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버클리의 생각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우리 상식과 어긋나는 정교한 궤변처럼 들린다. 도대체 왜 버클리는 외부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실마리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있다. 그는 주체와 독립적인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부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두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첫 번째 단계는 외부 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야기된 표상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다. 각 단계는 틀릴 수 있는가? 착각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솥뚜껑인데 자라로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단계에서 솥뚜껑이라는 외부대상이 자라라는 표상을 야기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자라라는 표상을 당신은 지각한다. 두 번째 단계는 잘못될 수 없다. 당신에게 솥뚜껑처럼 보이는 것을 당신은 자라라고 지각할 수 없다. 착각은 두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즉 솥뚜껑이라는 외부대상이 잘못된 표상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 단계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우리는 획득할 수 없다. 즉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회의주의로 인도한다. 그럼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가? 그렇다면 첫 번째 단계, 즉 외부 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단계가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회의주의가 발붙일 곳이 사라진다. 이렇게 외부 대상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버클리의 의도였다.
그럼 무신론은 어떤가? 외부대상의 존재가 왜 무신론으로 이끄는가? 그건 다소 간단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외부대상은 독립적인 외부 대상이다. 독립적이기에, 외부 대상은 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신은 이제 필요 없게 된다. 그럼 반대로, 외부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떻게 유신론으로 이끄는가? 버클리는 대상의 존재는 모두 지각 주체 의존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주장은 상식과 맞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고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이 사라지지 않는다. 컴퓨터로 중요한 작업을 하다가 사무실에 컴퓨터를 두고 밥을 먹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더 이상 컴퓨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든 파일과 내가 모아둔 중요한 자료들은 밥을 먹는 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생각은 너무 이상하다. 우리 상식으로부터 너무 벗어났다.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부장은 여전히 있으며,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컴퓨터는 여전히 있다. 버클리는 이런 상식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대상들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 된다. 비록 나는 보고 있지 않지만, 다른 것이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와 독립적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대상들을 계속 지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이다. 비록 나는 눈을 감아 부장의 얼굴을 보지 않지만, 신이 부장을 보고 있기 때문에 부장은 계속 존재한다. 비록 밥을 먹으로 나가 컴퓨터를 보고 있지 않지만, 신이 컴퓨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는 계속 존재한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면, 신을 불필요해진다. 하지만 외부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면, 신은 반드시 필요해진다. 우리는 유신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신에 대한 버클리의 주장은 어떤가? 그럴싸한가? 너무 성급해보이지 않는가? 버클리 철학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상식 밖이지만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그의 논리에 감탄한다. 하지만 이런 감탄은 마지막에 도입된 신 때문에 금방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를 철저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린 것 같은 인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버클리에게는 훌륭한 학문 후속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데이비드 흄이다. 그는 버클리의 경험주의를 보다 철저하게 밀고나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버클리의 시도를 계승한 흄은 결국 철학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회의주의자 중에 한 명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