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악 - 왕실제사음악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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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 - 왕실제사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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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2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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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무형유산 가운데 한국 것은 2010년 현재 8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번에 보게 되는 종묘제례악은 2001년도에 종묘제례와 함께 제일 먼저 등재되었습니다. 그만큼 종묘제례악은 세계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중에도 첫 번째로 올라가 있습니다. 종묘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니 이 종묘에는 세계 유산이 두 개나 있는 셈입니다. 서울 한 복판에 그런 유적과 유산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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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악.
550년 왕실의 제사음악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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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종묘제례악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음악이 아주 오래된 음악이라 익숙하지 않고 그 때문에 거의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음악은 왕(후)들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음악이니 평상시에는 더더욱 듣기 힘듭니다. 보통 종묘제례악에 대한 설명들을 보면 도통 알 수 없는 없는 한자말로 되어 있어 이해는커녕 읽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그런 전문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음악이 세계적으로 혹은 동북아시아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것일 겁니다.

여러분들도 종묘제례악이 종묘에서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 앞에서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樂)’과 ‘노래(歌)’와 ‘무용(舞)’을 통틀어서 지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이 세 가지, 즉 ‘악가무’가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항상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예인들은 악기, 노래, 춤에 다 능했는데 요즘엔 그런 (연)예인을 보기 힘듭니다. 이 종묘제례악이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혹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어도 550년은 된 왕실의 제사음악이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예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음악의 기원인 중국에서는 정작 왕실의 제사음악이 사라지고 없는 반면 한국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악은 문묘(성균관)제례악처럼 중국 것을 바탕으로 만든 중국식이 아니고 조선 음악을 토대로 한국식으로 만든 것이라 그 창의력과 독창성도 높이 평가됩니다.
세종시대에 중국식 음악을 한국식으로 변형, 새롭게 창조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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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스터피스(masterpiece)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 세종 빼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세종은 문자나 천문, 농사, 음악 등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재창조해 총정리 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보기 힘든 위대한 임금입니다. 조선 전기까지(엄밀히 말하면 세조 10년 이전까지) 종묘제례악도 중국 음악을 가져다 썼습니다. 세종은 이 음악을 완전히 한국식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잇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 세종은 왜 새로운 음악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세종은 유교의 예악사상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세종이 보기에 중국의 제례악은 진즉부터 위엄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음란한 속악과 섞여 정통성을 상당부분 상실했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세종 때의 명신이었던 정인지는 음악에 대해 “음악은 성인의 성정(性情)을 기르며 신과 사람을 화(和)하게 하며, 하늘과 땅을 자연스럽게 하며, 음양을 조화시키는 방법이어야 한다”라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정통 유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의 제례악은 품위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중국 것은 전승이 끊어져 절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진정한 음악을 재창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이유는 세종의 효심입니다. 당시 종묘에 울려 퍼지던 음악은 고려조로부터 전승된 음악으로 그 근원이 중국이라고 했습니다. 세종은 이게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조상들이 살아 있을 때는 조선 음악을 듣다가 죽어서 제사를 받을 때에는 중국 음악을 들으니 그게 도리이겠냐는 것이지요. 평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던 그는 고려로부터 전래된 청산별곡이나 서경별곡 같은 고려 가요 선율을 이용해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 종묘제례악의 모태가 된 보태평(保太平) 11곡과 정대업(定大業) 15곡입니다(현재는 각각 11곡씩임). 종묘제례에서는 이 두 모음곡이 연주됩니다. 이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은 아주 번잡하니 피하기로 하고 다만 보태평은 조상들의 문덕을 기리는 음악이고 정대업은 조상들의 무공을 찬양하는 음악이라는 정도만 밝히겠습니다. 조상들이 문무에 모두 뛰어나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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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중국식의 음악에서 벗어나 한국식 음악을 창조해 냈다. 종묘제례에서는 보태평과 정대업 두 모음곡이 연주 된다.
동양 최초로 음높이와 리듬을 동시에 표기한 악보 ‘정간보’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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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에는 두 그룹의 악대가 동원되는데 하나는 대뜰 위에서, 다른 하나는 대뜰 아래에서 교대로 이 두 곡을 연주합니다. 앞서 종묘제례악은 악가무가 일체라고 했으니 춤과 노래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겠죠? 우선 음악을 연주할 때 춤이 같이 연행되는데 이것을 일무(佾舞)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한 그룹으로 추는데 한 변에 8명씩 있으니 전체 인원이 64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문덕과 무공에 걸맞은 도구들을 들고 매우 격조 있는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다음으로 노래는 선왕들의 문무 능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이때 선율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 중국과는 다르게 우리말에 맞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종은 보태평과 정대업을 철저하게 조선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세종이 이 두 음악의 전승을 위해 ‘정간보’라는 아주 과학적인 악보를 창안했다는 것입니다. 이 악보는 세계음악사에서 혁혁한 빛을 발하는 대단한 창작물입니다. 정간보의 위대성은 이 악보가 동양 최초로 음높이와 리듬을 동시에 표기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이 음의 높낮이와 리듬입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이것을 확실하게 기록한 악보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종이 처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최초의 일인데 서양의 경우는 리듬을 적은 오선보가 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우리보다 크게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세종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분이라 도대체 못하시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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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 연주 모습. 세종은 종묘제례악에 사용되는 보태평과 정대업의 전승을 위해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했다.
<출처: joonghijung at ko.wikipedia.org>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건만 이 음악(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대에 종묘제례악으로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세종은 이 음악을 회례악, 즉 연회 등을 할 때 쓰는 음악이라고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이 음악이 종묘제례에 쓰인 것은 그의 아들인 세조대의 일입니다(10년, 1464). 제가 추측하건대 세종은 분명 이 음악을 종묘제례 때 쓰려고 만들었지만 사대주의에 젖은 유신들을 의식해 그렇게 추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글 창제 때에도 유신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듯이 이 음악의 사용에도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달랐습니다. 세조는 조선역사 상 신하들에게 가장 무서운 임금이었습니다. 세조는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로 밀어붙여 종묘제례에 세종의 음악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세조는 아버지가 만든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 제사에 맞게 편곡합니다. 한국 국악의 명곡이자 세계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을 겁니다. 부왕이 작곡한 것을 아들이 편곡해 완성시켰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이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적으로도 얼마나 뛰어난 나라이었나를 알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