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유럽의 모든 왕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았고, 가장 무책임한 어머니로 비난받았으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황후였던 시씨의 인생은 어떻게 세계 10개 국가의 900만 관객을 사로잡는 뮤지컬이 될 수 있었을까.
초현실적 존재의 현실적인 질문
[엘리자벳]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 작품답게, 역사적인 사건들과 시대의 분위기도 함축적으로 극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일반적인 전기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퍼스트 레이디’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작품과 비유하자면, [명성황후]보다는 [에비타]에 가깝다. 황후 암살범을 사회자로 내세워서 황후의 삶과 죽음을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을 대놓고 비웃는데, [엘리자벳]이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들의 면전에서 던지기에는 상당히 과감한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미하엘 쿤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엘리자벳의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들을 보여주는데도 망설임이 없다.
물론 우리가 극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결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매력적인 인간이다. 다행스럽게도 미하엘 쿤체는 엘리자벳에게서 미인 대회의 시상대 꼭대기에 세울 수 있을 법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시대의 얼굴을 포착해내는데 성공한다.
엘리자벳은 퇴폐와 탐미가 넘쳐 흐르던 세기말 빈의 심장부에 위치한 근엄한 쇤브룬 궁의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한없이 충돌했고, 그 때문에 한 시대를 보여주는 아이콘이 되었다. 19세기 말은 단순히 숫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한 세계가 몰락하고, 그 종말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시기였다. 엘라자벳은 자신이 곧 사라질 세계의 여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속하기를 원했던 무리는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적진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엄청난 모순을 뛰어넘을 만한 결단력과 의지가 없었다. 엘리자벳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몽상가였고, 그녀의 예민한 정신은 시대의 비극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벅차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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