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정부는 병농일치의 농민출신 병사들 대신 고위귀족들의 자제들을 지원형식으로 받아들여 금군(禁軍)을 만들었다. 아울러 감옥에 차고 넘치던 사형수들과 죄수들을 사면하여 병사로 만들어 주는 대신 이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근무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나라에 귀부하는 유목민들을 기마부대로 삼아 역시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후한시대 지방행정의 기본단위는 군과 현이었다. 군과 현은 작은 단위였기 때문에 태수나 현위가 야심이 크더라도 다스리는 지역이 작고 인구가 적어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후한 중기에 지방관들에 대한 일종의 감찰 직책이었던 자사(刺史)에게 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지위(州牧)가 부여되면서 이러한 사정은 바뀌었다. 이때부터 군현보다 거대한 주(州)로 지방권력의 축이 이동했고 많은 인구와 농지를 보유하게 된 각 주의 목(牧)들이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에는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徐州)의 목(牧)자리를 받는 장면이 있고 목으로서 상당한 수의 군사를 동원하여 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소설상의 설정이 아니라 주목은 실제로 그러할 권한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점증하는 이민족의 습격, 농민들의 봉기 때문에 주목들에게는 실질적으로 군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이전에 사공(司空)들, 즉 현대의 장관에 해당하는 중앙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군의 지휘권은 자사(이후 주목)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군사의 지휘권과 지방관들에 대한 감찰권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인사권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조정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도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게 되면서 지방의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각 주의 목들은 독립왕국을 다스리는 군벌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지방관들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혼란기와 군웅할거가 도래하게 되었다.
동한 왕조의 약화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환관들의 전횡은 11대 황제인 환제(桓帝)때부터 본격화된다. 환제가 외척 양씨의 세력을 꺾는데 역시 환관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환관들은 양씨들을 몰아낸 후 조정에서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이 되었고 이 세력이 유명한 당고의금(黨錮之禁)을 일으키며 영제(靈帝)때의 유명한 십상시(十常侍)로 이어진다. 십상시의 권세는 천민 출신의 하(何)씨를 황제의 후비(后妃)로 밀어올리고 그녀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皇后)가 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영제가 죽은 후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하씨의 아들이 한의 소제(少帝)로 등극하면서 하황후는 태후가 되고 그녀는 오빠 하진(何進)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주었다. 하씨들이 새로운 외척세력이 되면서 환관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세력과 힘을 합하여 환관세력을 없애려 하였다. 이때 하진에게 동조한 인물 중에는 하북의 유명한 사족(士族)출신인 원소(袁紹)와 서량의 동탁(董卓)등이 있었다. 그러나 하진의 모의를 알아챈 환관들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하진을 죽이고 그 일족을 몰살하는 이른바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환관들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명분을 주었다. 이미 군대를 동원한 원소 등은 황궁에 난입하여 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2000명의 환관이 참살당했고 이로서 조정을 뒤흔들던 환관들의 세력이 꺾였다. 그러나 환관토벌을 명분으로 같이 거병하였던 서량의 동탁은 수도인 낙양에 들어오자마자 소제를 폐하고 그 동생인 진류왕을 헌제(獻帝)로 세웠다. 이에 원소 등은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군을 결성하고 동탁은 이를 피하여 서한(西漢)의 수도이던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외척과 환관들이 암투를 벌이는 동안 매관매직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변방의 장수들은 거의 독립세력이 되었으며 주목(州牧)들의 권한이 급상승하면서 조정이 통제하기 힘든 지방세력이 곳곳에 생겨났다. 원소가 결성한 호족연합군중 대부분이 한 지역을 장악한 주목이나 자사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동원한 군대를 해체하지도 않았고 이를 기반 삼아 혼란한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백성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났고 대호족들은 더 많은 땅을 점유하게 되었다. 후한은 점차 기존의 체제로는 유지가 어려운 한계상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
황권(皇權)의 약화, 외척의 전횡, 환관들의 득세, 이로 인한 백성들의 이반, 그리고 중앙의 약화를 틈탄 지방세력의 강화로 동한 왕조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구원을 갈망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태평도(太平道)였다. 태평도는 하북성 출신의 장각(張角)이란 인물이 창시한 도교 계통의 종교로서 신앙과 부적을 통한 기복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내세우며 혼란과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교단 자체는 장각이 만들었지만 태평도는 [삼국연의]에도 등장하는 도사인 우길(于吉)의 사상과 저서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 하북성에서 시작한 태평도는 백성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불과 수 년 만에 화북과 하남 지역에서 신도 수십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는 일부 환관들과 관리들과 결탁하여 중앙정부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84년에 본격적인 봉기의 기치를 올린다. 장각은 당시에 유행하던 오행종시설(五行終始說)을 이용하여 한나라의 상징이 불(火)이기 때문에 화의 기운이 다하면 흙(土)이 성(盛)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태평교도들은 창천(푸른 하늘)로 대변되는 한조(漢朝)가 망하고 황천(누런 하늘)이 도래한다며 누런색을 스스로의 상징으로 삼아 누런 색의 띠를 머리에 둘렀고 이 때문에 황건당(黃巾黨)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바로 태평도의 난(亂), 또는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장각이 일으킨 난은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그리고 말세론적 교리가 주는 강력함으로 인하여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등 화북지방뿐만 아니라 현재의 호북, 안휘등 양자강 유역으로도 급속히 퍼졌다. 확산속도가 빠른데다가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아 고질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동한조정은 단독으로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이 당시 동한조정은 십상시 세력이 일으킨 당고의금 사태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힘을 잃고 물러나있었다. 이때 지방의 태수로 있던 황보숭이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황제의 재산과 궁궐의 말들을 토벌을 위하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황제는 이런 무례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 황궁수비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의 군단이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황제는 대규모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황보숭과 같은 지방세력가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러나 황보숭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공짜로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황건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과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이 전투에서 황보숭과 주준이 공을 세워 정계의 실세가 됨은 물론 기도위(騎都尉)의 벼슬에 있던 조조라는 젊은이가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토벌군을 구하는 공을 세워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황보숭의 토벌군은 여남과 창정 지역의 황건집단도 연이어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해 말에 장각의 동생들인 장량과 장보의 집단을 각각 무찔렀다. 이로서 황건군은 그 구심점을 잃고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황건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종교적인 운동이었던 탓도 있지만 군사적인 요인도 있다. 종교적인 운동으로 시작한 황건집단의 종교이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좋았지만 이들을 조직화된 군대로 유지하기 위한 행정이나 보급, 군사훈련의 체계를 세우지 못하였다. 교단이 아닌 통일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없었기에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활동한 지방의 봉기군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탈에 의존하였고 이는 자신들의 기반이었던 농민들을 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황건의 난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로서의 작용을 하였다. 태평도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무능은 더욱 돋보였고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방세력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누런 하늘은 서지 못하였지만 이들이 촉발한 거대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푸른 하늘은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의미
삼국시대는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고 유력한 세력끼리 싸움을 벌이다가 가장 강한 나라가 통일을 하는 중국사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하다. 삼국시대는 단순히 위-촉-오 삼국의 쟁패로만 설명될 수 없다. 삼국시대는 사실 이후 전개되는 중국사의 구도를 결정하였다.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인하여 천자의 당위적 권위는 실종되고 지방세력의 발호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북방과 서방에 있던 이민족들이 중원에 대거 진출하며 연의에 묘사된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혼돈과 분열, 그리고 파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한나라가 열리면서 구축하고자 하였던 안정적인 질서가 실종되고 세력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중국사에서는 고대의 천명(天命)은 예전에 있었던 당위성을 상실하고 다만 실제의 힘을 가장하는 명분론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이민족의 유입과 함께 한인(漢人)들이 이전에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삼국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에는 한족과 이민족의 혼합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보다 정교한 중화주의적 이념이 등장하였다. 즉 한족의 문화적 개념인 ‘중화’를 중심으로 사방의 이민족을 정복/교화하는, 또는 설령 한인들이 패하더라도 이민족을 한족의 ‘위대한’ 문화로 감화시키는 중국인의 천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군웅할거, 화북과 강남
동한 왕조가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후 각축을 벌이게 되는 세력은 크게 화북세력, 강남세력, 관중/서량세력, 그리고 파촉세력으로 나뉠 수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당시 대부분의 농경지와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화북(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 하남)이었다. 이 지역의 주요 군웅들을 살펴보자면 현재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부에서 세력을 구축한 공손찬, 현 하북성에서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명문귀족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지닌 원소, 그리고 하남과 산동 일부의 본거지에서 힘을 키우던 조조였다.
앞서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 유협을 헌제(獻帝)로 세우자 각지의 자사들과 주목들이 동탁의 토벌을 명분으로 하는 토벌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탁은 본격적으로 싸우는 대신 189년에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헌제를 서한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기고 아예 장안을 수도로 선포하였다. 낙양이 황폐화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동한 조정의 권위는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었고 동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려던 자사들과 주목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동탁은 천자를 끼고 서량과 관중을 토대로 권력을 다시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192년에 부하장수 여포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그의 세력 역시 지리멸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