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전쟁 (1) - 제국적 헬레니즘을 꿈꾸다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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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전쟁 (1) - 제국적 헬레니즘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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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의 이수스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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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 마케도니아vs그리스
2단계 : 마케도니아/그리스vs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3단계 : 마케도니아/그리스vs 페르시아잔존세력/파우라바 왕국
전쟁시기
기원전 338-기원전 323
전쟁터
그리스 본토, 동부 지중해 연안, 메소포타미아-이란,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일대
주요전투
카이로네아 전투, 그라니쿠스강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페르시아 관문 전투, 히다스페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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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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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스는 잠시 동안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특히 아테네는 전쟁 당시 육성한 선단으로 에게해와 흑해에서의 상권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토대로 델로스 동맹을 결성, 동맹국들의 재정과 외교를 좌지우지 하면서 에게해(海) 일대에 제국(帝國)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강요하는 아테네의 압박에 시달리는 도시국가들은 스파르타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수십 년간 그리스인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전 전쟁에서 패하였던 페르시아는 이 싸움을 부추기면서 그리스 세력의 약화를 노렸다. 비록 스파르타 세력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리스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폐허위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배도 오래가지 않았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종결된 지 불과 15년만에 ‘코린토스’ 전쟁에서 아테네 세력에게 패하고 30년후에는 테베에게 패함으로써 스파르타의 헤게모니도 종언을 고하였다. 페르시아를 꺾어버린 그리스인들은 결국 예전에도 그랬듯이 서로간의 싸움으로 날새면서 스스로 힘을 빼앗고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강력한 군사개혁을 시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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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같은 헬라인 계통이면서도 본토 그리스인들에게 변방 촌동네 취급을 받던 북방이었지만 서서히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미신을 믿는 등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뒤떨어져 있었으나 필리포스 2세가 볼모겸 해서 테베에 유학을 다녀온 뒤로 마케도니아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철학, 문학, 건축 등에 있어 본토 그리스의 것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여 문화적인 혁신을 꾀하는 동시에 군사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BC 371년 소위 ‘보이에티아 전쟁’ 중 테베가 그리스의 패권을 쥐고 있는 스파르타에 도전하였을 때 지금 그리스 중부에 있는 룩트라에서 맞붙게 되었다. 테베의 지휘관인 에파미논다스는 군대진형의 오른쪽에 강한 병사들을 배치하는 그리스 전통의 좌약우강(左弱右强) 진형을 무시하고 테베군의 좌익에 오른쪽 보다 몇 배의 병력을 투입하여 두껍게 포진하였다. 테베군과 스파르타군이 충돌하였을 때 강군이라고 소문난 스파르타군의 강한 우익이 예상을 깨고 ‘약한’ 테베군의 좌익에 격파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파르타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스파르타군은 그 지휘관을 잃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체 도주하였다.
필리포스가 테베에 머물고 있을 때가 마침 보이에티아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고 필리포스는 테베군의 운용과 지휘를 세심히 눈 여겨 보았다. 이후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왕이 된 필리포스는 군사적인 면에서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하였지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응용’을 이루어냈다. 예를 들어 본토 그리스의 전통적인 전투대형인 팔랑크스의 기본얼개는 유지하되 동료를 가려주는 큰 방패는 폐기하고 이를 작은 방패로 대체하였다. 호메로스의 시절부터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투구에 흉갑, 각반을 착용하고 큰 방패와 길이 2m정도의 창인 ‘도리’를 든 남자들이 빽빽이 모여 사각형의 진을 형성한 형태였다. 그러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방패를 들어 왼쪽에 있는 동료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가려주었다. 적들이 달려와서 싸우면 방패로 적의 접근을 막고 창을 위로 들어 아래로 찔렀고 적이 가만히 서있으면 적군에 서서히 다가가다가 100-200m정도(갑옷과 방패의 무게가 상당하여 그 이상을 달리게 되면 체력이 떨어져 싸울 수 없었다.)되는 거리에서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어 적들에게 부딪혔다.
전통적인 그리스 팔랑크스를 ‘아르고스’형이라고 하는데 필리포스는 아르고스 팔랑크스에서 쓰는 2m길이의 ‘도리’를 4-6m길이의 장창인 ‘사리사’로 대체하였다. 도리는 한 사람이 쓰는 개인무기였지만 사리사는 3-4인이 같이 붙잡고 쓰는 공동의 무기였다. 사리사를 든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적에게 일정한 속도로 다가가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앞의 서너 열(列)이 창을 내리고 창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힘껏 앞으로 내질렀다. 그러나 모두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각 오(伍)가 하나씩 건너뛰어 하나씩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짝수 줄들이 사리사를 내질러 공격하고 당기면 홀수의 줄들이 내지르고 당기고 다시 짝수 줄의 병사들이 사리사를 내지른다. 즉 하나씩 걸러 번갈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지치기 전까지는 계속 공격을 하게 된다. 창을 든 병사들은 무기를 휘두르거나 기교를 부릴 필요없이 앞의 적들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내지르기만 하면된다. 앞의 서너명이 큰 창을 잡아야하는 전술 개념에서 전통적인 팔랑크스의 큰 방패는 거치적 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16x16, 즉 256명을 기본단위로 하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인 ‘스파이라’가 탄생한 것이다(물론 전술적인 필요에 따라 쪼개어 운용되기도 한다). 전쟁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팔랑크스’는 전통적인 그리스의 ‘아르고스형(Argive)’ 팔랑크스가 아니라 대개는 이 스파이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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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재현한 그림 –[Ancient and Medieval Warfare](1984).
그러나 필리포스의 전술체계에서 주된 공격단위는 팔랑크스가 아니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전통의 말 산지인 테살리아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은 승마에 상당히 익숙하였다. 필리포스는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어 소수에 머물러있던 기병대를 확장하여 평민들도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대규모 기병대를 만들었다. 기병대 중 상위 귀족자제들은 근위기병대(헤타이로이)로 편성하였다. 팔랑크스가 적의 부대와 정면에서 싸우는 사이 기병은 적의 부대간 사이를 파고 들거나 적의 대형을 우회하여 후방을 타격한다. 즉 싸움을 이기는 결정타를 날리는 일은 기병대가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 기병대는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에 나섰을 때 여러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다.
아울러 필리포스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주기 시작하여 왕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평소에는 농사짓다가 전쟁나면 싸우는 본토 그리스의 시민군적 전통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고대 군대의 문제 중 하나는 병사들의 보급과 위락, 그리고 잡일을 담당하는 잡다한 인원들이 많이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필리포스는 병사들로 하여금 웬만한 보급품은 스스로 지게하고 군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병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모두 하인(노예)를 데리고 나오는 관행을 뜯어 고쳐 몇 사람에 한 명으로 규정하였다. 이 때문에 보급인원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마케도니아군은 당시의 다른 군대에 비하여 행군할 때 몇 배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스스로의 군사적 천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만들어준 군대가 그 기반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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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세기 말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하나로 통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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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가 이러한 군대를 만드는 궁극적인 목표는 페르시아를 치기 위함이었으나 그 이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군대를 키운 필리포스는 그리스 내부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며 그리스 본토를 향하여 진군을 시작하였다. 그는 크레니다스(후일의 빌립보)와 데살로니카 지방을 점령하여 금광을 확보한 뒤 그리스 북부를 장악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아테네를 비롯한 본토의 도시국가들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리리아(현재의 유고 남부)로 진군하여 평정하고 스키타이족을 쳐서 배후를 안정시킨 다음 그리스 본토를 재차 침공하였다. 그리고 BC 338년, 마케도니아군과 아테네-테베군을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 본토 연합군이 카이로네아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스파이라 대형으로 연합군 보병들을 고정시켰다가 갑자기 우익을 뒤로 빼서 적군의 전선을 둘로 나누어 버렸다. 이러는 사이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이끌고 크게 우회하였다가 그리스 좌익의 뒤를 찔렀고, 후퇴하는듯한 마케도니아 우익은 갑자기 후퇴를 멈추고 반격하였다. 유명한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는 보병으로 적을 붙드는 사이 기동부대가 적을 다른 방향에서 쳐서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그리스 좌익을 구성하던 아테네군은 이렇게 무너졌고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은 최후까지 버티고 있던 테베의 신성군단(300명의 동성연인으로 구성된 테베의 엘리트 부대)에 집중되었다. 신성군단은 정예 부대답게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가 전멸하였다. 필리포스는 이들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큰 무덤에 장사를 지내주고 그 위에 용기를 상징하는 큰 사자상을 세웠다. 그러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패전국이 되었고 필리포스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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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포스가 신성군단의 용감함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자상.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던 그 순간에도 본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동맹과 배반을 반복하며 서로 불신하고 싸우고 있었다. 당대의 웅변가였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는 이러한 ‘동족상잔’을 개탄하고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여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그리스인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소크라테스가 고대하던 강력한 군주는 그가 나이 들어 거의 90세가 되었을 때에야 등장하였다. 물론 필리포스는 소원이던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지 못하고 암살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유지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계승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델포이 동맹을 결성하여 그리스를 하나로 묶고, 그리스 통합군을 결성하여 페르시아 정벌에 나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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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인 필리포스가 암살된 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자들을 암살하거나 무력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의 사촌과 함께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족 남자 2명을 살해하였다.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역시 필리포스의 다른 부인과 그 딸을 화형시켜버렸다. 그 부인의 숙부이자 군부내의 실력자인 아탈루스의 가족을 몰살시켜버리고 아탈루스 역시 밀명을 보내어 죽였다. 여느 제왕과 같이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르는 길 역시 피로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필리포스 왕이 살해당하자 필리포스에게 패하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즉시 반기를 들었다. 아테네, 테베, 테살리아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테살리아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하여 조기에 진압되었고 테살리아 병력까지 그의 진압군에 포함시키자 아테네는 다시 사절을 보내어 평화를 구걸하였다.
거침없는 전술과 공격으로 제국적 헬레니즘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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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북쪽의 일리리아 지방에 소요가 일어나 이를 다시 평정하는 사이, 아테네와 테베가 다시 반기를 들었다. 아테네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테베는 끝까지 싸우려고 하였고 결국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하고 테베는 불타 없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에서 자신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나 도시 할 것 없이 철저히 없애버리고 그의 부하인 안티파테르를 그리스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한 다음 그리스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향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지금도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경계인 헬레스폰트를 건너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는 현재 터키 공화국 북부의 그라니쿠스 강가에서 벌어졌다. 페르시아 총독들과 귀족들이 군을 모아 알렉산드로스를 가로막은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강 상류 쪽으로 우회하여 다음 날 공격하자는 부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대치하던 당일 날 즉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우익을 향하여 거짓 공격을 하여 페르시아의 중앙부에서 병력이 빠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 페르시아 중군에 생긴 틈을 공격하여 돌파하였다. 페르시아 중군 뒤에는 페르시아의 귀족 들로 구성된 페르시아 기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즉시 난전이 벌어졌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근위기병은 많은 수의 페르시아 귀족을 죽였지만 알렉산드로스 역시 페르시아 기마병의 도끼에 투구를 직접 가격당하면서 그 충격에 일시적인 마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 귀족이 결정타를 날리기 전에 알렉산드로스 유모의 아들인 클라이투스가 그 페르시아인을 죽이면서 알렉산드로스는 결정적인 위기를 벗어났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좌측으로 돌아 남아있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였고 마케도니아 보병이 약화된 페르시아 대형을 뚫고 돌진하면서 페르시아군은 마구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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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니쿠스에서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는 마케도니아군과 알렉산드로스 <출처: en.wikipedia.org>
이때 페르시아에 용병으로 고용되어있던 2만 남짓의 그리스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와 협상을 하고자 하였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부하고 그의 보병대로 하여금 그리스 용병들을 학살하였다. 일설에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에 대한 배신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전기(傳記)를 쓴 로마 사가 아리아누스는 그리스 용병들 사이에 역병이 펴져있다는 말이 있어 그의 군대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들을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라니쿠스 강가에서 페르시아군을 꺾은 알렉산드로스는 이오니아(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으로 가서 그리스계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시작하였다. 우선 할리카르나소스에서는 그의 남동생 픽소다루스와의 권력투쟁에 져서 쫓겨나 있던 전 총독이자 여왕인 아다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았다. 아다는 알렉산드로스를 양아들로 삼아 그녀의 사후에 도시의 통치권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아울러 리기아와 팜필리아를 지나면서 페르시아의 해상기지격인 도시들을 모두 복속시켜 페르시아군이 그 해군을 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당시 알려진 세계를 모두 정복하여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것도 단순히 통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일한 곳 모두에 그리스 문화의 빛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즉, 그리스 문화에 기반하여 다스리는 제국을 건설하기를 원한 것이다. 헬레니즘이 단순히 그리스 본토에 국한된 문화가 아니라 한 제국을 지탱하는 이념이기를 바랬던 알렉산드로스의 목표 때문에 많은 사가들이 알렉산드로스 등장 이후를 이전과 구분하여 ‘제국적 헬레니즘(Imperial Hellenism)’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수스 전쟁의 승리로 페르시아를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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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서부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페르시아 수도인 바빌론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남부와 레바논 지역을 향하여 나아갔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알아서 항복하고 자치를 보장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서부를 어렵지 않게 손에 넣는 듯이 보이자 당시 페르시아의 샤한-샤인 다리우스 3세는 대군을 모아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진군과 정지를 반복하던 양군은 현재 터키와 레바논 국경 근처인 이스켄다룬에서 조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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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스로의 이동.

4만의 마케도니아군과 다리우스가 이끄는 약 10만의 페르시아군은 좁은 강을 두고 사이에 만나게 되었는데 전투를 먼저 시작한 것은 다리우스였다. 다리우스는 오른쪽에 포진한 기병대와 그리스 용병 팔랑크스로 하여금 알렉산드로스의 부장(副將) 파르메니오가 이끄는 보병/기병 혼성부대를 치게 했다. 페르시아 기병대와 용병 보병대는 나름 맹렬하게 공격을 했지만 파르메니오의 부대는 이를 버텨내었다. 사실 공격을 개시한 기병대는 마케도니아군의 전열을 돌파하기 위하여 집중 시킨 부대였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의 반대편은 보병들만이 버티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방패보병(히파스피스타이)을 이끌고 페르시아군의 왼편에 있던 허약한 페르시아 보병을 공격하였고 파르메니오가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을 견디며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페르시아의 보병 전열을 뚫고 그 뒤에 있던 다리우스를 직접 공격할 수 있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재빨리 말을 갈아타고 근위기병대와 함께 다리우스를 향하여 돌격하였다. 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군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공격해오자 빠르게 도주하였고 그의 막사에 남겨진 가족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기병과 싸우고 있던 그리스 기병대가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자 페르시아 기병은 이를 뒤쫓아 파르메니오 부대의 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옆구리가 비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대형 속에 잘 숨겨놓은 테살리아 기병이 페르시아 기병의 측면을 들이쳤다. 예상외의 방향에서 기습을 받은 페르시아 기병대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 둘씩 전장을 이탈하여 달아났다.
그러나 용병 팔랑크스의 공격을 버텨내던 파르메니오의 부대가 힘이 부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일부 기병만 다리우스를 추격하게 하고는 그리스 용병들의 뒤쪽으로 돌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뒤에서 공격하자 앞뒤로 협공 당하게 된 그리스 용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페르시아 보병들도 그들의 왕이 전장에서 도망한 것을 알게 되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고대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순간이라기 보다는 대형을 풀고 달아날 때이다. 그나마 뭉쳐있을 때는 적의 공격을 버틸 수 있지만 도망갈 때는 완전히 하나의 목표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만약 적이 조직적인 추격전을 벌일 경우 도주하는 쪽은 몰살을 당하는 일이 많다. 마케도니아군은 도망하는 페르시아군과 용병을 가리지 않고 쫓아가 죽였다. 왕과 왕이 격돌한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페르시아 왕중왕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수스 전투의 소식이 알려지자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많은 도시들이 새로운 정복자에게 자진하여 복속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던 페니키아인들의 무역항 수르(티로스)만큼은 굽히지 않았다. 수르는 해안으로부터 약 1km 떨어진 섬이었는데 그 해안을 따라 높이 60미터에 이르는 성벽을 지어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배로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일종의 연륙교를 지어 여기에 누차(Siege Tower)를 올려 수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르인들이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화공선을 보내어 이를 불태워 버리자 알렉산드로스는 해군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 수르 항구를 봉쇄하여 적선들이 나오지 못하게 한 다음 연륙교와 바다에서 공격하였다. 다른 전투와는 달리 수르의 함락은 무려 8개월이 걸렸고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수르는 전투 중에 그리스인 포로들을 죽여 성벽에 내다 거는 도발행위로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모두 죽이고 왕족을 제외한 성민(城民) 3만명을 전부 노예로 팔아버렸다. 비록 다른 전투에서는 적들에게 유독 관대하였던 알렉산드로스가 수르인들에게 가혹하였던 것은 이 전투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사실의 반영인 것이다. 이후 이집트로 가는 길에 가자(Gaza)성도 험한 산 위에 지어졌다는 것을 믿고 알렉산드로스군에 항복하지 않았다. 힘겨운 싸움 끝에 네 번째의 공격에서 겨우 성을 함락시킨 알렉산드로스는 가자 성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제우스의 아들이자, 아몬의 아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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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와 한 판 싸움에서 호되게 당한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서부 해안을 모두 차지하고 그 함선들을 모조리 장악한 후 이집트까지 들어가 파라오로 추대를 받자 몹시 다급해졌다. 이집트에 있으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 북부 지중해안의 작은 마을을 큰 도시로 만들고 이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강압적인 통치에 시달리던 이집트인들에게 해방자로 인식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복속되기를 청한 이집트인들에게 자치를 허락하여 주고 매우 관대하게 대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아문의 신전에 가서 그 신관들에게 ‘세계의 임금’임과 동시에 이집트 최고의 신인 아문(Amun)신의 아들임을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문과 그리스 최고의 신을 동일시하여 이후 어디를 가나 자신이 제우스-아문의 아들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새로운 태양왕(파라오)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과제가 있었다. 아직도 동방의 넓은 땅과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페르시아의 왕중왕을 무찔러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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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