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전쟁 (2) - 제국적 헬레니즘을 꿈꾸다 > 전해주는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열기
공부대통령 공부이야기 입시아카데미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30159_355.jpg


5d3edd3d579f28d5b4b84e93f29d0215_1596529628_9221.jpg

 

알렉산드로스 전쟁 (2) - 제국적 헬레니즘을 꿈꾸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86회

본문

 
2049587376_ySOhwm9J_line.jpg

알렉산드로스 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 마케도니아vs그리스
2단계 : 마케도니아/그리스vs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3단계 : 마케도니아/그리스vs 페르시아잔존세력/파우라바 왕국
전쟁시기
기원전 338-기원전 323
전쟁터
그리스 본토, 동부 지중해 연안, 메소포타미아-이란,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일대
주요전투
카이로네아 전투, 그라니쿠스강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페르시아 관문 전투, 히다스페스 전투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가우가멜라 전투
2049587376_p1esTS3h_7px.jpg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전갈을 보내어 지금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한 땅을 모두 인정할 터이니 다리우스 자신은 동방의 왕,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서방의 왕이 되어 평화롭게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목표가 “땅 끝까지”였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병사들에게는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선대(先代)의 복수를 하자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더더욱 다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전(全) 아시아의 대왕’이라고 하며 다리우스 보고 이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결전(決戰)을 하던지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다리우스는 전국에 영을 내리고 각지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 와중에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 군을 몰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그리스 헬레니즘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마케도니아에서 뛰어나온 알렉산드로스와 BC 550년에 키루스 대왕에 의하여 건국된 이래 220년간 오리엔트의 패자로 군림해온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중왕 다리우스 3세가 대전(大戰)을 치르기 위하여 만난 것은 현재 이라크 북부 텔-고멜이라는 지역으로 추정되는 가우가멜라(또는 아르벨라였다).
BC 331년 10월 1일, 알렉산드로스의 4만 7천 마케도니아군과 다리우스의 25만 대군은 가우가멜라에서 격돌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제국 전역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모두 포함된 거국적인 대군이었다. 페르시아군을 구성하고 있던 민족들을 보자면 이란 북부의 메데아, 현 우즈벡/아프간 지역인 박트리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터키 고원지방의 카파도키아인, 현 키르기스/타지크를 포함하는 소그드, 인도 북부의 유목족들인 사카족, 박트리아 남쪽에 있는 아라코시아, 그리고 본토 인도인, 심지어 그리스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병종 역시 다양하여 단창을 던지고 팔매질을 하는 경보병, 불사자(不死者) 근위대와 그리스 용병들로 구성된 중보병, 사카인들과 같은 경기병, 박트리아 출신의 중기병,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전차병, 그리고 수많은 궁병들이 동원되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은 기병, 중보병, 경보병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모두 헬라인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군 전체를 앞으로 움직였다. 양 옆에서 뛰쳐나와 측면을 칠 것으로 예상되는 페르시아의 기병대에게 각도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리우스는 기병이 제대로 기동하지 못할 경우와, 그가 전차들의 기동을 위하여 닦아놓은 지역을 마케도니아군이 벗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병 선봉대를 보내 마케도니아군의 움직임을 견제하려 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의 측면에 있던 기병이 이를 한번 막았지만 페르시아 기병은 재차 공격하였고 마케도니아군의 우측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다리우스는 황급히 칼 달린 전차를 돌격시켰지만 마케도니아군 투창병들이 창을 날려 전차를 모는 병사들을 죽였다. 일부 전차는 마케도니아군 대형에 난입하기는 하였으나 선두의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은 살짝 비켜나 전차들이 지나가게 하였고 전차병들은 뒤에 있던 페쩨타이로이(장창병)들의 사리사 장창에 꼬치처럼 꿰어 죽었다.
2049587376_NUPmdb10_map04.jpg
가우가멜라 전투도
페르시아 장군 베수스가 추가로 기병들을 투입하자 알렉산드로스는 후방에 있던 기병예비대를 돌진시켜 맞섰고 수천 기병이 차올리는 먼지가 사방에 가득하여 시야를 가리기 시작하였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에서의 기병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다리우스는 그의 기병대 전체를 양 옆에서 동시에 투입하여 마케도니아군을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제대로만 전개되었다면 마케도니아군이 상당한 위기에 처할 수 있었으나 1만이 넘는 기병이 싸우고 있고 먼지가 자욱한 전장이 페르시아군의 기습을 빗나가게 하였다. 마케도니아 중군의 오른쪽을 타격하게 되어있던 기병들은 먼지 속에서 방향을 잃고 베수스가 있는 쪽으로 갔고 비록 마케도니아군 우익은 상당한 곤란에 처하게 되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본대는 전력을 보존한 채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널리 퍼져있던 페르시아군 대형에서 기병대가 뛰쳐나가자 페르시아 군 대열 곳곳에 틈이 생겼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 중간 약간 왼쪽에 생긴 틈을 보고는 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돌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근위기병 뒤로는 엘리트 방패병과 장창병 네 개 대대(taxeis) 6000명 정도가 따라와 공격에 가담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선봉부대는 페르시아 근위병들과 맞닥뜨렸고 뒤따라온 방패병들과 창병들은 전투가 벌어진 곳 뒤를 돌아 페르시아 중군의 정면에 돌입하였다. 싸움이 바로 자신 앞에서 벌어지자 다리우스는 전차를 돌려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공격하기 위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중군과 알렉산드로스의 부장 파르메니오가 있던 우익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페르시아 좌익을 지휘하고 있었던 장군 마제우스가 이 틈으로 돌진하였다. 정예 페르시아 기병과 인도 기병으로 구성된 3000의 기병대는 마케도니아군 보병 예비대를 돌파하여 후방에 있던 짐꾼들과 몰이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기습적인 돌파에 갈팡질팡하던 예비대가 정신을 수습하고 기병대와 싸워 이들을 몰아냈다. 또 일단의 페르시아 기병대는 전장자체를 우회하여 약 10km정도 떨어진 마케도니아군 본영을 기습하여 그곳에 있던 다리우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왕족들을 구출하여 페르시아군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이 와중에 자신 쪽으로 쳐들어온 페르시아 기병에 맞서 싸우고 있던 파르메니오는 악전고투를 거듭하였고 결국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전령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미 다리우스는 멀리 도망친 이후였기에 알렉산드로스는 말머리를 돌려 파르메니오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파르메니오와 싸우고 있던 페르시아군의 수가 상당히 많아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본대가 구원을 온 후에도 한 시간 이상을 치열하게 싸운 후에야 후퇴하였다. 이로써 싸움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마케도니아군은 승리할 수 있었다. 비록 다리우스를 잡지 못하였지만 마케도니아군은 페르시아 군영에 있던 막대한 보물을 차지하였고 이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가는 길에는 마케도니아군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마침내 뚫린 ‘페르시아 관문’
2049587376_p1esTS3h_7px.jpg
많은 전쟁사가들이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에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쓰고 있지만 전투 이후에도 다리우스는 아직도 살아있었고 동방의 영토는 아직도 건재하였기에 다리우스는 아직도 싸울 힘이 충분하였다. 가우가멜라로 인하여 알렉산드로스가 굳힌 영토는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페르시아의 기원지이기도 한 이란지방은 아직도 다리우스의 수중에 있었고 징발할 수 있는 병력이 상당하였다. 가우가멜라에서 패한 후에도 다리우스는 현재 이란의 하마단(Hamadan)인 아크바타나로 가서 다시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다리우스를 죽이거나 사로잡아야 했고 페르시아의 고도(古都)인 페르세폴리스를 차지해야만 했다.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군을 꺾고 차지한 바빌론으로부터 이란 내륙에 있는 페르세폴리스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란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자그로스 산맥에 있는 협곡인 ‘페르시아 관문’을 지나야 했다. 페르시아 관문은 산맥을 통과하는 길옆으로 높은 산이 치솟아 있어 그 길을 따라 지나는 적을 매복공격하기 좋은 지형이었다. 대개의 지휘관이라면 이러한 지형을 지날 때 조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관문으로 향하는 산길은 의외로 넓어 수백 명씩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길의 너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정찰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군을 이끌고 진군을 강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페르세폴리스까지는 자신의 군을 막을 부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페르시아 관문지역에 이르자 지형은 최악으로 변하였다. 시작할 때는 넓었던 길이 불과 수 미터의 폭으로 줄어들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방심에다가 페르시아 관문의 험한 지형은 마케도니아군에게 끔찍한 피해를 강요하였다.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페르시아의 지방 총독인 아리오바르자네스는 지형을 십분 이용하여 관문 지역의 산 위로 병력을 올려 보내어 마케도니아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나타나자 돌을 굴리고 창과 화살을 날렸다. 이전까지 페르시아군과 싸워 진 일이 없었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무수히 쓰러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까마득하게 높은 고지에서 공격하는 적들을 어찌할 수 없었고 좁은 길로 그의 후미 부대들이 몰려들고 있어 퇴각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전진을 고집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단 부대를 물리기로 하였다. 워낙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심하여 마케도니아군은 동료들의 시신은 쓰러진 채 그냥 놔두어야 했다.

2049587376_aAkMJW7v_06.jpg
페르시아 관문의 현재 모습.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여기서 그대로 물러났다면 그의 생애 최초의 패배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방심을 반성하고 이전의 전투에서 잡힌 페르시아 포로들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페르시아 포로들은 산을 통과하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관문을 우회하는 길이 있음을 알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한 부대를 이끌고 부하 장군인 필로타스에게 다른 부대를 이끌게 하여 우회로를 통과하여 페르시아의 본진을 발견하였다. 알렉산드로서는 약간 더 우회하여 페르시아 본진의 뒤를 치고 필로타스는 원래 방향으로 가게 하여 정면공격을 명령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뜻밖의 기습을 맞은 페르시아군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은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싸워야만 하였다.
2049587376_HklcGqzw_07.jpg
19세기의 페르세폴리스 모사도.

페르시아 관문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다. 마침내 페르시아 관문이 뚫린 것이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왕궁창고에 쌓인 엄청난 보물을 차지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전체의 보물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를 차지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그리스 본토의 지원 없이 자기 마음대로 원정을 계획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락하고 성안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또한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다리우스를 추격하였고, 다리우스는 그의 친척인 박트리아 총독 베수스와 함께 동쪽 박트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군을 모으려다가 베수스를 비롯하여 그를 수종하던 신하들에게 살해당하였다.
다리우스를 추격하다가 수레 위에 묶인 그 시신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는 시신을 수습하여 페르세폴리스로 돌아가 왕중왕에 걸맞은 후한 장례를 치루어주었고 다리우스를 그의 선조들이 묻혀있는 묘역에 같이 묻었다. 일설에는 다리우스의 모후(母后)로부터 왕위 등극을 승인 받은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바실레우스, 이집트의 파라오에 이어 페르시아의 샤헨-샤(왕중왕)가 되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2049587376_p1esTS3h_7px.jpg
바빌론, 수사(Susa), 페르세폴리스를 모두 차지하고 페르시아의 왕중왕이 죽었으니 이제 전쟁은 끝나야 했다. 적어도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그들의 왕이라는 작자는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을 뒤로 하고 떠나자 하였다. 그것도 고향인 그리스 방향이 아니라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동쪽의 땅으로 가자 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내세운 명분은 동쪽의 땅을 차지하고 페르시아 왕을 참칭(僭稱)하고 있는 반역자 베수스를 쳐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페르시아의 새로운 샤헨-샤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임을 역설하였다.
페르시아의 반역자를 치기 위하여 시작된 새로운 전쟁은 또 하나의 거대한 원정이 되었다. 원정을 시작한 그 이듬해에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총독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려 한 베수스를 잡았다. 그와 같이 반란을 모의하던 페르시아 동부의 귀족들이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가까이 오자 베수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긴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의 코와 귀를 베고 나무기둥에 매달아 처형하였다.
베수스를 죽인 후 알렉산드로스는 우즈벡까지 진출하였고 약사르테스강(지금의 시르-다리아강)에 이르렀다. 여기서 소그드인들을 무찌르던 중 유목족인 사카(스키타이)와 싸워 이기게 된다. 아울러 지금의 키르기스와 타지크에 해당하는 소그드의 아리아메지스 요새를 무너뜨렸다. 이 요새는 설산(雪山)의 거의 정상에 지어져 있었고 사방이 절벽이어서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는데 알렉산드로스는 후한 상을 약속하고 지원자들을 받아 절벽을 오르게 하였다. 이 병사들이 절벽에 오른 후 그들이 가지고 온 긴 줄을 휘둘러 신호를 하자 요새의 수비병들은 자신들의 요새에 알렉산드로스 군이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한편 이 요새에는 박트리아의 군장이던 오크치아르테스의 딸인 록사나가 피신하여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즉시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였다. 오크치아르테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딸과 결혼하여 한다는 소식에 즉시 알렉산드로스에게 복속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후히 대접하였다. 알렉산드로스와 록사나는 성대한 혼인식을 올리고 이후 록사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적자(嫡子)인 알렉산드로스 아에구스를 낳았다.
 
 
 

2049587376_HI9sbW3q_08.jpg
록사나의 미모에 반한 알렉산드로스. <출처: en.wikipedia.org>
그리스 출신의 병사들에게 있어 중앙아시아의 고원과 설산을 넘나드는 것은 고역을 넘어 목숨이 위협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대한 원정이 끝나자 마자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지리적 인식에서 인도는 소위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는 외해(外海)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단둔히 새로운 땅을 정복하는 것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끝까지 정복하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헬레니즘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알렉산드로스를 인도에까지 가게 하였다.
히다스페스 전투: 푸루왕을 이기다
2049587376_p1esTS3h_7px.jpg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가는 와중에 탁실라 지방의 왕과 동맹을 맺고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도 함락을 시키지 못했다던 아오르노스 요새를 함락시킨 다음 히다스페스강(현 파키스탄 젤룸 강)에서 파우라바 왕국의 임금 포루스와 싸우게 된다 (‘포루스’는 그리스/로마 쪽의 기록에 남은 이름이고 실제 명칭은 라자 푸루, 즉 ‘푸루 왕’이다). 마케도니아군 4만은 젤렘강을 사이에 두고 푸루 왕의 5만군과 맞서게 되는데 푸루왕은 이날의 전투에서 100마리가 넘는 전투코끼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마케도니아군은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군이 몰고 나온 코끼리를 본 일이 있지만 15마리에 불과하였다. 100두가 넘는 아시아 코끼리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더 큰 문제는 마케도니아군 기병의 말들이 코끼리를 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코끼리 부대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면 그 울음소리와 덩치에 말들이 겁을 집어먹고 통제불능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경우 전투가 벌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건너가서 공격을 해야 하지만 고대의 군대가 강을 건너는 순간은 매우 위험한 순간이다. 젖은 땅으로 인하여 지면(地面)이 고르지 못하고 강의 흐름도 들쑥날쑥이어서 대열이 흐트러질 수 밖에 없어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알렉산드로스는 정찰병으로 보내 강 주변의 지형을 파악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도강을 준비하는 듯이 부대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강 건너에서 마케도니아군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푸루는 그 움직임에 대응하여 일단(一團)의 코끼리 부대를 움직여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도강과 공격에 대비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거짓 기동을 계속하였고 결국 푸루 왕은 알렉산드로스가 실제로 건너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알렉산드로스의 움직임에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노리던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기회로 여겨 군의 대부분을 이끌고 도강 지점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는 부하 크라테루스에게 수천의 병력을 남겨 여전히 숙영지에 있는 것으로 믿게 한 다음 도강지로 가서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움직임을 숨기기 위하여 밤에 도강을 하였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져 푸루의 정찰병들이 나오지 않음은 물론 마케도니아군이 이동하는 소리를 없애주었다. 아침이 되어 푸루의 정찰병들이 마케도니아군을 발견하였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본대는 이미 강을 모두 건넌 후였다.
2049587376_eUnOopAm_09.jpg
푸루의 코끼리 부대와 싸우는 마케도니아군.

푸루는 당장 군을 이동하고자 하였지만 아직 크라테루스의 군이 건너편에 있어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당장 건널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아들에게 기병 4천과 전차부대 일부를 맡겨서 알렉산드로스를 요격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에서 데리고 온 궁기병으로 파우라바 별군(別軍)의 움직임을 막은 다음 창기병대를 추형(송곳)모양으로 하여 적군을 들이쳤다. 파우라바 별군은 전멸하고 결국 푸루는 자신의 본군을 재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궁기병에 의한 견제를 시작하였고 기병으로 양 옆을 공격하였다. 별군이 전멸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마케도니아군이 기병에 있어서는 우위에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장 코에누스는 적을 공격하는 듯 하다가 물러서는 등 견제만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멀리 돌아 우회하는듯하여 적 기병을 이끌어 내었다.
푸루는 알렉산드로스를 막기 위하여 기병대를 재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우회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돌진하여 재배치중에 있던 적 기병대의 중간을 쳤다. 적 기병대의 전열은 와해되고 본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되자 파우라비 군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마케도니아 보병대가 본격적인 전진을 시작하였고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는 수천 개의 사리사 앞에서 우왕좌왕하였다. 파우라비 보병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참패를 당하고 살아남은 코끼리 80두는 알렉산드로스가 가져갔다.
푸루왕을 이긴 후 그를 사로잡은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주변이 다른 왕들이 있느냐고 물었고 푸루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자신보다 수십 배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던 대왕들이 수없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대왕들이 수십 명 있다는 것은 푸루의 과장이지만 당시 인도 북부는 파우라바 왕국의 수십 배가 되는 영토를 가진 난다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푸루의 5만군과 싸워서 힘겹게 이긴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푸루의 말에 의하면 20만이 넘는 대군을 지닌 난다 제국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군다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무려 8년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오지(奧地)를 돌아다니면서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다. 결국 병사들은 싸우기를 거부하였고 알렉산드로스에게 고향에 돌려보내달라고 하였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거부하면 반란을 일으킬 태세였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더 이상의 원정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도 만만한 것은 아니어서 이란 남부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수 천명이 탈진하여 목숨을 잃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그 이후
2049587376_p1esTS3h_7px.jpg
바빌론으로 돌아간 후 알렉산드로스는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는 다음 정복 지역을 고르는데 골몰하였다. 그는 아라비아를 정복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그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정복활동을 하면서 다치기를 수십 차례였고 그 중에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중상도 있었다. 그라니쿠스에서 도끼에 맞은 후 움직이지 못한 것은 일시적으로 뇌진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가자 성의 전투에서는 팔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심한 어깨 부상을 입었다. 인도를 떠나기 전 말리족과 벌인 전쟁에서는 비록 이기기는 하였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폐를 다쳤고 며칠 동안 생사지간에서 헤매었다. 아울러 그는 마케도니아인의 관습대로 폭음이 잦았다. 이러한 요인들은 막대한 체력소모와 겹쳐 그의 몸 상태는 나빠지기만 하였다. 그리고 BC 324년 죽마고우(일설에는 동성연인)인 헤파에스티온이 죽은 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망상증세까지 일어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듬해인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는 약 14일간 앓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제국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명확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과 총독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고 여러 세력이 전쟁의 와중에서 명멸하였다. 전쟁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제국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본토, 아시아(터키)의 페르가몬 왕국,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그리고 시리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셀루쿠스 왕조이다. 비록 권력투쟁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온전히 유지하지는 못하였지만 중요한 점은 그 지배자가 모두 그리스인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서로가 알렉산드로스의 정통 후계자라고 자처하며 싸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다스리고 있던 땅에 헬레니즘 문화를 이식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활동과 그 후계자들이 남긴 헬레니즘 문화의 가장 좋은 예는 지금의 인도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그리스와는 거리도 멀고 전혀 상관도 없었을 듯한 곳에 남아있다. 바로 ‘간다라’ 예술이다. 원래 석가모니는 자신의 형상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형상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구체적인 섬김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 이 때문에 부처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불교의 신자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 이때 헬레니즘이 알렉산드로스를 통하여 인도에 전해지며, 신상(신의 동상이나 석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그리스 문화의 특징도 전파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최초로 만들어진 석가모니의 모습은 곱슬머리와 오똑한 코, 그리고 윤곽이 뚜렷한 전형적인 그리스인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불교 교단이 이를 받아들이고 불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부처의 조각상도 같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집트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으로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그 왕들의 딸들은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렸다. 후일 로마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와 관계를 맺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예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파라오’를 칭하였지만 철저히 그리스적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으로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궁정에서도 그리스어만 쓰고 이집트어를 배제하였다. 이 때문에 이 당시의 이집트 유적과 문서는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2049587376_8D5Uac0k_10.jpg
간다라 양식의 불두(佛頭). <출처: en.wikipedia.org>
알렉산드로스가 엄청난 영토를 차지한 정복자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많은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비범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며 그는 세계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족적은 단순히 영토의 정복보다는 그 영토의 정복이 가져온 문화의 교류 때문이다. 펠로포네수스와 아티카 반도에 갇혀있던 그리스적 사고, 철학, 미술 등이 알렉산드로스로 인하여 외부문화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이다. 훗날 징기스칸의 정복이 동서양과 중동간의 교류를 촉진하였듯이 알렉산드로스의 정벌은 그리스 문화가 다른 세계의 문화와 융합시켰다는데 있다. 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였을 때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길 바랬으며 ‘세계제왕’이 되고 싶어하였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일찍 죽지 않고 그가 세운 제국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길이 남는 제국으로 만들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 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