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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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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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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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자기가 앞에 나서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하였고, 한 사람은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여 의복을 사치할 만한데도 늘 삼베와 모시옷을 기꺼워했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릴 자리에 있으면서 한 번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경문왕이 왕자 시절에 한 말. [삼국사기]에서-
 
 
당나귀 귀 임금님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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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업적을 내지 못했지만 경문왕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따라 붙은 여러 에피소드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이다. 서양의 동화에서만 나오는 줄 아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뜻밖에 신라 제48대 경문왕이다.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삼국유사]에서)
경문왕의 귀가 커진 것은 즉위한 다음이었다. 여론(輿論)을 경청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대거나, 여색을 좋아한 왕의 성향을 빗대 ‘당나귀 ×’에서 나왔다거나, 해석은 구구하지만 딱 부러지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한 왕의 이름을 기억하게만 할 뿐이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설명이었는데, 사람의 귀는 ‘머리에 붙어 있는 각도가 약 30도 정도로 누워있어야 정상’이지만, 이 각도를 넘어서는 귀를 ‘서 있는 귀’ 그러니까 당나귀 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귀가 이렇게 되면 툭 튀어나와서 실제보다 커 보인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란 그런 사람들이 갖게 되는 정신적 열등감인 셈이다. 그것이 무슨 콤플렉스로까지 나갈까 싶지만, 당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각도를 눕혀 준다든가 연골을 깎아서 얇게 만든다든가, 다양한 수술방법이 개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술을 해서라도 애써 정상적인 귀를 가지려는 이의 고민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고민 많은 왕이었다. 거기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데, 그만한 기대를 받으며 올라선 왕의 자리에서 부응할 만한 업적을 좀체 내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고민은 이중으로 쌓여갔다.
 
 
어진 성품을 갖추어 올라선 왕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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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이고, 희강왕의 손자이다. 861년 장인인 헌안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될 무렵의 신라 왕실은 왕위를 둘러싼 혈전이 끊이지 않았다. 헌덕왕(41)은 애장왕(40)을, 민애왕(44)은 희강왕(43)을, 신무왕(45)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섰다. 그러니 왕의 재위 기간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무왕에 이어 아들 문성왕이 19년간 자리를 지킨 것이나, 그의 삼촌인 헌안왕이 유혈의 비극 없이 왕위에 오른 것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소지는 얼마든 남아 있었다.
헌안왕이 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 때를 헌안왕 4년이라 적었는데,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마침 곁에 있는 응렴에게 물었다.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는 것이었다. 응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삼국유사]에서)
왕은 이 말을 듣고 단박에 응렴의 어진 성품을 알았다.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두 딸 가운데 하나를 시집보내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응렴은 큰 딸을 택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흥륜사의 스님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범교사라 한 이가 조언자로 등장한다.
사실 두 딸 가운데 첫째는 얼굴이 못생겼고, 둘째는 아름다웠다. 응렴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범교사는 단호히 언니를 맞으라 말한다. 그러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응렴은 그 말에 따랐다. 이것이 응렴이 왕위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헌안왕은 이 일이 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응렴에게 잇게 했던 것이다.
 
 
비극적인 세계관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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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이 된 응렴은 원성왕의 손자인 희강왕의 다시 손자에 해당한다. 희강왕은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왕이다. 20세 때 왕위에 오르고 14년간 다스리다 34세에 죽음을 맞았다. 이 시기 다른 왕의 평균재위 연수보다는 길지만, 30대 중반의 죽음이란 자연사일 가능성이 적어, 경문왕 또한 순탄치 않은 생애를 보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경문왕의 생애는 원성왕과 비교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하대의 실상을 읽어낼 대표적인 왕이 이 두 사람이며, 조언자(원성왕의 여삼과 경문왕의 범교사)의 제언을 충실히 따르는 전개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실 두 왕은 이미 기울어가는 시대에 나타난 인물로, 개인적인 능력이나 덕성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 묻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있다는 데서도 닮아 있다. 물론 그 비극성은 경문왕에 와서 한층 강화된다.
여삼은 원성왕에게 자신의 조언을 들을 경우 후손이 열두 손대에 이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원성왕 이후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대 60여 년을 이어가지만, 이렇게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시대는 그만큼 절박했다.
경문왕이야말로 절박함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나귀 귀 말고도 그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른바 뱀 이불 사건이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마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삼국유사]에서)
여기 나오는 뱀을 경문왕의 신변을 지키는 사병(私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경문왕 전후의 많은 왕들이 시해되었다. 그것도 가까운 왕족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니 정녕 누구를 믿겠는가. 믿을 만한 개인 경호원 아니면 안 된다. 궁인들이 내쫓으려 했다는 것은 이들이 공식 호위무사가 아님을 말한다.
그러나 뱀이 곧 실제 뱀이었다고 한다면 경문왕의 처지는 더 처절해진다. 뱀을 이불 삼아 잠자리를 꾸며 흉악스럽게 보여야만 신변이 안전했다. 연산군(1494~1506재위)은 한여름에 침상 밑에 뱀을 집어넣었다. 시원하게 하자는 의도였겠지만 이 또한 신변보호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궁중의 의원들이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기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 받았다는 기록이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경문왕은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이 아무리 어진 성품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로지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그린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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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에 대해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취한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연은 [삼국사기]의 헌안왕 조와 경문왕 조를 인용하되, 거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더 하여, 절묘하게 배치한 경문왕 생애를 그렸다.
이야기는 다섯 단락으로 구분된다. ①경문왕이 경험한 좋은 일 세 가지-②범교사의 조언과 즉위-③뱀 이불 사건-④당나귀 귀 사건-⑤노래 세 편.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취한 스토리텔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5막의 비극을 보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덕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파탄의 국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위에서 ①과 ②는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③과 ④ 그리고 ⑤는 [삼국유사]에만 있는 이야기이다. 이 대목이 일연이 보여주고자 하는 경문왕 이야기의 핵심이다. 괴로운 시대의 비극적인 왕이 가진 세계관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①과 ⑤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구조이다. 좋은 일 세 가지와 노래 세 편이라는 ‘셋’이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
 
 
이런 이야기의 구조로 일연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요체를 파악하여 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특별한 치적이 없었음에도 경문왕을 비중 있게 다룬 일연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왕이 된 다음 경문왕은 범교사를 불렀다. 세 가지 좋은 일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범교사는,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라고 답했다. 과연 그랬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나, 부모로서 첫째 딸이 신경 쓰인 왕의 마음을 헤아린 셈이었고, 그 덕에 왕이 되었으며, 왕이 된 바에야 처음 마음에 두었던 둘째마저 제 사람으로 들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를 행해 셋을 얻었으니 크게 남는 장사였다.
어진 성품으로 아래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경문왕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필요한 왕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세 곡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비록 지금은 가사가 없어졌지만, 제목만 보아서도 무엇일지 짐작이 간다. 나라 다스리는 큰 길을 무리 여럿에게 물었다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문왕도 서른 중반에 일찍 세상을 떴다. 처용을 만난 헌강왕이 그의 아들로 뒤를 이었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자기가 앞에 나서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하였고, 한 사람은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여 의복을 사치할 만한데도 늘 삼베와 모시옷을 기꺼워했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릴 자리에 있으면서 한 번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경문왕이 왕자 시절에 한 말. [삼국사기]에서-
당나귀 귀 임금님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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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업적을 내지 못했지만 경문왕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따라 붙은 여러 에피소드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이다. 서양의 동화에서만 나오는 줄 아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뜻밖에 신라 제48대 경문왕이다.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삼국유사]에서)
경문왕의 귀가 커진 것은 즉위한 다음이었다. 여론(輿論)을 경청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대거나, 여색을 좋아한 왕의 성향을 빗대 ‘당나귀 ×’에서 나왔다거나, 해석은 구구하지만 딱 부러지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한 왕의 이름을 기억하게만 할 뿐이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설명이었는데, 사람의 귀는 ‘머리에 붙어 있는 각도가 약 30도 정도로 누워있어야 정상’이지만, 이 각도를 넘어서는 귀를 ‘서 있는 귀’ 그러니까 당나귀 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귀가 이렇게 되면 툭 튀어나와서 실제보다 커 보인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란 그런 사람들이 갖게 되는 정신적 열등감인 셈이다. 그것이 무슨 콤플렉스로까지 나갈까 싶지만, 당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각도를 눕혀 준다든가 연골을 깎아서 얇게 만든다든가, 다양한 수술방법이 개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술을 해서라도 애써 정상적인 귀를 가지려는 이의 고민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고민 많은 왕이었다. 거기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데, 그만한 기대를 받으며 올라선 왕의 자리에서 부응할 만한 업적을 좀체 내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고민은 이중으로 쌓여갔다.
어진 성품을 갖추어 올라선 왕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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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이고, 희강왕의 손자이다. 861년 장인인 헌안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될 무렵의 신라 왕실은 왕위를 둘러싼 혈전이 끊이지 않았다. 헌덕왕(41)은 애장왕(40)을, 민애왕(44)은 희강왕(43)을, 신무왕(45)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섰다. 그러니 왕의 재위 기간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무왕에 이어 아들 문성왕이 19년간 자리를 지킨 것이나, 그의 삼촌인 헌안왕이 유혈의 비극 없이 왕위에 오른 것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소지는 얼마든 남아 있었다.
헌안왕이 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 때를 헌안왕 4년이라 적었는데,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마침 곁에 있는 응렴에게 물었다.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는 것이었다. 응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삼국유사]에서)
왕은 이 말을 듣고 단박에 응렴의 어진 성품을 알았다.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두 딸 가운데 하나를 시집보내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응렴은 큰 딸을 택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흥륜사의 스님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범교사라 한 이가 조언자로 등장한다.
사실 두 딸 가운데 첫째는 얼굴이 못생겼고, 둘째는 아름다웠다. 응렴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범교사는 단호히 언니를 맞으라 말한다. 그러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응렴은 그 말에 따랐다. 이것이 응렴이 왕위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헌안왕은 이 일이 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응렴에게 잇게 했던 것이다.
비극적인 세계관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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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이 된 응렴은 원성왕의 손자인 희강왕의 다시 손자에 해당한다. 희강왕은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왕이다. 20세 때 왕위에 오르고 14년간 다스리다 34세에 죽음을 맞았다. 이 시기 다른 왕의 평균재위 연수보다는 길지만, 30대 중반의 죽음이란 자연사일 가능성이 적어, 경문왕 또한 순탄치 않은 생애를 보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경문왕의 생애는 원성왕과 비교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하대의 실상을 읽어낼 대표적인 왕이 이 두 사람이며, 조언자(원성왕의 여삼과 경문왕의 범교사)의 제언을 충실히 따르는 전개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실 두 왕은 이미 기울어가는 시대에 나타난 인물로, 개인적인 능력이나 덕성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 묻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있다는 데서도 닮아 있다. 물론 그 비극성은 경문왕에 와서 한층 강화된다.
여삼은 원성왕에게 자신의 조언을 들을 경우 후손이 열두 손대에 이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원성왕 이후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대 60여 년을 이어가지만, 이렇게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시대는 그만큼 절박했다.
경문왕이야말로 절박함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나귀 귀 말고도 그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른바 뱀 이불 사건이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마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삼국유사]에서)
여기 나오는 뱀을 경문왕의 신변을 지키는 사병(私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경문왕 전후의 많은 왕들이 시해되었다. 그것도 가까운 왕족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니 정녕 누구를 믿겠는가. 믿을 만한 개인 경호원 아니면 안 된다. 궁인들이 내쫓으려 했다는 것은 이들이 공식 호위무사가 아님을 말한다.
그러나 뱀이 곧 실제 뱀이었다고 한다면 경문왕의 처지는 더 처절해진다. 뱀을 이불 삼아 잠자리를 꾸며 흉악스럽게 보여야만 신변이 안전했다. 연산군(1494~1506재위)은 한여름에 침상 밑에 뱀을 집어넣었다. 시원하게 하자는 의도였겠지만 이 또한 신변보호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궁중의 의원들이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기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 받았다는 기록이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경문왕은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이 아무리 어진 성품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로지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그린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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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에 대해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취한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연은 [삼국사기]의 헌안왕 조와 경문왕 조를 인용하되, 거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더 하여, 절묘하게 배치한 경문왕 생애를 그렸다.
이야기는 다섯 단락으로 구분된다. ①경문왕이 경험한 좋은 일 세 가지-②범교사의 조언과 즉위-③뱀 이불 사건-④당나귀 귀 사건-⑤노래 세 편.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취한 스토리텔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5막의 비극을 보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덕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파탄의 국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위에서 ①과 ②는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③과 ④ 그리고 ⑤는 [삼국유사]에만 있는 이야기이다. 이 대목이 일연이 보여주고자 하는 경문왕 이야기의 핵심이다. 괴로운 시대의 비극적인 왕이 가진 세계관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①과 ⑤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구조이다. 좋은 일 세 가지와 노래 세 편이라는 ‘셋’이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
이런 이야기의 구조로 일연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요체를 파악하여 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특별한 치적이 없었음에도 경문왕을 비중 있게 다룬 일연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왕이 된 다음 경문왕은 범교사를 불렀다. 세 가지 좋은 일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범교사는,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라고 답했다. 과연 그랬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나, 부모로서 첫째 딸이 신경 쓰인 왕의 마음을 헤아린 셈이었고, 그 덕에 왕이 되었으며, 왕이 된 바에야 처음 마음에 두었던 둘째마저 제 사람으로 들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를 행해 셋을 얻었으니 크게 남는 장사였다.
어진 성품으로 아래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경문왕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필요한 왕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세 곡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비록 지금은 가사가 없어졌지만, 제목만 보아서도 무엇일지 짐작이 간다. 나라 다스리는 큰 길을 무리 여럿에게 물었다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문왕도 서른 중반에 일찍 세상을 떴다. 처용을 만난 헌강왕이 그의 아들로 뒤를 이었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자기가 앞에 나서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하였고, 한 사람은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여 의복을 사치할 만한데도 늘 삼베와 모시옷을 기꺼워했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릴 자리에 있으면서 한 번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경문왕이 왕자 시절에 한 말. [삼국사기]에서-
당나귀 귀 임금님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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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업적을 내지 못했지만 경문왕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따라 붙은 여러 에피소드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이다. 서양의 동화에서만 나오는 줄 아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뜻밖에 신라 제48대 경문왕이다.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삼국유사]에서)
경문왕의 귀가 커진 것은 즉위한 다음이었다. 여론(輿論)을 경청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대거나, 여색을 좋아한 왕의 성향을 빗대 ‘당나귀 ×’에서 나왔다거나, 해석은 구구하지만 딱 부러지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한 왕의 이름을 기억하게만 할 뿐이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설명이었는데, 사람의 귀는 ‘머리에 붙어 있는 각도가 약 30도 정도로 누워있어야 정상’이지만, 이 각도를 넘어서는 귀를 ‘서 있는 귀’ 그러니까 당나귀 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귀가 이렇게 되면 툭 튀어나와서 실제보다 커 보인다. 당나귀 귀 콤플렉스란 그런 사람들이 갖게 되는 정신적 열등감인 셈이다. 그것이 무슨 콤플렉스로까지 나갈까 싶지만, 당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각도를 눕혀 준다든가 연골을 깎아서 얇게 만든다든가, 다양한 수술방법이 개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술을 해서라도 애써 정상적인 귀를 가지려는 이의 고민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고민 많은 왕이었다. 거기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데, 그만한 기대를 받으며 올라선 왕의 자리에서 부응할 만한 업적을 좀체 내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고민은 이중으로 쌓여갔다.
어진 성품을 갖추어 올라선 왕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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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이고, 희강왕의 손자이다. 861년 장인인 헌안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될 무렵의 신라 왕실은 왕위를 둘러싼 혈전이 끊이지 않았다. 헌덕왕(41)은 애장왕(40)을, 민애왕(44)은 희강왕(43)을, 신무왕(45)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섰다. 그러니 왕의 재위 기간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무왕에 이어 아들 문성왕이 19년간 자리를 지킨 것이나, 그의 삼촌인 헌안왕이 유혈의 비극 없이 왕위에 오른 것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소지는 얼마든 남아 있었다.
헌안왕이 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 때를 헌안왕 4년이라 적었는데,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마침 곁에 있는 응렴에게 물었다.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는 것이었다. 응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삼국유사]에서)
왕은 이 말을 듣고 단박에 응렴의 어진 성품을 알았다.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두 딸 가운데 하나를 시집보내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응렴은 큰 딸을 택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흥륜사의 스님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범교사라 한 이가 조언자로 등장한다.
사실 두 딸 가운데 첫째는 얼굴이 못생겼고, 둘째는 아름다웠다. 응렴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범교사는 단호히 언니를 맞으라 말한다. 그러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응렴은 그 말에 따랐다. 이것이 응렴이 왕위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헌안왕은 이 일이 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응렴에게 잇게 했던 것이다.
비극적인 세계관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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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이 된 응렴은 원성왕의 손자인 희강왕의 다시 손자에 해당한다. 희강왕은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왕이다. 20세 때 왕위에 오르고 14년간 다스리다 34세에 죽음을 맞았다. 이 시기 다른 왕의 평균재위 연수보다는 길지만, 30대 중반의 죽음이란 자연사일 가능성이 적어, 경문왕 또한 순탄치 않은 생애를 보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경문왕의 생애는 원성왕과 비교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하대의 실상을 읽어낼 대표적인 왕이 이 두 사람이며, 조언자(원성왕의 여삼과 경문왕의 범교사)의 제언을 충실히 따르는 전개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실 두 왕은 이미 기울어가는 시대에 나타난 인물로, 개인적인 능력이나 덕성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 묻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있다는 데서도 닮아 있다. 물론 그 비극성은 경문왕에 와서 한층 강화된다.
여삼은 원성왕에게 자신의 조언을 들을 경우 후손이 열두 손대에 이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원성왕 이후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대 60여 년을 이어가지만, 이렇게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시대는 그만큼 절박했다.
경문왕이야말로 절박함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나귀 귀 말고도 그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른바 뱀 이불 사건이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마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삼국유사]에서)
여기 나오는 뱀을 경문왕의 신변을 지키는 사병(私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경문왕 전후의 많은 왕들이 시해되었다. 그것도 가까운 왕족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니 정녕 누구를 믿겠는가. 믿을 만한 개인 경호원 아니면 안 된다. 궁인들이 내쫓으려 했다는 것은 이들이 공식 호위무사가 아님을 말한다.
그러나 뱀이 곧 실제 뱀이었다고 한다면 경문왕의 처지는 더 처절해진다. 뱀을 이불 삼아 잠자리를 꾸며 흉악스럽게 보여야만 신변이 안전했다. 연산군(1494~1506재위)은 한여름에 침상 밑에 뱀을 집어넣었다. 시원하게 하자는 의도였겠지만 이 또한 신변보호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궁중의 의원들이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기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 받았다는 기록이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경문왕은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이 아무리 어진 성품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로지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그린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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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에 대해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취한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연은 [삼국사기]의 헌안왕 조와 경문왕 조를 인용하되, 거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더 하여, 절묘하게 배치한 경문왕 생애를 그렸다.
이야기는 다섯 단락으로 구분된다. ①경문왕이 경험한 좋은 일 세 가지-②범교사의 조언과 즉위-③뱀 이불 사건-④당나귀 귀 사건-⑤노래 세 편.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취한 스토리텔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5막의 비극을 보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덕을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파탄의 국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위에서 ①과 ②는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③과 ④ 그리고 ⑤는 [삼국유사]에만 있는 이야기이다. 이 대목이 일연이 보여주고자 하는 경문왕 이야기의 핵심이다. 괴로운 시대의 비극적인 왕이 가진 세계관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①과 ⑤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구조이다. 좋은 일 세 가지와 노래 세 편이라는 ‘셋’이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
이런 이야기의 구조로 일연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요체를 파악하여 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특별한 치적이 없었음에도 경문왕을 비중 있게 다룬 일연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왕이 된 다음 경문왕은 범교사를 불렀다. 세 가지 좋은 일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범교사는,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라고 답했다. 과연 그랬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나, 부모로서 첫째 딸이 신경 쓰인 왕의 마음을 헤아린 셈이었고, 그 덕에 왕이 되었으며, 왕이 된 바에야 처음 마음에 두었던 둘째마저 제 사람으로 들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를 행해 셋을 얻었으니 크게 남는 장사였다.
어진 성품으로 아래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경문왕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필요한 왕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세 곡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비록 지금은 가사가 없어졌지만, 제목만 보아서도 무엇일지 짐작이 간다. 나라 다스리는 큰 길을 무리 여럿에게 물었다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문왕도 서른 중반에 일찍 세상을 떴다. 처용을 만난 헌강왕이 그의 아들로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