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 라이프니츠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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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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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5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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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를 조롱하는 철학적 소설 [캉디드]를 썼다. [캉디드]에는 팡그로스 박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라이프니츠의 분신이다. 팡그로스는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고 믿으며 목적론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볼테르는 팡그로스를 조롱하면서 매우 시사적인 말로 [캉디드]를 마무리한다. “내가 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완전한 신에 의해서 최선의 세계로 창조되었다고 믿으면서 신의 섭리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인간인 내가 무엇인가를 직접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프랑스의 또 한 명의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는 라이프니츠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말하고, 라이프니츠를 플라톤에 비견할만한 철학자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디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라이프니츠의 재능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저서들을 집어던지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퉁이에서 조용히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조롱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천재라고 칭송되는 라이프니츠, 그는 도대체 어떤 철학자이기에 이처럼 조롱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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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핵심적인 사고를 집대성한 걸작이라고 할 만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주요 저서로 [단자론], [변신론] [인간 오성에 관한 새로운 시론], [형이상학에 대한 담론] 등이 꼽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모든 철학 체계를 아우르는 저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의 많은 저술은 학술지나 대중적인 잡지에 기고한 글이거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의 저술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며, 여전히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전체 철학체계를 조망하고 그의 핵심적 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여러 저술들에 드러나 있는 그의 사상을 종합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한 해석은 매우 극단적으로 나뉜다. 볼테르의 조롱과 디드로의 찬사 이외에, 라이프니츠 철학체계를 매우 논리적이고 정합적인 체계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철학은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철학자도 있다.
우리는 라이프니츠 철학 중에서도 흔히 단자론이라고 알려진 그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단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철학 체계에서 중요한 몇 가지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원리는 ‘어떤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율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모순율을 근본적 진리라고 불렀다. 이 원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달리 증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근본적 진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라이프니츠의 진리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한 ‘술어 포함 개념 원리’
이다. 이 원리는 참인 명제는 모두 궁극적으로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는 명제가 참인 한, 이 문장의 주어인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개념을 분석하면 ‘철학자’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개념에는 ‘철학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 ~한 철학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는 명제는 결국 ‘~ ~한 철학자는 철학자이다’가 되고, 이는 ‘A는 A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에 다름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와 같이 참인 명제는 궁극적으로 ‘동일률(A는 A이다)’의 명제로 환원된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술어포함 개념 원리2049587376_e75g2FEG_txt_number1.gif이다.
 
세 번째 원리는 충분 이유율인데,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나 발생하는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발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술어포함 개념 원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이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고, 그가 철학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는 ‘철학자’라는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술어포함 개념의 원리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에는 ‘철학자’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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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찬사라는 양 극단의 평가를 받았던 철학자 라이프니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다’가 참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이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술어포함 개념 원리로부터 따라 나오는 충분 이유율은 형이상학, 물리학, 도덕철학 등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이 원리를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네 번째 원리는 완전한 신은 그 행위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신은 항상 최선을 지향한다는 것으로 최선의 원리라고 한다.
다섯 번째 원리는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두 개의 대상이 모든 속성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없다면, 즉 두 개의 대상이 그 속성에서 있어서 완벽하게 같다면, 그 둘은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성에 있어서 완전하게 닮았음에도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앞에서 말한 최선의 원리와 충분 이유율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1)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가 옳지 않다면, 이 세계(W)에 속성은 동일하지만 구별 가능한 두 개의 대상 A, B가 있을 것이다.
2) 모든 점에서 W와 동일하지만, A와 B의 위치만 바뀐 가능세계(W')가 있을 것이다.
3) 신이 W와 W' 중에서 W를 최선의 것으로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W와 W'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
5) 따라서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는 성립한다.
이상의 원리들을 토대로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그의 형이상학을 전개했는지 살펴보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물음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지각과 의지를 지닌 활동적인 단위인 단순실체(simple substance)가 바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실재하는 것을 단순실체라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복합체는 단순체의 집합이다.
2) 복합체는 모두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단순체에 의존한다.
3) 실체는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것이다.
4) 그러므로 부분을 가진 것은 실체일 수 없다. 즉 실체는 복합체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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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실재하는 단순실체를 단자(Monad)2049587376_lhogXnWZ_txt_number2.gif라고 불렀다. 실체로서 단자는 단순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더 이상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 대상일 수도 없다. 그러니까 단자는 공간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세계에 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답하기 위해서 무지개의 비유를 든다. 무지개는 실제로는 무색의 물방울 입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실재 세계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점과 같은 단순한 실체인 단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자들의 표상에 의해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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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Monad : 고대 철학자들에게 있어 Monad는 신, 즉 하나인 존재(더 이상 나눌 수 없는)를 지칭하기 위한 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실체는 복합체일 수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위 논증에서 ‘실체는 자기 충족적(self-contained)’이라는 전제를 사용한다. 실체가 자기 충족적이란 무슨 뜻일까? 앞에서 설명한 술어포함 개념 원리를 기억하자. 그 원리에 따르면 모든 참인 명제는 주어의 개념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술어의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술어포함 개념 원리에 의해서 어떤 실체가 갖는 개념은 그 실체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포함해야 한다. 즉 X라는 실체 개념에는 X에 귀속되는 모든 술어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실체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주어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술어(‘철학자이다’, 플라톤의 제자이다’, ‘알렉산더의 스승이다’ 등)가 포함된다. 어떤 실체 X의 개념에는 그것에게 과거에 발생했던 모든 것의 흔적이 포함되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의 표지가 포함되며, 또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의 자취까지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실체의 완전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유일한 개별자로 기술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개별자와도 구별해 주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체의 개체성(thisness)은 그 실체의 속성 전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실체는 자신의 개념에 의해서 다른 실체와 구별된다. 그리고 실체의 개념에 그렇게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의미에서 실체는 자기 충족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체로서 단자도 자기 충족적이다. 이렇게 실체로서의 단자에는 우주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모든 단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또한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에 의해서 본성에 있어서 동일한 두 개의 단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두 개의 실체, A와 B가 그 개념에 있어서 구별할 수 없다면, 그 개념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A와 B의 완전한 개념은 그것의 개체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즉 A와 B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그 실체들의 개념에서 발견되어야 그 개념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실체는 자신의 개체성을 보증해주는 완전한 개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완전한 개념을 갖는 실체는 우주에 단 하나뿐이다.
단자가 자기충족적이라는 사실이 함축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장은 단자들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실체는 자신이 갖는 속성에 대해서, 그 실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질 이유를 그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다. 즉 실체의 모든 상태는 실체의 완전한 개념에 의해서 설명되고, 근거가 제공되고, 야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자들 사이에 인과관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각 단자는 신 이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단자들은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며, 서로 어떠한 인과적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라이프니츠의 단자가 ‘창이 없다(windowless)’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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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단자가 전체 우주를 비추지만 단자들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명한 괘종시계의 비유를 든다. 매 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두 개의 괘종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 괘종시계가 매 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한 첫 번째 대답은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계가 다른 시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항상 같은 시각을 알리도록 작동한다고 답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한 대답은 시계공이 매 순간 계속해서 같은 시각을 알리도록 뒤에서 조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답은 두 시계 모두 애당초 빈틈없이 정교하게 제작되어 독립적으로 작동하지만 매 순간 정확한 시각을 알려준다고 답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대답이 가장 설득력 있고,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다. 즉 신은 애당초 두 개의 실체가 이미 스스로 타고난 고유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서로 완전한 조화에 도달할 수 있도록 창조했는데, 이런 사실이 두 개의 실체가 마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신이 언제나 손수 개입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신은 매 순간 각 단자의 지각이 매우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각 단자와 단자의 본성을 창조했다. 요컨대 모든 단자는 완전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될 때 그것의 완전한 본성을 부여 받고 그것에 따라 운동하고, 지각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완전한 신의 예지에 의해 예정된 것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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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단자론 첫 필사본.
18세기 철학자들의 공통된 과제는 자신들의 사상적 배경인 스콜라 철학과 17세기 등장한 기계론적 자연철학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였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철학의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토대로 신의 완전한 이성이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고, 움직이도록 설계하였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그는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법칙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도덕법칙이 어떻게 신의 완전성을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목적론과 근대 자연철학의 기계론이 결코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