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 존재와 지각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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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 존재와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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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77회

본문

혹시 철학이 그저 말장난처럼 보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철학적 주장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나? 사실 몇몇 철학적 주장들은 너무 뻔하다. 가령, 진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반면에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를 생각해보자. 이 말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너무 당연해, 특별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그저 말잔치에 불과해 보인다. 한편으로 몇몇 철학적 주장은 너무 터무니없어 보인다.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주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변하고 있다. 당신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늙어가고 있으며, 당신이 있는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이렇듯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만약 이런 것이 철학적 주장이라면, 철학은 장난스럽게 궤변을 일삼는 고약한 취미인 듯이 보인다. 이렇게 철학은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철학자들은 당연한 것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럴 때 우리는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단지 말장난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은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당신 그리고 이 세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이런 의심의 끝에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것들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런 거듭된 의심을 이용해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상식 밖에 있는지 밝혀내려고 한다. 그리고 상식 밖의 주장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증명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철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당연해 보이는 것을 비판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옹호한다. 심지어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상식적이라고까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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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근대 경험론의 핵심적인 인물인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 753)다.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그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 704)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사이에 있다. 로크는 버클리가 비판하게 될 상식적인 주장을 정립한 사람이며, 흄은 버클리의 상식 밖의 주장을 더 철저하게 밀고 나간 사람이다. 버클리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위 버뮤다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것이다. 당시 버클리가 보기에 영국은 영적으로 타락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버클리는 버뮤다에 대학을 세울 계획을 짠다. 그리고 스스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으로부터 약속 받았던 자금 지원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버클리는 성공회 주교가 되어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철학자로서 버클리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대부분 20대 중반에 쓰인 것이다. 이상하게도 60대 버클리 주교는 다소 엉뚱한 일에 몰두한다. 당시 그는 타르-물(tar-water)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의 과학적 근거를 밝히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 결과 출판된 책이 버클리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시리스Siris』다.
한편 버클리의 철학적 주장이 담긴 책으로는 [인간 지식 원리론(Treatise concerni 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과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Thr 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철학적 주장은 상식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이런 점이 오히려 버클리 철학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했는가다. 이제 이것에 대해서 언급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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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해 보이는 것을 비판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옹호한 철학자 조지 버클리.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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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버클리의 상식 밖의 주장은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된다. 데카르트에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 m.)’가 있다면, 버클리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가 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말은 ‘지각되는 것만 존재한다.’, 혹은 ‘지각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선 ‘지각(perception)’이란 말을 이해하자. 어렵지 않다. 그냥 감각 기관을 통해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시각만을 생각해보자. 아주 거칠게 말해, 시각이라는 지각은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각된 것만 존재한다.’,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보이는 것만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결국 버클리가 주장한 ‘Esse est percipi.’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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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의 철학적 주장이 담긴 [인간 지식 원리론].
<출처: wikipedia>

그럴싸한가? 상식적인 주장처럼 들리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당신이 사용하는 컴퓨터 속에는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뿐이다. 당신은 지금 마더보드를 보고 있지 않다.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자. 그럼 당신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니터뿐이다. 당신의 컴퓨터 속 마더보드, CPU, 랜카드 등등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 이상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른한 오후다.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잠이 쏟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 바로 앞자리에 고약한 부장이 앉아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 “부장만 없다면 한숨 푹 잘 텐데.” 버클리라면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할까? 단순하다. “눈 감아!” 버클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눈을 감으면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편하게 잠들면 된다. 물론, 당신이 눈을 뜨는 순간 부장을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다. 신장이나 간과 같은 장기를 이식 받았을 때, 나의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이식 받기 전이나 이식 받은 후나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지 않는 장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뇌다. 뇌를 이식했다고 생각해보자. 뇌를 이식받기 전과 이식 받은 후는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럽다. 이런 이유에서 뇌는 나의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다. 즉 뇌가 달라진다면 나도 달라진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뇌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나의 뇌를 본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버클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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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하자.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주장이 얼마나 상식 밖 주장인지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버클리의 말이 단지 장난스러운 궤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보다 자신의 주장이 훨씬 더 상식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버클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분명히 무언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 버클리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약간의 섬세한 사고가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답은 당연히 컴퓨터인가? 그러나 이 답은 애매하다. 당신은 컴퓨터라는 어떤 기계 덩어리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눈에 맺힌 컴퓨터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가? 당신이 지금 TV 버라이어티 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개그맨 유재석이 나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재석인가, 아니면 유재석이 비친 TV 화면인가? 당연히 당신은 유재석 그 자체가 아니라 유재석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당신은 지금 컴퓨터를 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보고 있는 것은 컴퓨터 그 자체가 아니라 컴퓨터가 눈에 맺힌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그런 이미지와 같은 것을 철학적 용어로 표상(representation) 혹은 관념(idea)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우리의 지각은 두 가지―표상(혹은 관념)과 그것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 대상―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듯이 보인다. (물론,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각하는 주체, 즉 나다. 버클리는 이런 지각 주체의 존재 역시 인정한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고자 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거나 지각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로 바뀌어야 한다.)
다시 버클리의 생각으로 돌아가자. 그는 ‘보이는 것만 있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표상 혹은 관념이다. 따라서 버클리의 주장은 ‘표상(혹은 관념)만 있다.’, ‘표상(혹은 관념)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이 된다. 위에서 지각은 외부 대상과 표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즉 둘 다 있다는 것이 우리 상식과 일치한다. 하지만 버클리는 표상이 아닌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외부대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외부대상과 표상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당신과의 관계다. 당신 앞에 당신의 연인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고 하자. 그리고 반복적으로 눈을 깜박거려보자. 분명 무엇인가는 계속 있고, 무엇인가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다행스럽게도 사랑스런 당신의 연인은 당신이 눈을 감든, 뜨는 상관없이 당신 앞에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눈을 감으면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을 뜨면 사랑스런 연인의 모습은 나타난다. 표상은 당신 연인의 모습에 해당한다. 그리고 외부대상은 당신의 연인 그 자체에 해당한다. 표상과 외부 대상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당신에 의존하는지 여부다. 당신의 연인 그 자체의 존재는 당신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연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당신에게 의존한다. 철학에서는 당신과 같이 지각하는 것을 지각 주체라고 부른다. 그럼 우리는 표상은 지각 주체에 의존하지만, 외부대상은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버클리가 외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듯 지각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각 주체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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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는 ‘보이는 것만 있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출처: NG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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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버클리의 생각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우리 상식과 어긋나는 정교한 궤변처럼 들린다. 도대체 왜 버클리는 외부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실마리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있다. 그는 주체와 독립적인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부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두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첫 번째 단계는 외부 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야기된 표상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다. 각 단계는 틀릴 수 있는가? 착각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솥뚜껑인데 자라로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단계에서 솥뚜껑이라는 외부대상이 자라라는 표상을 야기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자라라는 표상을 당신은 지각한다. 두 번째 단계는 잘못될 수 없다. 당신에게 솥뚜껑처럼 보이는 것을 당신은 자라라고 지각할 수 없다. 착각은 두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즉 솥뚜껑이라는 외부대상이 잘못된 표상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 단계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우리는 획득할 수 없다. 즉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회의주의로 인도한다. 그럼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가? 그렇다면 첫 번째 단계, 즉 외부 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단계가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회의주의가 발붙일 곳이 사라진다. 이렇게 외부 대상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버클리의 의도였다.
그럼 무신론은 어떤가? 외부대상의 존재가 왜 무신론으로 이끄는가? 그건 다소 간단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외부대상은 독립적인 외부 대상이다. 독립적이기에, 외부 대상은 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신은 이제 필요 없게 된다. 그럼 반대로, 외부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떻게 유신론으로 이끄는가? 버클리는 대상의 존재는 모두 지각 주체 의존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주장은 상식과 맞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고 앞에 있는 고약한 부장이 사라지지 않는다. 컴퓨터로 중요한 작업을 하다가 사무실에 컴퓨터를 두고 밥을 먹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더 이상 컴퓨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든 파일과 내가 모아둔 중요한 자료들은 밥을 먹는 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생각은 너무 이상하다. 우리 상식으로부터 너무 벗어났다.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부장은 여전히 있으며,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컴퓨터는 여전히 있다. 버클리는 이런 상식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대상들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 된다. 비록 나는 보고 있지 않지만, 다른 것이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와 독립적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대상들을 계속 지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이다. 비록 나는 눈을 감아 부장의 얼굴을 보지 않지만, 신이 부장을 보고 있기 때문에 부장은 계속 존재한다. 비록 밥을 먹으로 나가 컴퓨터를 보고 있지 않지만, 신이 컴퓨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는 계속 존재한다. 외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면, 신을 불필요해진다. 하지만 외부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면, 신은 반드시 필요해진다. 우리는 유신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신에 대한 버클리의 주장은 어떤가? 그럴싸한가? 너무 성급해보이지 않는가? 버클리 철학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상식 밖이지만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그의 논리에 감탄한다. 하지만 이런 감탄은 마지막에 도입된 신 때문에 금방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를 철저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린 것 같은 인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버클리에게는 훌륭한 학문 후속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데이비드 흄이다. 그는 버클리의 경험주의를 보다 철저하게 밀고나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버클리의 시도를 계승한 흄은 결국 철학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회의주의자 중에 한 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