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가우가멜라 전투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전갈을 보내어 지금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한 땅을 모두 인정할 터이니 다리우스 자신은 동방의 왕,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서방의 왕이 되어 평화롭게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목표가 “땅 끝까지”였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병사들에게는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선대(先代)의 복수를 하자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더더욱 다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전(全) 아시아의 대왕’이라고 하며 다리우스 보고 이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결전(決戰)을 하던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다리우스는 전국에 영을 내리고 각지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 와중에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 군을 몰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그리스 헬레니즘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마케도니아에서 뛰어나온 알렉산드로스와 BC 550년에 키루스 대왕에 의하여 건국된 이래 220년간 오리엔트의 패자로 군림해온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중왕 다리우스 3세가 대전(大戰)을 치르기 위하여 만난 것은 현재 이라크 북부 텔-고멜이라는 지역으로 추정되는 가우가멜라(또는 아르벨라였다).
BC 331년 10월 1일, 알렉산드로스의 4만 7천 마케도니아군과 다리우스의 25만 대군은 가우가멜라에서 격돌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제국 전역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모두 포함된 거국적인 대군이었다. 페르시아군을 구성하고 있던 민족들을 보자면 이란 북부의 메데아, 현 우즈벡/아프간 지역인 박트리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터키 고원지방의 카파도키아인, 현 키르기스/타지크를 포함하는 소그드, 인도 북부의 유목족들인 사카족, 박트리아 남쪽에 있는 아라코시아, 그리고 본토 인도인, 심지어 그리스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병종 역시 다양하여 단창을 던지고 팔매질을 하는 경보병, 불사자(不死者) 근위대와 그리스 용병들로 구성된 중보병, 사카인들과 같은 경기병, 박트리아 출신의 중기병,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전차병, 그리고 수많은 궁병들이 동원되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은 기병, 중보병, 경보병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모두 헬라인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군 전체를 앞으로 움직였다. 양 옆에서 뛰쳐나와 측면을 칠 것으로 예상되는 페르시아의 기병대에게 각도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리우스는 기병이 제대로 기동하지 못할 경우와, 그가 전차들의 기동을 위하여 닦아놓은 지역을 마케도니아군이 벗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병 선봉대를 보내 마케도니아군의 움직임을 견제하려 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의 측면에 있던 기병이 이를 한번 막았지만 페르시아 기병은 재차 공격하였고 마케도니아군의 우측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다리우스는 황급히 칼 달린 전차를 돌격시켰지만 마케도니아군 투창병들이 창을 날려 전차를 모는 병사들을 죽였다. 일부 전차는 마케도니아군 대형에 난입하기는 하였으나 선두의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은 살짝 비켜나 전차들이 지나가게 하였고 전차병들은 뒤에 있던 페쩨타이로이(장창병)들의 사리사 장창에 꼬치처럼 꿰어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