의 재산과 궁궐의 말들을 토벌을 위하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황제는 이런 무례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 황궁수비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의 군단이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황제는 대규모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황보숭과 같은 지방세력가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러나 황보숭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공짜로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황건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과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이 전투에서 황보숭과 주준이 공을 세워 정계의 실세가 됨은 물론 기도위(騎都尉)의 벼슬에 있던 조조라는 젊은이가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토벌군을 구하는 공을 세워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황보숭의 토벌군은 여남과 창정 지역의 황건집단도 연이어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해 말에 장각의 동생들인 장량과 장보의 집단을 각각 무찔렀다. 이로서 황건군은 그 구심점을 잃고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황건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종교적인 운동이었던 탓도 있지만 군사적인 요인도 있다. 종교적인 운동으로 시작한 황건집단의 종교이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좋았지만 이들을 조직화된 군대로 유지하기 위한 행정이나 보급, 군사훈련의 체계를 세우지 못하였다. 교단이 아닌 통일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없었기에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활동한 지방의 봉기군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탈에 의존하였고 이는 자신들의 기반이었던 농민들을 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황건의 난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로서의 작용을 하였다. 태평도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무능은 더욱 돋보였고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방세력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누런 하늘은 서지 못하였지만 이들이 촉발한 거대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푸른 하늘은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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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고 유력한 세력끼리 싸움을 벌이다가 가장 강한 나라가 통일을 하는 중국사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하다. 삼국시대는 단순히 위-촉-오 삼국의 쟁패로만 설명될 수 없다. 삼국시대는 사실 이후 전개되는 중국사의 구도를 결정하였다.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인하여 천자의 당위적 권위는 실종되고 지방세력의 발호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북방과 서방에 있던 이민족들이 중원에 대거 진출하며 연의에 묘사된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혼돈과 분열, 그리고 파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한나라가 열리면서 구축하고자 하였던 안정적인 질서가 실종되고 세력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중국사에서는 고대의 천명(天命)은 예전에 있었던 당위성을 상실하고 다만 실제의 힘을 가장하는 명분론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이민족의 유입과 함께 한인(漢人)들이 이전에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삼국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에는 한족과 이민족의 혼합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보다 정교한 중화주의적 이념이 등장하였다. 즉 한족의 문화적 개념인 ‘중화’를 중심으로 사방의 이민족을 정복/교화하는, 또는 설령 한인들이 패하더라도 이민족을 한족의 ‘위대한’ 문화로 감화시키는 중국인의 천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군웅할거, 화북과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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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왕조가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후 각축을 벌이게 되는 세력은 크게 화북세력, 강남세력, 관중/서량세력, 그리고 파촉세력으로 나뉠 수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당시 대부분의 농경지와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화북(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 하남)이었다. 이 지역의 주요 군웅들을 살펴보자면 현재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부에서 세력을 구축한 공손찬, 현 하북성에서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명문귀족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지닌 원소, 그리고 하남과 산동 일부의 본거지에서 힘을 키우던 조조였다.
앞서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 유협을 헌제(獻帝)로 세우자 각지의 자사들과 주목들이 동탁의 토벌을 명분으로 하는 토벌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탁은 본격적으로 싸우는 대신 189년에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헌제를 서한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기고 아예 장안을 수도로 선포하였다. 낙양이 황폐화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동한 조정의 권위는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었고 동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려던 자사들과 주목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동탁은 천자를 끼고 서량과 관중을 토대로 권력을 다시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192년에 부하장수 여포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그의 세력 역시 지리멸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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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때 [삼국연의]의 판본 중 원소(좌)와 동탁(우).
동탁이 죽은 후 장안은 이각과 곽사가 차지하게 되었고 천자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지방세력을 견제할만한 최소한의 권위도 실추된 상태에서 군웅들의 세력 다툼은 본격화되었다. 원래 자사나 주목들은 중앙의 조정에서 임명하는 것이었지만 이때 군웅들은 그들의 지위에 대한 사후승인을 요청할 뿐 직위를 세습하면서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유형으로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 서촉(익주)의 유언, 강남의 손견등이 있다. 이들은 명분상으로는 아직 황제의 신하였지만 사실상 왕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였고 이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실질적으로 개인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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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흑산적을 토벌하고 흉노족의 추장을 대파하면서 그의 위상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세력기반을 다진 다른 군웅들과는 달리 조조(曹操)에게는 가산을 정리하고 가신들을 모아 만든 소규모 군대밖에 없었다. 비록 황건적 토벌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하였지만 십상시의 천하에서 그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황건적 이후 태행산맥 지역에서 일어났던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하면서 동군태수에 임명되었고 북중국에 대한 상시적인 위협이던 흉노족의 추장 어부라를 대파하면서 그의 위상은 급상승하였다. 192년에 과거 황건적의 잔존세력이 수십만씩 몰려다니면서 지금의 하북성과 산동성 북부를 휩쓸자 조조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산동성 북부에 이른 황건적 집단은 역시 이들을 토벌하러 나온 연주자사 유대의 군대를 격파하고 생존을 위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유대 밑에 있던 포신이란 인물이 군을 모아 이들을 토벌하려고 나서면서 동군태수로 있던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조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고 기병대의 이점을 십분 발휘하여 기병이 거의 없는 황건적을 수장(壽張)에서 크게 무찔렀다. 패배한 황건적들은 제수(濟水)까지 밀려나 물러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다. 이때 조조는 황건적들을 이끌던 거수들에게 자신을 따른다면 죄를 묻지 않음과 동시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제안하였고 황건적들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농민이 되었다. 조조는 이들 가운데서 장정들을 군사로 뽑아 훈련시켰는데 후일 조조 군대의 핵심인 청주병(靑州兵)이 되었다.
수년 후 195년에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과 곽사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헌제는 장안을 빠져나와 196년에 옛 수도였던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폐허가 된 낙양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연주의 목(牧)이었던 조조는 재빨리 낙양으로 진군하여 신하를 자처하며 황제를 모시겠다고 하였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울러 폐허가 된 낙양보다는 허창이 더 지내기가 나을 것이라며 수도 자체를 허창으로 옮기고 허창은 허도(許都)가 되었다. 이로서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조조는 승상이 되었고 이후 군웅들과 쟁투에서 명분상의 우위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하북성을 놓고 쟁패를 벌이던 북방의 효웅(梟雄)들인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은 계교(界橋)의 전투에서 원소가 대규모 노병(弩兵)을 동원하여 공손찬의 주력 기병을 크게 깨면서 원소쪽으로 기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손찬 세력은 멸망하였다.
이미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으로 화북의 군소세력은 정리된 상태이기에 이때 화북을 놓고 원소와 싸울 수 있는 상대는 조조, 그리고 하비에 둥지를 튼 과거 동탁의 부하인 여포(呂布)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비에 있던 여포는 198년 조조와 싸움에서 패하고 조조는 지금의 하남과 산동성 서부를 아우르는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하북을 통일한 원소과 조조의 결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몰락양반이었던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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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에서 인덕(仁德)의 표상처럼 묘사되는 유비는 이 시점에서 이곳 저곳 몸을 의탁하는 식객에 불과하였다. 나관중의 소설에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나오는 유비는 유송(劉宋)의 사가인 배송지에 의하면 한 경제(景帝)의 후손 임읍후의 자손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그의 출자가 어떠하건 간에 당시 그는 아무런 세력도 없는 시골의 젊은이였다. 설사 실제로 황실의 일족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황실로부터 멀어진 잊혀진 황족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는 몰락양반, 즉 잔반(殘班)에 불과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죽은 후 그는 다행히 부유한 친척의 후원으로 명사(名士)인 노식의 문하에서 공손찬과 함께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돗자리 만들면서 생활하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고향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을 모으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싸우러 나갔고 이 과정에서 평생지기가 되는 관우와 장비를 만났다고 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유비의 출신지인 탁현에서는 유관장 ‘삼형제’를 모시는 사당을 지어놓고 여전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비는 황건적과의 싸움에서 세운 공으로 근처의 현령이 되었다가 이후 황건당의 잔존세력이 서주(徐州)에서 난리를 일으키자 다시 의군을 조직하여 싸웠다. 이 싸움에서 세운 공으로 지금의 강소성 북부에 있는 고당(高唐)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러나 동탁의 장안천도 후 내전이 벌어지고 유비는 이 난리통에서 고당현을 잃고 과거 노식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던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하여 함께 원소와 싸우게 된다. 당시 공손찬은 서주목(徐州牧)인 도겸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는데 도겸은 조조군의 침공을 받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공손찬은 부하인 전계(田楷)와 유비에게 구원군을 맡아 출전하게 하였다.
이때 여포가 조조의 중요한 근거지인 연주를 침공하면서 조조는 서둘러 후퇴하였고 도겸은 유비에게 같이 있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유비는 서주 근처의 소패에 머무르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의 유력자인 미축(麋竺)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서주에서의 기반을 굳히고 도겸이 죽자 미(靡)씨 일족의 지원을 받아 서주목이 되려 하였으나 원술(袁述)의 침공가능성 때문에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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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 중 촉주유비(蜀主劉備) 부분이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유비는 그의 사형(師兄)이라 할 수 있는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의 ‘승인’을 얻어 서주목이 된다. 돗자리 짜던 잔반(殘班)이 커다란 주(州)의 주목이 된 것이다. 사실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에게 가는 것이 [삼국연의] 상의 선인(善人)이미지와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상황 자체가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만큼 유비의 행적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 유비 역시 몸을 의탁하러 온 여포에게 쫓겨나 결국 원소에게 가게 되며 원소의 식객으로 조조와 원소의 큰 싸움을 관전하게 되었다.
관도대전의 승리, 화북의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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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을 누르고 하북의 패자가 된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가장 좋은 농경지였던 하북 지방을 차지하였고 병력의 수도 우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명망있는 거족(巨族)출신으로서 많은 호족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그이기에 환관의 자손인 조조 따위와 자신을 비교할 수 없다는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기 200년에 조조와 싸우러 갈 때 그는 보병 10만과 기병 1만을 합쳐 11만의 대군을 몰아 황하 북변의 여양(黎陽)으로 향하였다. 많은 병력을 동원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대군(大軍)을 먹이느냐, 즉 보급의 문제인데 원소는 생산성 높은 농경지를 모두 장악한 만큼 축적한 군량도 많았고 수운(水運)을 통한 보급상황도 좋았다. 서진이 중원을 통일한 후 서진의 사관인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원소전’에 의하면 원소의 모사인 저수가 양군(兩軍)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군대는 정예지만 수가 적고 우리(원소측)는 병사가 많고 보급상황이 좋으니 싸움을 서두르지 말고 지구전을 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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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 직전의 원소와 조조 영지 (붉은 색이 원소, 푸른색이 조조).

이에 따라 원소는 싸움을 서두르지 않았지만 몇 가지 실책을 범하였다. 일단 그는 본거지에 병력을 거의 남겨두지 않고 보유한 군사 거의 전부를 몰고 나왔다. 이 때문에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패할 경우 세력을 보존할 길이 없었다. 아울러 보급전과 지구전에 의존한 전략도 좋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 고향을 떠나 있는 병사들이 지치고 전쟁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내부 갈등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일단 원소군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을 끝내고 도하하여야 했다. 결국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도하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선봉 기병부대가 조조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전멸당하면서 맹장인 안량과 문추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공교롭게도 안량을 죽인 것은 서주에서 흩어진 후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관우였다. 강을 건넌 원소군과 이를 막아선 조조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전으로 전환하였다. 원소군은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토산을 쌓아 참호와 목책 뒤에 숨어있는 조조군을 공격하였고 조조군은 발석차(發石車)로 돌을 날려 토산을 무너뜨리면서 반격하였다. 그러나 대치가 오래되면서 병력이 적은데다가 보급도 좋지 않은 조조군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서주에서 쫓겨난 유비도 원소편에서 이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황건적 출신인 유벽이란 인물과 함께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 근처의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조조군을 교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조의 명을 받은 조인(曺仁)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고 또 다른 부대를 맡은 서황은 원소군의 보급행렬을 요격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에 원소는 순우경에게 1만을 주어 뒤이어 오는 수송부대를 호위하게 하였고 물자를 오소(烏巢)에 두었다. 황하를 이용한 수운(水運) 보급의 이점을 이용한 조치였고 조조군이 강을 건너 오소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친히 5천 군사를 이끌고 오소의 병참기지를 불태우면서 전세는 조조쪽으로 급속히 기울었고 놀란 원소는 조조가 빠진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원소의 장수인 장합과 고람이 패하고 조조군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원소군이 황하를 다시 건너려 할 때 조조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원소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원소는 겨우 업까지 돌아갔으나 다시 세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아들들이 골육상쟁을 벌이다가 원담은 조홍에게 패하여 죽고 원희와 원상은 원씨 가문을 도와주던 오환족의 땅으로 들어갔으나 조조는 군사를 보내 오환까지 격파하였다. 이에 원씨 형제들은 요동의 공손씨에게 도망하였으나 요동의 지배자인 공손강은 원씨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넘겼다. 조조는 원씨 세력을 일소하면서 명실 공히 화북의 제왕이 되었다. 이제 화북을 온전히 손에 넣은 조조는 한나라의 땅 전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