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힘을 과시하듯 한때 천하제일의 명장이었던 장한의 옹진을 포함한 삼진(三秦)을 격파한 한나라는 진격을 계속, 은왕 사마앙, 서위왕 위표 등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면서 기원전 205년 3월에는 서초를 압도하는 병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항우가 없는 서초의 수도, 팽성을 공격했다. 56만의 대군 앞에 팽성은 함락되었고, 초-한 전쟁은 이처럼 싱겁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제나라를 내버려두고 3만의 정예병력만 추려 전속력으로 남하했다. 정예군에 의한 특유의 돌파력에다 길을 우회하여 팽성의 북쪽 대신 서쪽에서 들이치는 기습공격까지 가미되니 기세 등등하던 유방도 속수무책이었다. 퇴각하는 유방군을 항우군은 추격하여 수수 강가에서 다시 한 번 대패시켰는데, 유방은 겨우 수십 기만 거느리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한군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걸 보자 여러 왕국들도 다시 초나라에 붙어, 국면은 순식간에 초나라의 압도적 우위로 바뀐 듯했다.
세 개의 전선
그런 우위를 깨트린 것은 구강왕 영포와 제나라에서 항우에 대항하며 유격전을 펼치던 팽월이었다. 장량의 계책에 따라 유방은 이들을 회유할 사신을 보냈고, 성공했다. 이들의 공격 덕분에 유방에 대한 초나라의 공세는 주춤했으며, 고립되어 고사 직전까지 몰렸던 유방은 한숨을 돌리고 형양으로 나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한편 한신은 별도의 병력으로 북진하여 위나라, 조나라, 그리고 제나라를 공략해 나가고 있었다. 항우조차 하기 힘들었던 이 공략을 그는 끝내 이뤄냈으며, 그런 점에서 군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천재성은 공인되었다. 그는 중원 북동부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한편 남쪽에서 항우와 대치 중인 유방에게 병력을 계속 공급해 주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4년에서 203년까지 전선은 대략 셋으로 갈라져, 북쪽에서 한신(및 팽월), 중앙에서 유방, 남쪽에서 영포가 항우에 대적하면서 삼진 쪽을 맡고 있던 소하가 보내는 보급으로 전력을 유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유방에게 딱히 최선은 아니었다. 모사 괴통이 “천하삼분지계”를 올렸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장악한 한신은 그만큼 유방에 대해 독자성을 갖고 움직이게 되었다. 팽월과 영포도 반드시 유방에게 협력할 의리는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할 때만 해도 이들이 소환에 응하지 않아서, 따로 벼슬과 포상을 약속한 뒤에야 비로소 병력을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항우처럼 믿을 수 있는 전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에 기초하여 움직였던 유방 전략의 한계점이었다. 유방은 이런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항우를 물리치기만 하면 6국 재건의 명분을 팽개칠 뿐 아니라 군공에 따른 분봉이라는 원칙도 무시하고, 진나라와 같이 한 사람이 천하를 독점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런 맹점을 항우가 파고들어, 한신과 영포, 팽월을 한나라에 등지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영포와 팽월은 지나치게 “내 편”을 따지며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 항우의 성격을 잘 알았으므로 회유의 가능성이 적었다. 한신만은 초나라에 종속하라는 게 아니라 대등한 관계가 되어 공존하자는 선에서 회유 가능성이 있었고, 항우의 사자가 실제로 그런 뜻을 전했으나, 용병만큼 전략에는 밝지 못했던지, ‘사나이의 의리’인지, 한신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믿어 준 한왕을 배신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사면초가 속에 우희와 결별하다
항우는 한때 형양의 유방을 효과적으로 몰아붙여 그가 기신에 의한 거짓 항복이라는 구차한 술책으로 달아나도록 할 만큼 승세를 잡기도 했으나, 세 개의 전선에서 적을 상대하게 된 이상 좀처럼 통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유방에게 “너와 내가 일기토를 하여 전쟁을 끝장내자”고 제의하기도 하고, 유방의 부모를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기도 했으나 모두 유방에게 기만당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 항우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한신도 영포도 아닌, 팽월이었다. 그는 동쪽에서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항우의 보급선을 곧잘 차단했다. 소하의 풍족한 보급을 누리고 있는 한군에 비해 초군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항우는 직접 팽월을 격파하기로 하고 본거지인 성고를 나섰다. 그러나 그 사이에 유방군의 도발에 넘어간 초군의 조구가 패배, 성고를 점령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온 항우는 한군을 다시 물리쳤지만, 많은 장수와 병력을 잃었으며 그나마 비축해 둔 식량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 한계라고 느낀 항우는 유방 측의 평화협정 제의에 응했고, 홍구를 기준으로 동쪽은 초, 서쪽은 한의 영역이라는 합의문을 인정했다. 그리고 우호의 표시로 인질로 잡아온 유방의 식구를 풀어 주었으나, 유방은 항우군이 말머리를 돌리자마자 추격 명령을 내렸다. 인도적으로는 못할 일이지만,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는 병법에 충실한 결정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력이 많이 줄었으나, 일단 항우가 본거지인 강동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그 전에 결판을 내야 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