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로크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 전반에 대해 총체적 반박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로크 스타일이 아니다. 그가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것은 본유 관념에 대한 대목에서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본유 관념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제1원리라고 부른 ‘생각하는 나’(res cogitans)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세 종류의 관념을 분석한다. 내 마음의 바깥에 있는 사물에서 온 외래 관념, 내 마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생겨난 인위 관념, 그리고 오로지 ‘생각하는 나’에서 비롯된 본유 관념 등이 그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본유 관념으로 생각하는 나, 수학의 원리, 도덕의 원리, 그리고 신의 관념 등을 꼽았다. 이 대목에서 로크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으로서의 경험론이 출발한다. 로크는 인간은 그러한 본유 관념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 마음은 그냥 텅 비어 있다고 했다. 텅 빈 하얀 백지에는 본유 관념이 없다. 단지 그것을 채워 나가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다. 로크는 말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열에 아홉은 그들이 착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그것은 교육으로부터 채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올바로 인도하는 ‘정신 지도의 규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로크는 하얀 백지에 기록된 ‘관념들의 연상 규칙’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모두 외적 감각과 내적 반성이라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지식도 사실은 단순 관념에서 비롯된 복합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부른 것도 따지고 보면, 내적 성찰에서 나온 복합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