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문왕은 외부로의 팽창보다는 내부의 안정과 결속 다지기에 치중하여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데 앞장섰다. 문왕은 중경현덕부를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여 천도하였는데, 이는 나라가 부강해지고 인구가 많아지면서 보다 넓고 교통이 편리하며 물자 유통이 원활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문왕은 상경용천부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두 번 더 옮기는데 모두 정치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었다.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3성 6부 체제를 갖추어 관직 제도를 제정하고, 주자감을 설립하여 왕과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내치에 힘썼다.
10대 선왕 때 발해는 최전성기를 맞아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은 영토를 흑룡강 하류까지 확장하여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두었으며 전국의 행정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재편하였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당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일본과 사신을 교환하면서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튼실히 하는 한편 문화 교류에도 앞장섰다. 이후 발해는 부족을 통일하고 강성해진 거란의 침략을 받아 926년 멸망하게 되었다. 발행의 멸망은 대외적으로는 동쪽으로 세를 확장하려는 거란의 침략 때문이었지만, 발해 내부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발해의 유민 중 일부는 고려로 흡수되었고, 일부는 압록강 일대로 피난하여 정안국을 세우고 발해 부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발해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이지만 그 자체의 기록이 많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발해가 멸망하고 수도였던 동경성은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 후세에 전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1949년 정혜공주 묘가, 1980년에는 정효공주 묘가 발굴되고 그 안에서 발해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발해사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생동감있는 발해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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