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 - 문학의 사회적 기능 > 전해주는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열기
공부대통령 공부이야기 입시아카데미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30159_355.jpg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29628_9221.jpg

 

앙가주망 - 문학의 사회적 기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86회

본문

사람들은 오래도록 문학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해 물어왔다. 서구에서 이 물음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앙가주망문학, 참여문학론이란 이름 아래 여러 갈래로 해답을 모색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이다. 대표적이라 평가하는 까닭은 그가 1947년 세상에 내놓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라는 저작을 통해 누구보다도 이 개념을 폭넓고도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거기에 명확한 의미를 불어 넣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 문학의 정치적·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많은 부분 사르트르의 논의를 옹호·수정·반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2049587376_PSojY3Bg_re_ba01.jpg
앙가주망이란 무슨 뜻인가? 사전을 펼쳐보면 ‘engagement’은 약속, 책임, 약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일반적으로 ‘무엇엔가 연루되어 있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 이 개념을 적용할 경우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일까?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해의 실마리를 준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어든 이상, 작가는 말할 줄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법이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일깨우는 것은 우리는 세계에 책임이 있다는 것, 즉 ‘상황’이라는 말로도 일컬어지는 ‘세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의미’에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언어가 운반하는 의미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앙가주망은 상황과 의미 양자에 대한 연루 및 이 연루를 문학을 통해 일깨우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작가란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이런 연루를 드러내기를 선택한 자이다. “한 작가가 진실로 참여하는 것은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투철하게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의식하려고 애쓸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자연적인 연루를 반성적인 연루로 전환할 때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작가는 신들림 같은 것을 통해 저도 모르게 마술적인 언어를 쏟아내는 자가 아니라, 상황에 연루된 인간의 운명을 드러내는 소명을 ‘선택’한 자이다. “작가는 결연한 의지와 선택과 저마다 삶을 추구하는 전체적 기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2049587376_Z6UjzcbL_re01.jpg
‘앙가주망’이라는 개념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명확한 의미를 불어넣은 사르트르.
<출처 : Wikipedia>
2049587376_msFVYU9i_ba02.jpg
그렇다면 문학이 이 ‘연루’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나 자신과 남들에게 상황을 드러낸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우리가 연루되어 있는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상황에 대해 중립적인 묘사를 하는 데 그치고 마는 글쓰기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연루되어 있는 상황의 의미를 ‘나는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기술했다고 해보자. 이 문장은 나 자신의 상황을 그저 묘사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不)’이라는 ‘부정’이 알려주는 것처럼 나의 상황에 대한 불만을 피력하고 비판을 수행하므로써 나의 상황을 초극하려는 하나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즉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이 행동으로서의 말은, 연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 판단(“불행하다”)을 포함하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세계를 기술하는 모든 문장은 몰가치적인 묘사 속에서가 아니라, 이렇게 세계를 바꾸려는 비판적 판단문 속에서만 세계의 참된 면모를 드러낸다. “우리는 세계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편이며, 세계는 오직 그것을 바꾸려는 기도 앞에서만 그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행위의 대상으로 삼을 때 세계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은 다음과 같이 예화될 수 있다. “우리가 장도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무엇을 박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때이다. 마찬가지로 못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벽에 못질을 할 때이며, 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도 거기에 못을 박을 때이다.” 장도리나 못과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우리의 행위의 대상이 될 때 그 참된 모습을 가장 잘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2049587376_7wMLz4pf_ba03.jpg
인간이 이렇게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수행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글쓰기는 자유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무엇을 위한 참여냐고 물을 것이다.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라고 당장에 대답함 직하다.” 그런데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초탈(超脫)하고 자신을 해방시키는 움직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아까의 예로 돌아가 보자. “나는 불행하다”라는 진술은 일종의 자유를 실현하려는 행위를 담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다’라는 가치판단 자체를 통해,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해방되려 하기 때문이다.
2049587376_Dxj7Tskv_02.jpg
씌어진 글의 의미는 읽혀짐을 통해서만 비로소 구현된다. <출처 : NGD>

그런데 이런 자유의 실현으로서의 글쓰기는 오로지 작가 혼자에게만 떠맡겨진 과제일까? 그렇지 않다. 작가가 마주한 타자, 즉 독자의 자유가 작가에게 협력하지 않고는 결코 글쓰기는 완성될 수가 없다. “예술은 타인을 위해서만,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씌어진 글의 의미는 읽혀짐을 통해서만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쓰여진 글은 독자의 자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결코 미리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씌어진 것을 부단히 초월하면서 발명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여 그의 작품의 산출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속에서 실현되는 인간의 자유란, 자유를 본질로 삼는 두 존재인 작가와 독자의 협력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전제 조건은 바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삶의 틀인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산문이라는 예술은 산문이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제도, 즉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2049587376_SOs0my5U_ba04.jpg
이렇게 글쓰기는 인간의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며 이 목적을 위해, 주어진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명확한 의미를 실어 나른다. 그리고 글쓰기가 의미를 실어 나를 때 그것은 중립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비판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보자면, 참여문학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글은 바로 산문이다. 왜냐하면 산문만이 어떤 상황의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산문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실용성이란 다름 아니라 의미 전달의 기능을 뜻한다. 실용성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므로, 산문에서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요소는 이렇게 평가 절하된다. “산문에 있어서는 미적 쾌감은 덤으로 올 때만 순수한 것이다.”

의미전달이라는 실용적 기능을 수행하는 산문이 이상적으로 참여문학에 적합하다는 사르트르의 논의는 ‘시적인 것’의 위상과 관련하여 많은 난점과 의문을 초래해왔다. 가령 이런 의문들.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의 이상에 걸맞은 산문이 의미전달에 충실한 실용적인 것이라면, 시적 문체를 구사하는 소설들보다는, 신문 기사나 현장 르포 같은 것이 참여문학의 모범이 아닐까? 예술의 근본적 면모 가운데 하나가 ‘비실용성’이라면 근본적으로 참여문학론으로부터 예술은 소외되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의미전달을 의도하지 않는 시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2049587376_Xq8yRmWS_ba05.jpg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의 참여’ 문제를 다루는 페이지들은 사르트르의 저작에서 짧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의미전달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글, 즉 시 또는 시적인 것은 산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다. “시에 있어서는 패자(敗者)가 곧 승자이다.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만일 구태여 시인의 참여를 들먹여야 한다면, 시인이란 패배를 향하여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두자. 시인이 항상 내세우는 액운과 저주의 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은 일상적인 용법에서 언어를 유리시킴으로써 세계의 무의미, 언어의 무의미, 도구적 가치나 실용성의 무의미를 드러내는 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세계의 근본적인 국면을 보여준다. 과거 종교적 사회에선 인간이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겪는 좌절의 가치를 종교가 부각시켰다면, 현대의 세속적인 사회에서 모든 실용적 차원의 성공들의 무의미함을 깨닫고서 인간이 겪는 좌절은 ‘시’가 부각시킨다. 시는 좌절을 겪는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 국면을 보여주는 예술인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의 정치적·사회적 기능에 대한 빛나는 성찰들은 얼마간 이러한 사르트르의 시론(詩論)에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참여문학론이 의미전달이라는 실용적 차원이 아니라, 의미와 문법 및 도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이탈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문학의 언어가 좌절과 시련을 겪으면서 정치적 위상을 획득하는지 해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가령 들뢰즈는 언어의 일탈적인 소수적 사용을 설명하며 “소수적 쓰임새에 의해서 구멍 나지 않을 제국적 언어는 없다”고 그 정치성을 부각시킨다. “글을 쓰기 위해 아마도 모국어는 불쾌한 것이지만, 어떤 통사적 창조가 거기서 일종의 외국어를 그려나가도록, 그리고 언어 전체가 모든 통사법을 넘어 자신을 바깥에서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제도나 문법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 안에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익명적이고’ 일탈적인 것이 되며, 이러한 언어는 기존의 정치와 사회의 문맥 안에 해방의 길을 열어줄 동공(洞空)을 만들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없는 익명의 언어는 가령 아감벤 같은 철학자가 ‘은어’라는 명칭 아래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일탈적인 은어의 정치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임무가 분명히 인민들을 국가 정체성으로 재코드화하거나, 은어를 문법으로 구축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적인 것이 될 때 언어는 기존의 의미 교환망을 끊고 달아난다. 문법을 파괴하며 의미전달이라는 ‘기능을 벗어나며’, 문법과 의미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마저 위태롭게 한다. 이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언어가 어떻게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문학의 ‘기능 없는 기능’이 어떻게 가능한가? 최근의 참여문학론은 이런 질문과 더불어 고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