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 달콤한 죽음이여, 오라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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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 - 달콤한 죽음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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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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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여쁜 신부와 왕자님의 키스로 끝난다. 몰려든 군중의 환호 속에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리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면 그 후로 오랫동안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한 동화의 마지막 장은 곧바로 현실의 첫 페이지가 되는 법, 왕실에 대한 환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는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자신의 짧은 삶과 죽음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인공은 ‘19세기의 다이애나’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후의 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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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황후를 위한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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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민중의 왕세자비’였다면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의 연인’이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장배경과 개성을 가졌지만, 엄격한 왕실에 맞서서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투쟁했고 결국 실패하여 비운의 죽음을 맞았으나, 사후에도 대중들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뮤지컬 [엘리자벳]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오스트리아 황후에 대해 다룬 첫 번째 작품은 아니다. 지난 100년 간 소설, 전기문, 드라마 시리즈가 쏟아졌고 그 중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으로는 1955년 개봉하여 17세의 로미 슈나이더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영화 ‘시씨 3부작’을 손꼽을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말 빈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엘리자벳]은 순진하고 낭만적인 영화 시리즈와는 상반된 시점에서 엘리자벳이라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과, 그녀를 감싸고 있는 달콤한 환상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92년 빈에서 초연한 이후로 [엘리자벳]은 독일어권 뮤지컬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재공연과 라이선스 공연, 투어 공연을 이어갔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틀을 지킬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은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달리, 공연을 무대화하는 국가 마다 문화적, 정서적 특성을 반영한 변형이 허용되었다. 독일어권을 제외하고 이 작품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곳은 일본이었는데, 작품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면을 극대화시킨 것이 일본 공연의 특징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극단 토호에서 만든 뮤지컬 [엘리자벳]과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만든 또 다른 버전의 [엘리자벳]이 공존하고 있다. 여성만이 출연하는 다카라즈카 버전에서 남자주인공인 죽음을 연기했던 배우가 퇴단 후에 토호 버전에서 엘리자벳을 연기하는 흥미로운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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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의 비엔나 공연 포스터 – 출처 : ㈜EMK뮤지컬컴퍼니
당대 유럽의 모든 왕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았고, 가장 무책임한 어머니로 비난받았으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황후였던 시씨의 인생은 어떻게 세계 10개 국가의 900만 관객을 사로잡는 뮤지컬이 될 수 있었을까.
초현실적 존재의 현실적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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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 작품답게, 역사적인 사건들과 시대의 분위기도 함축적으로 극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일반적인 전기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퍼스트 레이디’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작품과 비유하자면, [명성황후]보다는 [에비타]에 가깝다. 황후 암살범을 사회자로 내세워서 황후의 삶과 죽음을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을 대놓고 비웃는데, [엘리자벳]이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들의 면전에서 던지기에는 상당히 과감한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미하엘 쿤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엘리자벳의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들을 보여주는데도 망설임이 없다.

물론 우리가 극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결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매력적인 인간이다. 다행스럽게도 미하엘 쿤체는 엘리자벳에게서 미인 대회의 시상대 꼭대기에 세울 수 있을 법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시대의 얼굴을 포착해내는데 성공한다.

엘리자벳은 퇴폐와 탐미가 넘쳐 흐르던 세기말 빈의 심장부에 위치한 근엄한 쇤브룬 궁의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한없이 충돌했고, 그 때문에 한 시대를 보여주는 아이콘이 되었다. 19세기 말은 단순히 숫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한 세계가 몰락하고, 그 종말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시기였다. 엘라자벳은 자신이 곧 사라질 세계의 여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속하기를 원했던 무리는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적진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엄청난 모순을 뛰어넘을 만한 결단력과 의지가 없었다. 엘리자벳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몽상가였고, 그녀의 예민한 정신은 시대의 비극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벅차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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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죽음이 교차하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무대 – 출처 : ㈜EMK뮤지컬컴퍼니
미하엘 쿤체는 이 뮤지컬의 남자 주인공을 황후와 실제 염문이 있었던 헝가리 귀족 대신 엘리자벳이 남긴 일기와 시에서 데려왔다. 그녀가 남긴 무수히 많은 글 속에서 ‘죽음’이 마치 연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죽음(Tod)'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구 미술이나 문학에서 ’죽음‘이 의인화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기법이다. 하지만 '죽음’을 움직이는 해골이나 시체가 아니라 마치 어둠의 천사처럼 매혹적인 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다. 생전의 엘리자벳이 보여주었던 취향이나 성향을 생각하면 그녀가 상상하고 선망했던 죽음이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엘리자벳]에서 가장 뮤지컬적이고 환상적인 면은 이 죽음과 엘리자벳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있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생사가 달려 있는 충돌이면서 동시에 금단의 것에 대한 매혹을 느낄 수 있다.


영미권 뮤지컬과는 다른 독일어권 뮤지컬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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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권 뮤지컬보다 먼저 한국에 상륙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 뮤지컬로 인해 비영미권 유럽 뮤지컬의 특징으로 느슨한 서사와 다양한 캐릭터, 호소력 있는 아리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손꼽는 이들이 많다. 분명 [엘리자벳]에도 영미권 뮤지컬에 비해 많은 수의 인물들이 분명한 캐릭터와 내적갈등을 드러낼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프랑스 뮤지컬에 비해 춤과 노래, 드라마의 연결이 빈틈없이 짜여 있으며, 배우의 기량을 돋보이게 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발라드 대신 서사적인 필요와 캐릭터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충실한 곡으로 진행된다.

[엘리자벳]은 궁중사극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무도회 같은 화려함보다는 작품의 정서와 극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주력하는 현대적인 작품이다.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작품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살리는 회전무대와 그림막이 돋보이는 무대미술은 대본, 음악과 함께 이 작품을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실베스타 르베이의 음악은 명확한 라이트모티프에 따라 설계되어 있는데, 궁중사극을 기대하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줄 만큼 웅장하면서도, 거칠고 선동적인 록비트를 군데군데 배치하여 극에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