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문 - [화랑세기] >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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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문 - [화랑세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156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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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김대문(金大問)은 신라 최대의 역사가로, 그가 쓴 신라사는 왕경·진골 귀족 중심의 상당히 객관성을 띤 기록과 해석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는 달리 그에 관한 자세하고 구체적인 자료는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다 돌출한 [화랑세기]로 인해 그는 지금 신라사 연구의 핵심 아이콘이 되어 있다. 김대문은 누구이며 [화랑세기]는 과연 어떤 책인가.
김대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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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가장 자세한 정보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정도가 전부였다.
“김대문은 본디 신라 귀족의 자제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의 도독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 권을 지었으며, 그의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는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삼국사기] 열전의 설총(薛聰) 전에 딸려 있는 기록이다. 그러니까 열전 속에 정식으로 입전(立傳)된 것이 아니라, 신라 시대 유학자의 계보를 연 설총에 붙여서 그 비슷한 인물로 보고 간단히 언급한 것이다. 김부식 자신이 정통 유학자를 자부했으므로, 신라의 인물 가운데 어떻게 하든 한 명이라도 더 유학자를 찾아내고 싶었는데, 아쉬우나마 김대문은 거기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짤막한 기록이지만, [삼국사기]를 통해 그려보는 김대문은 이런 사람이었다. 신라의 귀족이며, 한산주의 도독을 지냈으며, [고승전]을 비롯한 4권의 책을 지었다…. 한산주는 지금의 서울 일대이고, 신라의 5소경이 확립되었을 때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경이었다. 도독은 이찬(伊飡:2급)에서 급찬(級飡:9급)까지의 계급에 해당하는 중앙 관원을 파견하였다. 적어도 이때 김대문은 대아찬(大阿飡:5급) 이상 되었으리라 본다. 4권의 책 이외에,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조에 보이는 이차돈의 순교 기사가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했다는 기록을 감안할 때, 그가 쓴 책은 5권 이상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 학계에서는 김대문을 신라 최대의 역사가로, 왕경·진골 귀족 중심의 신라사를 썼으며, 그 내용은 상당히 객관성을 띤 기록과 해석을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보려 했던 김부식의 의도와는 달리, 김대문은 신라 진골 귀족의 전통을 찬양하며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를 중국화·유교화되어 가는 당대 신라의 분위기에 대해 반발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더 강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대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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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삼국사기]에 인용된 김대문의 글들을 검토해 보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시점에 김대문의 책은 위의 5권이 남아 있었다. 신라본기의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눌지 마립간 조에서 각각 ‘김대문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차차웅·이사금·마립간의 뜻을 풀이하였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에서 재인용된다. 일연은 “[삼국사]에서는 왕의 칭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겨 놓았다”고 전제하며, 필요한 부분을 위 왕들의 조에서 발췌하여 한 문장으로 만들었다. 중간 중간 말줄임표를 넣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에서 왕을 부를 때 거서간이라 하는데 그곳 말로 왕이다. 간혹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 하고, 어떤 이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 김대문은, ‘차차웅은 이 지방 말로 무당을 일컬으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두려워 공경하다 보니, 높으신 분을 자충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 간혹 부르는 니사금(尼師今)은 닛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 남해왕이 죽고 아들 노례왕이 탈해왕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자 탈해가, ‘내가 듣기에 성인과 지혜로운 이들은 이가 많다’하고, 시험 삼아 떡을 물어 보였다. 예부터 전하는 말이 이렇다. …… 어떤 이는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마립이라는 것은 이 지방 말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을 표지로 자리에 세워두면 왕이니, 말뚝은 주인이 되고 신하는 아래에서 말뚝을 따라 줄을 지었다. 이런 까닭에 붙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기이 편, 제2대 남해왕 조에서)
차차웅·이사금·마립간에 대한 이러한 뜻풀이는 오늘날 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로 활용하고 있다. 김대문이 신라 사정에 대해 그 밑바닥부터 훤했으며 후세에 전해야 할 정보의 무엇이 귀중한지 알았던 사람임을 시사해준다. 그는 간단치 않은 사람이었다. 위의 기록은 김대문의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내용의 성격상 [계림잡전]이 아닐까 싶다. 이차돈의 순교를 쓴 바로 그 책이다.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이 화랑 관련 기사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에,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하였다”는 대목이다. 화랑을 말하면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구절이다. 화랑 하면 현좌충신(賢佐忠臣)·양장용졸(良將勇卒)이라는 미사여구가 바로 김대문의 이 글에서 시작하였다. 김부식은 이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든지, 열전의 김흠운 전에 가서 한 번 더 인용할 정도이다.
화랑세기는 김대문의 자기 집안 족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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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김대문을 아연 달리 보아야 할 사건이 터졌다. 그가 썼다는 [화랑세기]가 갑자기 세상에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1989년, 정말 돌출하듯이 [화랑세기]는 세상에 나왔다. 김부식은 이 책을 본 것 같지만, 일연조차 이 책이 사라진 다음의 사람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이 [화랑세기]를 보았다는 어떤 흔적도 없다. 그러니 실로 900여 년 만의 일이다.
다시 나타난 [화랑세기]는 손으로 쓴 필사본이다. 이는 박창화라는 이의 제자가 그의 집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 이번에는 박창화의 후손이 다른 필사본을 공개하였다. 그러나 두 자료 모두 박창화가 필사한 것이라는 설명 외에,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였다. 박창화는 1930년대에 일본으로 가서 궁내청(宮內廳)의 사서로 일했다는 사람이다. 박식하고 기이했다. 본인의 증언을 들을 길 없지만, 그가 궁내청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곳 도서관에서 필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재 공개된 궁내성 도서관의 목록에 [화랑세기]는 없다.
자료의 기본적인 정보부족이 이것의 위서(僞書) 가능성을 자꾸만 불러일으켰다. 원본을 보고 베낀 필사가 아니라 박창화의 소설 같은 저술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박식하고 기인 기질을 가진 그였다 해도,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위서로 꾸며낼 만한 능력을 갖추었는지는 더 의심스럽다. 진서라고도 위서라고도 하지 못할 이 절묘한 상황.
진위논쟁을 잠시 밀쳐놓는다면 [화랑세기]에서 우리는 엄청나고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책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1대부터 마지막 32대까지 차례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풍월주 대부분이 당대 핵심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곧 당대 신라 사회의 핵심이다. 나아가 [화랑세기]에서 우리는 김대문 본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집안은 화랑 그 자체이다. 심지어 [화랑세기]는 김대문 집안의 족보 같은 느낌마저 준다.
화랑 그 자체를 소중히 했던 김대문의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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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라 법흥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문의 6대조 할아버지인 위화랑(魏花郞)은 제1대 풍월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풍월주는 화랑의 우두머리요 상징이다. 부인인 준실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다가 위화랑의 부인이 되었다.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화랑(二花郞)이다. 위화랑은 이찬까지 올랐고, 이화랑은 4대 풍월주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2대 풍월주 미진부공(未珍夫公)과 3대 풍월주 모랑(毛郞)은 위화랑의 사위이다. 그리고 5대 풍월주 사다함(斯多含)은 위화랑의 외손자이다. 결국, 위화랑에서 출발한 풍월주의 계보는 그의 아들, 사위, 외손자로 5대까지 이어진 셈이다. 풍월주 초기 계보는 완벽히 위화랑 집안 잔치였다.
6대 풍월주부터 중심축은 미실의 손으로 넘어간다. 일단 김대문 집안의 힘이 주춤해지는 모습이다. 그러다 12대 풍월주로 보리(菩利)가 나서는데, 그는 이화랑의 아들이니, 초대 풍월주 위화랑으로 치면 친손자이다. 드디어 위화랑은 아들·사위·외손자에서 마침내 친손자까지 풍월주에 등극시킨 것이다. 여기서 보리의 어머니 숙명공주가 문제의 인물이다. 숙명은 법흥왕의 딸이고 진흥왕과 통하여 태자까지 두었다. 그대로 간다면 왕후에 태후까지 누렸겠으나, 이화랑과 정을 통해 두 아들을 두며 비껴 나가고 만다. 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보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원광(圓光) 법사이다. 그러니까 김대문에게 원광은 큰 증조할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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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문의 가계도.
보리는 자신이 화랑의 풍월주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누이 둘이 진평왕의 총애 받는 후궁이어서 자꾸만 벼슬자리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보리는 거절하며, “우리 가문은 대대로 화랑을 이어온 것으로 만족한데 어찌 벼슬을 하겠는가”라고 말한다. 화랑의 집안인 것을 이토록 자랑스러워하기는 김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화랑세기]를 편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대문 집안의 화랑 풍월주 계보는 보리에서 끝난다. 보리의 아들 예원(禮元)이 문무왕 11년(671)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이는데, 화랑을 떠나 제도권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게 된다. 중시는 요즈음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지위이다. 대통령이 때로는 까다로운 정치적 문제를 슬쩍 총리에게 방패막이 시키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신라에서 중시도 그런 역할을 했었다. 화랑은 본디 관리도 아니고 어떤 정치적인 권한을 가지지도 않았다. 명예를 소중히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일정한 시점에 관직으로 말을 갈아타는데, 김대문의 집안은 화랑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으로 만족한, 화랑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그들이 관직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대문도 한산주의 도독을 지내지 않았던가.
화랑의 변화를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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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화랑은 무엇이었을까. [화랑세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이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충신과 맹장을 배출시킨 신라 호국의 간성으로서 화랑은 [화랑세기]를 통해 보건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정리해보기로 하자.
서문에서는 먼저 한 마디로 화랑이 선(仙)의 무리임을 내세운다. 선의 무리는 무슨 일을 했던가. 신라는 신궁(神宮)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마치 중국의 연 나라에 동산(東山)이, 노 나라에 태산(泰山)이 있는 것과 같다 하고, 연부인(燕夫人)이 선의 무리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기른 것과 같이 원화(源花)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길러 신라의 자기 종교인 신궁에서 봉사하게 한 것이다. 제도를 본뜨기는 중국에서 하되, 신라만의 고유 종교로 자기 나라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화랑세기]가 말하는 원화요 화랑의 뿌리이다.
그러다가 법흥왕의 부인인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었다. 화랑이라는 말은 법흥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여기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화랑의 그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만 “본디 선의 무리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만 했으나, 국공(國公)들이 반열에 들어 거행한 후로 도의(道義)로서 서로 권면하였다”는 설명에 이르러서야 화랑은 지금 우리가 아는 화랑과 닮아간다. 그리고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겨났다”는 말로 이어진다. 김부식이 그토록 좋아했던 화랑의 가치 그것이다.
김부식은 [화랑세기] 서문의 이 마지막 문장만을 인용한 것이 된다. 선의 무리이니 신궁에서 제사 받드는 일을 했다는 기록은 제외되었다. 도의로서 서로 권면했다는 일면만 여러 화랑의 사례를 들 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화랑의 한쪽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신관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초창기에 그 일을 김대문의 집안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는 일종의 무당이다. 그러기에 김대문은 차차웅의 뜻을 무당이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문의 집안은 무당이었다.
제정일치 시대에 왕은 정치인이요 무당이었다. 그러다 차츰 정치에 충실해진다. 정치의 역할과 권한이 더 커진 것이다. 신라의 경우, 법제가 만들어지는 법흥왕 때, 정치로서 통치는 왕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사 또한 여전히 소홀할 수 없었다. 어여쁜 여자를 길러 원화라 이름 붙인 이들이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안녕을 비는 일은 오랜 전통 속에 있었다. 이를 좀 더 체계화하자고 화랑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김대문의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초대 풍월주로부터 그들 집안 식구가 차례차례 그 자리에 오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정치에 비해 비중이 작아지는 쪽이 제사였다. 김대문의 집안이 화랑을 자랑스레 여기지만 벼슬자리에 나오라 유혹이 이어지는 것은 어느쪽의 비중이 더 큰지 웅변하는 사태이다. 결국, 도의로 권면하는 화랑으로 성격이 변하고, 그 출신들이 나라의 일을 맡아 하는 관리가 되었다. 김대문은 이런 변화의 한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신라 정부로서는 화랑을 조직적으로 이용하였다. 김대문은 화랑의 변하기 이전의 모습부터 충실히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집안의 전통을 생각하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이었다. [화랑세기]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