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의 참여’ 문제를 다루는 페이지들은 사르트르의 저작에서 짧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의미전달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글, 즉 시 또는 시적인 것은 산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다. “시에 있어서는 패자(敗者)가 곧 승자이다.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만일 구태여 시인의 참여를 들먹여야 한다면, 시인이란 패배를 향하여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두자. 시인이 항상 내세우는 액운과 저주의 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은 일상적인 용법에서 언어를 유리시킴으로써 세계의 무의미, 언어의 무의미, 도구적 가치나 실용성의 무의미를 드러내는 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세계의 근본적인 국면을 보여준다. 과거 종교적 사회에선 인간이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겪는 좌절의 가치를 종교가 부각시켰다면, 현대의 세속적인 사회에서 모든 실용적 차원의 성공들의 무의미함을 깨닫고서 인간이 겪는 좌절은 ‘시’가 부각시킨다. 시는 좌절을 겪는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 국면을 보여주는 예술인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의 정치적·사회적 기능에 대한 빛나는 성찰들은 얼마간 이러한 사르트르의 시론(詩論)에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참여문학론이 의미전달이라는 실용적 차원이 아니라, 의미와 문법 및 도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이탈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문학의 언어가 좌절과 시련을 겪으면서 정치적 위상을 획득하는지 해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가령 들뢰즈는 언어의 일탈적인 소수적 사용을 설명하며 “소수적 쓰임새에 의해서 구멍 나지 않을 제국적 언어는 없다”고 그 정치성을 부각시킨다. “글을 쓰기 위해 아마도 모국어는 불쾌한 것이지만, 어떤 통사적 창조가 거기서 일종의 외국어를 그려나가도록, 그리고 언어 전체가 모든 통사법을 넘어 자신을 바깥에서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제도나 문법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 안에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익명적이고’ 일탈적인 것이 되며, 이러한 언어는 기존의 정치와 사회의 문맥 안에 해방의 길을 열어줄 동공(洞空)을 만들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없는 익명의 언어는 가령 아감벤 같은 철학자가 ‘은어’라는 명칭 아래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일탈적인 은어의 정치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임무가 분명히 인민들을 국가 정체성으로 재코드화하거나, 은어를 문법으로 구축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적인 것이 될 때 언어는 기존의 의미 교환망을 끊고 달아난다. 문법을 파괴하며 의미전달이라는 ‘기능을 벗어나며’, 문법과 의미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마저 위태롭게 한다. 이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언어가 어떻게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문학의 ‘기능 없는 기능’이 어떻게 가능한가? 최근의 참여문학론은 이런 질문과 더불어 고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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